월간참여사회 2016년 11월 2016-10-31   2968

[통인] 일본대사관 앞 소녀상의 비밀 – 김서경·김운성 조각가 부부

 

일본대사관 앞 소녀상의 비밀

김서경·김운성 조각가 부부

 

 

글. 박상규
전 오마이뉴스 기자. 회사를 그만둔 지금은 지리산 자락에서 사는 백수지만, 여전히 취재를 하고 기사를 쓰는 기자다. 
사진. 김경희 미디어홍보팀 간사

 

소녀는 언제나 같은 곳을 바라본다. 눈빛에선 단호함, 분노, 슬픔이 함께 보인다. 두 주먹은 불끈 쥐었지만, 두 발은 맨발이다. 뒤꿈치는 살짝 들린 상태다. 서울 광화문 인근 일본대사관 앞에 앉아 있는 소녀상. 일본과 박근혜 정부는 소녀가 자리를 뜨길, 다른 곳으로 가길 희망한다. 소녀는 자리를 뜰 생각이 없다. 시선을 돌리거나 눈도 깜빡이지 않는다. 많은 시민도 소녀와 같은 생각을 한다. 오늘도 많은 시민이 소녀 옆을 지킨다. 

이 소녀는 어디서, 어떻게 우리 곁으로 왔을까? 소녀상을 만든 김서경, 김운성 부부를 지난 10월 18일 참여연대에서 만났다. 두 사람은 참여연대 팟캐스트 방송을 통해 소녀상에 얽힌 이야기를 먼저 들려줬다. 두 사람의 이야기를 월간 <참여사회> 독자에게도 전달한다. 

이력을 보니, 소녀상만 제작한 게 아니다. 미선이 효순이 추모비, 동학 100주년 기념 무명 농민군 추모비, 독립운동가 조문기 선생 기념비 등을 제작했다. 최근에는 안타깝게 사망한 백남기 농민을 추모하는 조형물까지 만들었다. 

김서경 1980년대에 중앙대학교 조소과 1기로 입학했다. 그때 사회, 역사 문제에 눈을 떴고 세상과 소통하는 조각을 하고싶은 마음이 생겼다. 그동안 어떻게 하면 많은 사람들과 공감하고 소통할 수 있을까 생각하면서 작업을 했다.

 

20161018-6337

 

    사회성 짙은 작품활동을 자주 했는데, 경제 활동은 어떻게 하나. 
김서경 결혼 후 3년 정도는 미술학원을 했다. 하지만 오히려 제도교육의 문제를 느꼈고, 우리 부부가 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1997년 이전에는 나름대로 잘 나가는 작가여서 작품 활동으로 먹고 살았다.

 

    일본대사관 앞 소녀상, 어떻게 만들게 됐나. 
김운성
2011년 12월 14일이 일본군 위안부 피해를 겪은 할머니들이 매주 수요일에 개최한 ‘수요집회’ 1000회를 맞는 날이었다. 사실 당시에 우린 모르고 있었다. 2011년 1월, 일본대사관 앞을 지나다 수요집회를 보고 깜짝 놀랐다. ‘이걸 아직까지 하는구나…’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 굉장히 죄송했다. 수요집회를 시작한 이래 20년 동안 해결된 게 없었다. 

죄송한 마음에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회(정대협)을 찾아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느냐, 그것으로라도 미안함을 덜고 싶다’고 말했다. 처음엔 정대협에서 비석을 제안했다. 바로 비석 디자인을 시작했는데, 금방 ‘대사관 앞에 비석 세우지 말라’는 일본 측의 압박이 왔다. 미술하는 사람들은 표현과 창작의 자유를 목숨처럼 생각한다. 그런데 디자인 단계에서 압박을 하다니. 
비석으로는 안 되겠다 싶어 다시 정대협을 찾아갔다. ‘우리가 조각가니까 더 확장하자, 그래야만 일본에 사죄와 반성을 더 강하게 요구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 비석 대신 조각을 하겠다고 하니 정대협에서 좋아했다. 애초 구상은 소녀상이 아니었다. 20년 싸운 할머니들의 노고와 일본을 혼내주는 모습을 담으려고 했다. 아내 김서경 조각가가 사람들에게 감동과 공감을 주고 싶어서 지금의 소녀상을 제안했다.

 

    김서경 작가는 어떻게 소녀상을 구상했나.
김서경
지금의 할머니들은 소녀였거나 젊은 여인일 때 피해를 당하기 시작했다. 그녀들은 지금 숨겨진 역사를 많은 사람에게 알리고 공유하려고 일본대사관 앞을 지키는 거다. 그런 역사를 알리려면 그녀들이 당했던 그때 당시의 모습을 표현해야만 했다.

 

    소녀상에서는 단호함, 분노, 슬픔이 함께 느껴진다. 
김서경
20년 수요집회 역사, 소녀 시절의 아픔, 해방 이후 이 땅에 돌아와서 겪은 외면도 담아야했다. 슬프기도 하고, 화도 나는 표정이어야 한다. 수십만 명에 이른다는 위안부 아픔의 역사를 시민들이 소녀를 통해 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소녀가 남이 아닌 나, 내 가족처럼 보이길 희망했다. 그래야 시민들이 더 공감할 수 있을 테니까. 평화를 지키고 미래 아이들은 자신들과 같은 아픔을 겪지 않았으면 하는 염원도 담아야 했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그 자리를 지키는 강인한 의지 또한 나타내고 싶었다. 일본 정부가 없애려는 ‘헌법 9조’, 그들이 전쟁에 대한 의지를 반성하고 자각해야 한다는 메시지까지, 소녀상이 다 품기를 바랐다.

 

    만드는 과정이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상처와 분노를 표현하려면 창작자도 공감을 많이 해야 하지 않나. 
김서경
역사와 그녀들의 사연을 알아야 했다. 공부를 하면서 위안부 문제에 접근했다. 소녀상 제작을 위해 3개월 동안 흙 작업을 했는데, 감정이입을 하다보니 어떨 때는 남자인 남편이 소녀상을 만지는 게 불편하기도 했다. 그래도 같이 토론하고, 아파하고…. 3개월은 몹시 힘든 시기였다. 소녀상을 세우지 말라는 일본 정부의 압력으로 소녀상의 모습도 달라졌다. 처음엔 손 모양이 다소곳 했는데, 주먹 쥔 모습으로 바꿨다. 굳건한 의지를 표현하고 싶었다.

 

    지난 겨울부터 소녀상을 철거하라는 일본 정부의 노골적인 요구가 시작됐다. 
김운성
한일 외교 수장들이 합의했다면서 소녀상 철거 이야기가 들려왔다. 일본이 이렇게 작고 ‘쪼잔’하다는 걸 그때 알았다. 남의 나라, 크지 않은 조각을 일국의 총리라는 사람이 치우라고 요구하는 게 얼마나 쪼잔한가. 그런 모습을 보면서 분노도 했지만, 우리가 이길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도 했다. 슬픈 건, 우리나라 정부와 대통령이 일본의 요구에 합의했다는 점이다. 그 점이 가장 슬프고, 괴롭다.

    

   ‘소녀상 철거 요구’ 소식이 전해진 뒤 많은 시민이 소녀상 지킴이로 나섰다. 
김서경 소녀상 제작하면서 어떻게 하면 많은 분들이 역사를 알게 할까, 어떻게 하면 위안부 문제가 남의 일이 아니란 걸 느끼게 할 수 있을까, 많이 기도하면서 작업했다. 소녀상을 설치할 때가 크리스마스 이브 즈음이어서, 여러 시민이 소녀상에 목도리를 둘러주고 모자를 씌워 주면서 마치 살아있는 소녀처럼 대해줬다. 
소녀상 철거 논란이 인 작년 12월 이후에는 더 많은 분들이 관심을 보였다. ‘머리 아프지?’ 하면서 소녀상에게 타이레놀을 주고 핫팩, 소화제까지 선물했다. 일본이 지우려 하는 역사를 많은 분들은 기억해야 한다고 맞섰고, 의지를 보여줬다. 많은 감동을 받았다.

 

    소녀상이 이렇게 사랑받을 거라고 예상했나?
김서경 예상이 아닌 염원을 했다. 
김운성 아까 말한 대로, 처음엔 소녀상이 아닌 비석을 고민했다. 이게 다 일본 정부의 ‘공’이다. 비석 세우지 말라고 요구해서 소녀상이 태어났다. 이제는 소녀상을 철거하라고 하니, 오히려 소녀상이 외국으로까지 확산되고 있다. 일본 정부가 꾸준한 역할을 하고 있다. (웃음)

 

    지금까지 소녀상 몇 개를 만들었나. 
김서경
우리가 만든 건 여섯 가지 형태인데, 한국에는 40곳, 외국에는 4곳에 세웠다. (미국에 두 곳, 캐나다에 한 곳, 호주에 한 곳). 조만간 중국에도 세운다.

 

    비용이 만만치 않았을 텐데. 
김서경
처음부터 국민 성금으로 제작됐다. 해외에서도 마찬가지다.

 

    일본 정부 도움(?)으로 소녀상이 퍼지고 있다고 했는데, 소녀상 잘 지켜질까? 
김운성 지금 국민 열기를 보면 철거 못할 거 같은데, 혼이 정상이 아닌 사람이 (대통령으로) 있다. 이 사람은 자기 임기 내에, 의무감을 가지고 (철거를) 진행할 수도 있다. 그래서 불안감도 있다.

 

지난 7월, 소녀상 제작 과정을 담은 책 <빈 의자에 새긴 약속>을 냈다. 그 책에서 소녀상에는 12가지 상징이 있다고 썼다. 
김서경
소녀상이 처음에는 지금의 형태가 아니었다. 댕기머리를 구상했었다. 제국주의 탓에 끌려간 걸 어떻게 담을까, 타의에 의해 끌려간 걸 표현하기 위해 거칠게 잘린 단발로 표현했다. 어깨 위의 새는 평화 염원과 염매를 뜻한다. 생존하신 분과 돌아가신 할머니들을 연결하고 싶었다. 
할머니들 고통의 역사와 이 땅에 돌아와서도 가족, 나라로부터 외면당한 아픔을 맨발로 표현했다. 고국으로 돌아와서도 명예회복이 안 된 불편함을 발 뒤꿈치 들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했다. 소녀상 뒤에는 그림자가 있는데, 할머니들이 지금껏 살아온 세월을 뜻한다. 돌아가신 할머니들도 같이 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하얀 나비를 가슴에 새겼다. 
소녀상 옆 빈 의자에는 세 가지 의미가 있다. 돌아가신 할머니가 빈 의자에 앉아 함께 해주길 바라는 마음, 지나는 어떤 사람이든 빈 의자에 앉아서 할머니들과 함께 일본대사관을 보면서 생각하길 바라는 것, 그리고 그 자리에 앉아서 할머니·소녀와 함께 평화의 약속을 지키자는 ‘의지의 자리’라는 의미를 담았다. ‘평화비’라는 글씨가 있는데, 길원옥 할머니가 직접 쓰셨다.

김운성 하나가 빠졌다. 소녀상과 한 조가 되는 게 일본대사관이다. 일본대사관이 없으면 의미가 없다. 그것(일본대사관)도 작품 중 하나다.

 

 

평화의 소녀상2애도와 추모의 벽

김서경·김운성 조각가 부부가 제작한 일본대사관 앞 평화의 소녀상(좌)과 보신각 앞 고 백남기 농민 추모와 애도의 벽(우).

 

    다음 주제로 넘어 가자. 최근 백남기 농민이 사망했는데, 두 분이 서울 종로 보신각 옆에 ‘추모의 벽’을 세웠다. 
김운성
백남기 선생님이 쓰러질 때 나도 현장에 있었다. 모두가 확인한 대로, 경찰이 물대포를 직사로 쏴 백남기 선생을 쓰러뜨렸다. 그런데도 서울대병원은 사망원인이 ‘병사’라고 한다. 살인자가 경찰인데, 그들이 부검을 하겠다고 한다. 너무 가슴이 아파 뭐라도 하고 싶었다. 대책위와 유족 등이 ‘추모의 벽’을 세우고 싶다고 해서 작업을 했다. 지금은 보신각 옆에 임시로 설치되어 있는데, 영구히 설치가 돼서 경찰이 사죄해야 하는 증거물, 정부가 반성하는 증거물이 됐으면 한다.

 

    백남기 농민 추모의 벽에는 어떤 부분을 표현하고 싶었나. 
김운성
백남기 선생 얼굴이 무척 자애로워 보인다. 항상 농사를 지은 분의 모습을 따뜻하게 그리고 싶었다. 밀 농사를 지었으니 어깨에 밀을 그렸다. 국민들은 백남기 선생이 살해되는 모습을 봤다. 국민들이 의견을 밝히고 종이를 붙일 수 있도록 벽을 만든 것이다. 

 

    추모의 벽은 어느 분이 주로 디자인을 했나. 
김서경
이번에는 김운성 작가가 주도적으로 했다. 김운성 작가가 드로잉을 하고, 추모의 벽에 채워지는 부분은 함께 논의를 했다. 견고한 추모의 벽을 만들어 오래 기억되는 설치물이길 바랐다. 시민들이 포스트잇을 붙이면서 역사가 쌓이고, 의지가 쌓이길 바랐다. 4개의 벽으로 되어 있는데, 단조로움도 피하고, 어떻게 설치하든 가변적 설치가 가능하게 만들었다. 
어디 놓느냐에 따라 다르게 보일 수 있게 했는데, 지금은 일렬로 되어 있다. 경찰이 개입한 탓에 원하는 자리가 아닌 구석에 설치해 마음이 불편하다. 360도에서 볼 수 있는 곳이면 사람들이 많이 보고 참여하기도 쉬운데, 많이 아쉽다. 추모의 벽이 열린 공간으로 갔으면 좋겠다. 지금 추모의 벽 옆에 경찰들이 항상 나와 있다. 그들이 물대포를 쏜 당사자인데, 그들이 또 막고 있는 거다. 이런 현실에 자괴감을 느낀다.

 

    두 분은 1980년대 상황에서 많은 걸 배웠고, 그로부터 30여 년이 지났다. 아직도 거리에서 시민이 공권력에 의해 사망하는 현실에 많은 생각이 들 것 같다. 
김서경
열심히 한다고 했는데 이 정도밖에 못해서 자식들에게 미안하다. 과거 김대중 정권 하에서 통일 분위기가 있었기에, 내 아들은 커서 군대를 선택할 수 있겠구나 싶었다. 하지만 달라진 게 없다. 과연 딸은 이 사회에서 안전하게 보호받을 수 있을까? 아닌 것 같다. 우리가 소통의 무기로 삼은 건 조각이라는 매체다. 그 매체를 통해 이야기하면서, 열심히 한다고 했는데…. 청년들에게 미안하다.

 

    소통의 무기는 조각이라고 했는데, 지금까지 늘 시대의 아픔에 공감하는 작품 활동을 해왔다. 심적으로 고통스러운 순간이 많았을 것 같다. 
김서경
집에 있는 게 괴로우면 거리로 나갔다. 현실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 작가는 작품으로 표현해야 하는데, 그것조차 힘들 때가 많다. 최근 9년 동안 고통의 시간이었다. 소녀상이나 추모의 벽을 통해 표현하면서 치유도 하고 있다. 아픔을 창작에 녹이면서 그나마 치유가 되는 게 있다. 다른 식으로 승화할 수 있는 힘이 생긴 것 같다. 

 

    ‘외면’이라는 편한 길도 있었을 텐데. 
김운성
외면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마저 빗겨 서면, 예술로 기록하고 (시대의 아픔을) 증거로 남길 수 있는 게 없을 것 같더라. 다른 작가들도 있지만, 우리도 빗겨 서지 말고 맞서자고 다짐했다. 불안하고 슬프기도 하지만, 같이 어깨 걸 수 있는 사람도 생겼다. 감사한 일이다.

 

20161018-

    마지막으로 추상적인 질문을 하나씩 던지고 싶다. 김서경 작가에게 예술은 무엇인가.
김서경
흙 만지는 걸 제일 좋아한다. 내가 하고 싶은 얘기를 풀어내는 도구는 조각이다. 예술은 따로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누구나 예술을 하고 있고, 누구나 예술적 표현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살아가는 일 자체가 예술 행위가 아닐까 싶다.

 

    김운성 조각가는 어떤 예술가로 남고 싶나. 
김운성
꾸준하게 작업하고 싶다. 어떤 분들은 ‘소녀상 이후 걸작이 안 나오니까 당신은 죽은 사람 아니냐’고 한다. 아주 사소하고 작고 서툴더라도 꾸준히 하고 싶지, 걸작을 남기고 싶은 생각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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