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9년 12월 2009-12-01   2626

참여사회가 눈여겨본 일_한국의 근현대 광장의 역사


“광장은 열려야 한다”


황병주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원 


얼마 전까지 한국사회에서 광장은 그렇게 친근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최근 시청 앞 서울 광장, 청계 광장, 광화문 광장 등이 들어서면서 어느덧 광장은 제법 익숙한 것이 되고 있다. 더욱이 21세기 들어 한국사회는 제법 많은 ‘광장 경험’을 하게 되었다. 2002년 월드컵 당시의 길거리응원, 2008년 광우병 쇠고기 관련 촛불시위 등은 광장의 의미를 새롭게 각인시켰다고 보인다. 여기에 ‘아고라’와 같은 인터넷 공간이 새롭게 등장하여 쇠고기 촛불시위를 거치면서 사이버 광장의 위력을 유감없이 보여주기까지 하였다.




광장, 그리스 이래 도시민의 핵심적 생활·정치 공간

그러면 광장이란 무엇인가? 한국 전근대 역사에서 광장 또는 그것에 비견될 만한 것을 찾는 것은 쉽지 않다.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 등 조선시대의 대표적 기록들에서 광장이란 용어는 발견되지 않는다.1) 이는 곧 광장이 근대 이후 외부에서 도입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East Colonnade of the Agora / Nysa ad Meander주지하듯이 광장의 기원으로 꼽히는 것은 그리스의 아고라Agora와 로마의 포룸Forum이다. ‘모이다’는 뜻을 가진 말에서 기원한 아고라는 아크로폴리스와 함께 그리스 도시국가의 핵심공간이었다. 아고라 주변으로는 시장이 형성되기도 했으며, 사교와 토론 등이 일상적으로 이루어지던 곳이었다. 아고라와 함께 큰 도로를 뜻하던 플라테이아plateia가 광장의 기원으로 거론된다. place, platz, piazza, plaza 등 광장을 의미하는 유럽 각국의 용어의 기원이 바로 이 플라테이아였다. 따라서 아고라와 플라테이아의 결합이 곧 광장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 로마의 포룸 또한 주변에 신전, 목욕탕, 시장 등이 위치한 토론과 집회의 공간이었다.2)

그렇지만 근대 유럽의 광장은 중세시대 광장이 그 모태라고 얘기된다. 광장은 기본적으로 도시와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 다수 군중이 밀집생활을 하게 되는 도시에서 주민의 소통과 교류를 위한 공동공간의 필요성은 매우 절실했던 것이다. 중세 도시가 제법 발달했던 유럽과 달리 한양을 제외하면 도시가 없었다고 할 수 있었던 전근대 한국에서는 광장 또한 존재할 수 없었다.

중세 유럽의 광장은 매우 다양한 형태를 갖고 있었고 규모 또한 소규모 광장부터 국가적 규모의 기념비적 광장 등 매우 다양하였다. 기능도 다양해서 공중의 여론이 교류·형성되는 공론장이자 시장이기도 했고, 다양한 문화행사 및 종교의례가 이뤄지는가 하면 지배 권력의 위력이 현시되는 곳이자 피지배자들의 저항이 시작되는 곳이었다. 대부분의 광장은 도시의 핵심부에 위치하면서 도시의 모든 것이 집중되는 공간이었다. 도시 중심부는 권력자들의 공간이었고 광장 주변은 길드 본부, 교회 그리고 시장으로 둘러싸인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광장에 가까울수록 지배와 중심에 가까운 것이었다.

절대주의 시대 이후 기념비적 대규모 광장들이 조성되어 절대 권력의 공간으로 배치되었다. 지배의 공간은 곧 저항의 공간으로 전화되기도 했는데, 루이 15세 광장이 혁명광장이 되어 단두대가 설치된 것은 대표적인 예였다. 근대이후 도시화와 대중사회화가 급속하게 진행되면서 광장은 더욱 큰 중요성을 띄게 되었다. 일상과 여가의 공간으로 사용되는 것은 물론 대중 민주주의가 일반화된 조건 하에서 광장은 대중 정치의 유력한 공간이 되었다.

요컨대 광장은 서구적 기원을 갖고 있는 것이었고 시대에 따라 일정한 변화가 있기도 했지만, 그리스 이래 도시민의 핵심적 생활-정치 공간이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광장 또한 근대 이후 서구 근대성이 전 세계로 확산되는 과정에서 한국으로 유입된 것이었다.

 
종로에서 열린 만민공동회, 근대적 광장 정치 예고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 개막연설
백정 박성춘(朴成春) 1898. 10. 29.


대한제국기에는 광장이란 용어 자체가 없었다고 보이지만, 광장의 역할을 하는 특정한 장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대표적인 공간이 대한문大韓門(당시에는 大安門) 앞과 종로 일대였다. 대한문은 덕수궁(당시에는 경운궁)의 정문으로 아관파천 후 고종이 경복궁 대신 경운궁으로 거처를 옮기자 정궁의 정문이 되었다. 그래서 대한문 앞은 국왕의 지배권을 상징하는 공간이자 각종 상소가 행해지는 장소가 되었다.

그렇지만 대한제국기 가장 중요한 광장 역할을 한 공간은 무엇보다 종로 일대였다. 그것은 한국 최초의 근대적 대중 집회라 할 수 있는 만민공동회가 종로 일대에서 개최된 것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아관파천 이후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전개된 만민공동회는 1898년 3월부터 연말까지 단속적으로 진행되었는데, 종로와 경무청 앞, 인화문 앞 등이 주요 장소였다. 백정에서부터 정부 고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신분의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서 공동의 사안을 놓고 집회를 할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당시로서는 가히 혁명적인 것이었다.

여기서 종로가 만민공동회 장소로 채택된 것의 의미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조선시대 가장 중요한 정치적 공간은 궁궐, 특히 정궁이었던 경복궁 일대와 육조거리(현재의 세종로 일대)였다. 반면 종로는 육의전이 있었던 시전거리로서 조선시대 기준으로는 그 중요도가 한참 떨어지는 곳이었다.

그런데도 만민공동회는 육조거리가 아닌 종로에서 개최되었다. 이는 곧 만민공동회가 국왕을 정점으로 하는 신분제 지배질서에서 벗어난 정치적 실천이라는 것을 공간적으로 확인시켜주는 것이었다. 즉 궁궐과 육조거리가 상징하는 장소성을 벗어나 새로운 정치적 장소성을 실천적으로 구성하는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만민공동회는 근대적 광장 정치를 예고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한편 광장과 유사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공원이 있다. 공원 역시 서구 근대의 산물이었고 조선에서는 낯설고 이질적인 것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독립협회의 활동이었다. 주지하듯이 독립협회는 독립문, 독립신문 등과 함께 독립공원 조성계획을 수립했다. 이때 공원은 기념적인 것, 계몽수단의 하나로 이해되었다. 식민지기 이후 공원은 정치행위의 매우 중요한 공간으로 등장한다는 점에서 독립공원의 의미를 과소평가해서는 안될 것이다.




3·1운동이 일어난 탑골공원

식민지기에 들어와서도 광장은 흔한 것이 아니었다. 정치적 성격을 갖는 옥외집회가 원천적으로 금지되어 있는 상황에서 광장 정치가 활성화되기는 힘들었다. 광장이라는 이름이 붙은 곳들은 남산에 있던 조선 신궁의 상·중·하 광장이나 선은전 광장鮮銀前廣場으로 불렸던 현재의 한국은행 앞 광장 등이 있었다.

그렇지만 1920년대 이후 광장이란 용어는 널리 확산되고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각급 학교 운동장을 광장으로 부르는 것이었다. 보통학교나 고등보통학교 운동장은 도심의 대표적인 빈 공간이었는데, 운동장이라는 명칭과 함께 광장이라는 용어가 혼용되고 있었다.3) 운동장은 사실 연병장에 가까운 것이어서 군사훈련이나 집단행사 등에 더 어울렸다. 일제는 운동장을 전체주의적 인간 양성에 중요한 공간적 장치로 이용했다.

이러한 점에 비추어 보건대 식민지기 광장이라는 말은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보인다. 하나는 고유명사로 쓰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넓은 장소’라는 일반 명사로 쓰인 것이다.

식민지기 광장이라는 이름이 붙기도 했고 또 실제 광장 역할을 한 대표적인 장소는 남산의 조선신궁에 있던 상·중·하 광장이었다. 이중에서 제일 큰 곳은 중광장이었는데, 주요 종교행사는 물론이고 다양한 관변집회가 개최되곤 하여 광장정치의 일단을 잘 보여주었다.

다음으로 광장이란 이름이 붙은 곳은 선은전 광장이었는데, 사실상 교차로의 의미가 더 컸다고 생각된다. 이는 경성부청 앞도 마찬가지였고 광화문 일대도 동일했다. 다만 선은전 광장은 분수대로 조경을 했다는 것이 특이했다.

한편 ‘조선인 사회’의 광장은 어떠했는가? 조선인 사회의 대표적 광장 역할을 한 것은 탑골공원이었다. 조선인 사회의 중심은 북촌과 종로였고 탑골공원은 그 중심에 위치하고 있었다. 고종의 명에 의하여 공원으로 바뀐 이래 탑골공원은 각종 문화행사가 열리는 북촌의 대표적 도심 광장공간으로 기능했는데, 결정적으로 조선인 사회의 중심공간으로 부각된 것은 3·1운동이 일어난 장소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사정이 이러했기에 탑골공원은 1932년까지 총독부가 직접 관리했다. 총독부는 탑골공원을 수차례 폐쇄하려고 시도했으며 의도적으로 요정 및 요리점의 신축을 허가해 결국 북문(공원 북부에는 조선인이 많았다)이 폐쇄되어버리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게다가 총독부는 탑골공원의 광장적 성격을 탈각시키기 위해 나무를 빽빽하게 심는 등의 방법으로 단순한 공원으로 만들고자 했다.


6월 항쟁 거치면서 민주화의 성지 된 명동성당

1987년 6월 민주항쟁 당시 명동성당해방공간의 주요한 광장의 정치 무대는 서울운동장과 남산공원(조선 신궁터)이었다. 미군정기 3년 동안 서울운동장에서 개최된 대규모 집회는 대략 29회였는데 이중 우익이 19회, 좌익은 8회에 머물렀다. 남산은 반대로 좌익의 집회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남산공원에서는 대략 6회의 대규모 집회가 개최되었는데, 좌익이 5회 우익이 1회였다.4)

이 두 곳을 제외하고 광장의 성격을 가졌던 곳은 서울시청 앞이었다. 1945년 말부터 식량사정이 극도로 악화되자 수많은 여성들이 서울시청 앞에 몰려가 ‘쌀을 달라’고 요구하면서 시위를 벌이는 사건이 1946년 상반기까지 지속되었다. 이외에 중앙청(구 조선총독부) 앞에서 1945년 10월에 한민당 주최로 연합군 환영대회가 열렸는데, 중앙청 앞 집회는 이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미군정기 이후 광장의 정치가 가장 격렬하게 나타났던 것은 4·19였다. 4·19 당시 중요한 광장의 정치가 이루어졌던 곳은 서울시청 앞과 세종로 일대였다. 서울시청 앞은 곧 당시 국회 앞이기도 했으며 세종로 일대는 경무대와 연결되는 권력의 핵심공간이었다. 그래서 이 일대는 당시 언론에서 종종 ‘민의의 광장’으로 불렸다. 

이는 확실히 식민지기나 미군정기와 달라진 장소성이었다. 정부 수립 이후 한국의 권력구조가 결정되고 그 공간적 배치가 세종로-태평로 축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면서 광장의 정치 또한 새로운 공간배치에 규정되었던 것이다.

박정희 체제기 광장의 정치는 5·16 광장(여의도광장)으로 대표되었다. 5·16 광장 건설은 동질적 집단주체를 구성하는 광장의 정치 체험이 대규모적으로 이뤄질 수 있는 공간배치가 이루어진 것이었다. 대규모의 집단주의적 동원정치의 역사적 사례 중 대표적인 것이 나치 독일이었는데, 뉘른베르크 집회장은 확장된 광장으로서 그 대표적인 상징이었다. 이는 사회주의 국가들도 마찬가지여서 모스크바의 붉은 광장, 중국의 천안문 광장, 북한의 김일성 광장 등이 대규모의 군중동원을 위한 공간으로 배치되었다. 박정희 체제의 5·16 광장은 이러한 역사적 선례들과 비견될 만한 것이었다. 5·16 광장은 애초 미국 워싱턴의 내셔널 몰National Mall을 본떠 건설하려고 했었지만, 박정희의 명령으로 아무 것도 없는 아스팔트 광장이 되었다고 한다.5)

그 거대한 규모는 개체의 왜소함과 대비되어 위압감을 주기에 충분하다. 특히 5·16 광장은 붉은 광장이나 천안문 광장에 비해 규모는 작았지만 완전히 텅 비어 있는 특성상 개체의 왜소함을 자극하는 강도는 훨씬 더 강력했다. 이 위압적 공간 속에서 이루어지는 거대한 군중집회나 대규모 군사 퍼레이드는 광장의 정치가 개체를 어떻게 길들이고자 하는가를 잘 보여준다.

1987년 6월 항쟁 최고의 광장은 명동성당이었다. 명동성당은 6월 항쟁을 거치면서 ‘민주화의 성지’가 되었고 최근까지도 숱한 광장의 정치가 이루어지는 공간무대가 되었다. 특정한 정치적 실천이 특정한 장소성을 구성하며 이러한 장소성 체험의 누적이 곧 성지를 만드는 것이었다. 이는 1970년대 민주화 운동에서 종교계가 차지했던 의미와 역할과 밀접하게 관련되는 것이었다.




일상·문화·정치… 모든 것에 열려야


광화문광장에서 광장조례개정을 위한 서명운동 - 2009.12.12 참여연대


한국의 광장은 서구에서 유입되어 식민지기에 본격화된 것으로 볼 수 있었다. 식민지기의 흔적은 조선신궁 중광장이 현재 백범광장이 되었고 경성부청 앞이 서울 광장으로 이어지는 것을 통해 확인된다. 식민지 지배자들의 신성한 공간이 독립 한국의 ‘민족적 성역’이 된 역설 속에 한국의 광장이 놓여 있는 것이었다.

21세기 들어서 한국의 광장 정치는 월드컵 거리응원과 촛불시위로 상징된다. 특히 2008년도의 광우병 쇠고기 관련 촛불집회는 한국사회에서 광장의 정치가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는 것을 잘 보여주었다. 새로운 정치적 실천과 행위는 새로운 광장을 구성하게 될 것이다.

최근 개장된 광화문 광장은 새롭게 구성되어야 할 광장과 관련해 여러 시사점을 던지고 있다. 서울시의 사용 규칙은 까다롭고 복잡하지만, 한 마디로 ‘정치적인 것’은 안 된다는 것으로 요약가능하다. 이는 서울광장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권력자의 입장에서 광장은 정치와 멀리 떨어진 공간이길 바라는 듯하다. 권력이 제시하는 문화와 여가, 휴식의 공간으로만 광장을 규정하는 것은 탑골공원에 나무를 빽빽이 심었던 총독부의 그것을 닮았다.

광장의 중요한 특징은 그것이 텅 빈 공간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광장은 무엇보다 대중의 공간이기에 다른 장식물은 최소화해야 할 것이다. 미리 구성된 고정 장식물에 의해 광장이 점령되고 나면, 대중은 부차적인 존재로 밀려나게 된다. 즉 미리 결정된 광장이 대중을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 스스로가 텅 빈 공간에서의 자율적 행위를 통해 새로운 것을 구성할 수 있는 광장이어야 하는 것이다.

비어 있다는 것은 곧 열려 있다는 것과 연결되는 것이다. 즉 광장은 대중의 다양한 삶과 행위에 열려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일상과 문화는 물론 정치적인 것에도 열려 있는 광장이야말로 우리가 새롭게 구성해야 될 것이지 않을까 한다. 5·16 광장은 비어 있었지만 열려 있지 않은 공간이었다. 즉 그것은 일상과 유리된 거대한 군사적, 정치적 의례공간으로 닫혀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광장을 특정한 장소성으로 국한되지 않는 구성적인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즉 미리 조성된 광장을 사용하는 것보다 모든 곳을 광장으로 구성할 수 있는 전복적 상상과 실천이 중요할 것이다.



광장을 시민품으로

정부지원금 0%, 회원의 회비로 운영됩니다

참여연대 후원/회원가입


참여연대 NOW

실시간 활동 SNS

텔레그램 채널에 가장 빠르게 게시되고,

더 많은 채널로 소통합니다. 지금 팔로우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