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8년 02월 2008-02-12   2253

[이제훈이 만난 사람] 대한민국은 일본을 닮아가는가?_서경식 도쿄경제대 교수


대한민국은 일본을 닮아가는가?


서경식 도쿄경제대 교수



글     이제훈<한겨레> 통일팀장 nomad@hani.co.kr
사진  김영광 사진가 k-photo@hanmail.net


“2006년 4월 이후 한국에서 지내는 동안 개인으로선 행복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하지만 한국사회의 변화가 너무 빨라 당혹스럽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다. 젊은 사람들과 얘기하다보면, 1980년대 민주화운동 시절을 당시 일본에 있던 나는 기억하는데, 한국의 젊은이들은 모른다. 오히려 내가 그 시절 얘기를 해줘야 하는 그런 상황이 당혹스럽다.”

서경식 도쿄게이자이(경제)대학 교수(현대법학부)는 한국에서 지낸 2년 가까운 생활의 소회를 이렇게 정리했다. 요약하자면, 한국사회의 ‘망각’은 당혹스럽고 두려운 변화다. 이 소회의 문맥은 깊고 넓다. 이제 그 갈피를 헤쳐보자(인터뷰는 1월 16일 서울 마포구 창전동 그의 아파트에서 이뤄졌다).  


한국서도 일본서도 관찰자로 그치는 코리안 디아스포라


서경식(57세)의 거처는 일본이다. 그러나 그는 ‘일본인’이 아니다. 그는 대한민국 국적 소유자이다. 하지만 그는 일본에서도 한국에서도 주류는커녕 온전한 ‘일원’으로서의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다. 그는 일본에서도 한국에서도 참정권을 행사하지 못한다. 두 사회에 걸쳐 참여자이자 관찰자다. ‘마이너리티’(소수자)다. 한국과 일본을 묶고 가르는 ‘슬픈 역사’는 그를 세상에 내놓은 자궁이자 젖줄이었고, 현재이자 미래다. 대담집 「만남」을 서경식과 함께 펴낸 김상봉 전남대 교수는 그를 ‘역사의 화석’이라고 불렀고, 그와의 대좌를 ‘역사와의 만남’이라고 했다.


서경식은 중년에 접어든 뒤 스스로를 ‘코리안 디아스포라’(조선인 이산자)라고 규정한다. “20세기 국민국가 식민지시대를 거치며 원래 살던 공동체를 떠나야 했던 이들과 나는 공통점이 있다. 그런 점에서 나의 삶은 예외적이지 않다. 행복하지는 않지만, 현대 인류의 역사에서 오히려 보편적 삶의 방식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1990년대 후반부터 누군가 ‘너는 누구냐?’라고 물으면 ‘코리안 디아스포라’라고, 일단 그렇게 얘기하고 있다.”


서경식 교수(오른쪽)와 필자 이제훈 기자(왼쪽)

역사의 수레바퀴에 짓밟힌 이산자의 슬픔

‘디아스포라’(Diaspora). 원래 ‘이산'(離散)을 뜻하는 그리스어다. 대문자로 쓰면, 기원전 6세기 ‘바빌론 유수’ 이래 팔레스타인 땅을 떠나 세계 여러 곳에 흩어져 사는 유대인과 그 공동체를 가리킨다. 
하지만 오늘날 이 말은 유대인들뿐 아니라 아르메니아인, 팔레스타인인 등 다양한 이산 민족을 일반적으로 지칭하는 소문자 보통명사로 사용하는 사례가 많아졌다.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침략 이후 그곳으로 끌려간 아프리카 노예들, 북아메리카의 노예해방 이후 그 빈자리를 메우려고 등장한 중국인 노동자들(쿨리), 이스라엘 민족이 서아시아(이른바 중동)의 심장에 유대인의 나라를 세우는 사이 대대로 살던 고향에서 쫓겨난 팔레스타인 난민 등 자기가 속해 있던 공동체와 땅에서 쫓겨난 사람들은 모두 ‘디아스포라’라고 할 수 있다.(거기엔 유대 시오니즘의 불행한 결과인, 팔레스타인 난민과 서아시아의 끊임없는 분쟁과 갈등이라는 역설 또한 존재한다. 진실은 복잡하다)
그래서 ‘디아스포라’라는 말에는, 슬픔이 배어 있다. 역사의 수레바퀴에 짓눌린 약소민족의.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외세의 침략에 짓밟힌 약소민족의 힘없는 민중들의.

진실은 모든 타자와의 대화 거쳐 조금씩 다가가는 것

서경식의 ‘디아스포라’는 신화로 덧칠된 유대인의 그것보다는, 20세기 중반 이후 ‘고난 받는 소수 민족’의 상징이 되어버린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그것에 가깝다. 하여, 서경식의 삶과 정신에서 ‘팔레스타인 디아스포라’인 에드워드 사이드는 중요하다. 죽을 때까지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지배에 맞섰던 사이드는 ‘저항의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내게 선택의 여지가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1967년(제3차 중동전쟁) 이후 어느 시점에서 나는 ‘소집’당했다. 팔레스타인 투쟁은 정의가 무엇인지 묻는 것이었기 때문에 거의 승산이 없었지만 계속 진실을 설파하려는 의지의 문제였다.” 그리고 서경식은 말한다.

“(사이드의 대답은) 현대 지식인이 맡아야 할 역할에 대한 명확한 답변이었다. 코리안 디아스포라의 한 사람인 나 또한 사이드가 남긴 말을 잊지 않고 진실을 계속 이야기해가려 한다.”(「시대를 건너는 법」, 한겨레출판)

그에게 진실이란 “모든 타자와의 대화를 거쳐 조금씩 다가가는 것”이다. 그 방법은 강자와 이른바 ‘선진국’들이 독점해온 ‘이것이 진실이라고 결정내릴 권리’를 박탈당한 상황과 담론 지형을 바꾸려고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것이다.  

숨 막히게 하는 일본, 약자에 대한 공감 잃어가는 한국

서경식은 자신이 나고 자란 일본이라는 사회를 “공기가 점점 희박해져가는 지하실, 염천에 달궈져 지글지글 수분이 증발해가는 작은 웅덩이”에 비유한 적이 있다. 일본의 무엇이 그를 숨 막히게 하는 것일까?

 “재일조선인은 식민지배의 소산으로, 곧 일본국가의 책임으로 일본에 살게 됐다. 하지만 대다수 일본 시민들은 그런 역사에 대해 지식도 없고 자각도 없다. 제도적, 사회적 차별은 심각하다. 일본에서 진보적 지식인이라고 할 이들도 이런 역사에 대한 기본적 지식이 없다. 나한테 ‘선생님은 언제 일본에 오셨어요? 일본말은 어디서 배우셨어요?’라고 묻곤 한다. 역사의 산물로서 재일조선인이라는 존재가 일본 다수자에게는 보이지 않는 존재인 셈이다. 이런 우경화 경향은 1990년대 이후 더 심해졌다. 폭력적 독재자가 시민사회를 억압해서 그런 게 아니라는 게 심각한 문제다. 일본 시민 다수가 자기 권리를 자각하지 못하고 내부에서부터, 자유주의적 시민운동 등 좋은 일을 하던 사람들조차 생활보수주의에 빠져 일본국가가 나가고 있는 위험스런 방향에 저항을 제대로 못하고 있는 상황을 심각하게 생각한다. 방향을 바꿔 좋아질 전망도 보이지 않는다.”

지금 일본사회엔 저항의 거점도, 주체도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조국’이라고 할 한국은?

“대한민국은 (박정희)군정시절, 반공이데올로기를 내세우던 시기엔 일본과 다른 의미로 살기 어려운 사회였다. 하지만 사회적으로 억압받고 있는 사람에 대한 공감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공감의 바탕이 이 사회에 제대로 살아있는지 의심스럽다.”

‘기억의 투쟁’의 지체와 우경화

서경식에게 ‘기억의 투쟁’은 숙명이자, 과거를 딛고 미래로 나아가는 징검다리다. 이 점에서 한국사회가 ‘이명박 정부’를 선택한 건, ‘역사의 증언자’ 서경식에겐 걱정되는 사태 전개다.

“한국에서는 김대중 대통령 시절 이후 군정시절을 포함한 역사에 대한 기억의 투쟁이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는 주로 피해자로서 가해자인 일본에 대한 투쟁이었다. 그러나  좀더 좋은 사회가 되려면 자기성찰, 내부투쟁을 피할 수 없다. 나는 이번 대선의 결과로 기억의 투쟁이 지체될 것이라고 본다. 군정 독재정권이 복귀한다는 게 아니다. 신자유주의 시대에 강국이 되려면 내부 갈등은 적당히 넘어가야 한다는 담론과 풍조가 고조될 것이다. 억울하게 살아온 사람들의 목소리가 억제될 것이고, 앞으로 그게 심각한 사회문제로 분출될 것이다. 일본의 우경화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 일본은 그런 목소리를 외면해왔기 때문에, 피해자들의 외침이 90년대에 분출된 것이고, 그 분출을 비합리적으로 억압하려고 하니까 우경화하는 것이다.”

한국은 ‘베트남’과 어떻게 만날 것인가?

이 대목에서 서경식에겐 ‘한국(조선)-일본’의 역사가 ‘베트남-한국’의 역사와 겹쳐진다.

“지난주 전남대에서 철학국제대회가 열렸을 때 베트남 철학교수의 보고가 있었다. 그런데 한국 참석자 가운데 누구도 한국의 베트남에 대한 전쟁책임이나, 베트남 결혼 이민 얘기를 하지 않았다. 베트남 처지에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일본 한국 관계에 비유하면 알기 쉽다…. 어머니가 일본글을 못 읽는다. 어릴 때 학교에서도 좀 어려웠고, 그 이유를 몰라 많이 고민했다. (한국에 온 베트남)결혼 이민 자녀들이 나와 똑같은 경험을 하고 있을 거다. 광주 전주 등에서 그런 얘기 많이 들었다. 한국은 앞으로 외국인 노동자나 결혼이민자와 함께 사는 사회가 될 수밖에 없다. 다른 선택지가 없다. 지금 같은 식이라면 이 나라에 결혼이민자녀가 수만 명, 수십만 명 생겨날 것이다. 농촌에서 어머니는 외국인이고, 한국말 잘 못하고, 그 결과로 학습능력이 낮고…. 그런 집단이 대한민국에 소수자로 커 가면 인종차별, 계급차별이 고착화될 수 있다. 그런데 한국엔 일관된 대책이 없다. 대책을 세울 때 가장 중요한 건 ‘식민 지배를 받은 우리 조선민족이 겪은 고통을 이 사회의 성원으로 살아갈 사람에게 주면 안 된다’는 원칙이다.”(서경식은 어느 글에서 자신의 이런 ‘원칙’이 구현된 한국 사회의 모습을 “그들의 모어와 문화를 대등한 것으로 존중하는 사회, 조선어는 물론이고 일본어, 중국어, 러시아어, 영어 그리고 언젠가는 베트남어도 공용어로 인정받고 유통되는 사회”라고 상상한 바 있다)

가족의 역사, 분단의 역사를 정리하고 싶다

그는 인터뷰가 끝난 뒤 “솔직하게 말하자면, 글쟁이로서 인생의 남은 큰 과제가 두 개 있다”며, 홍조어린 웃음을 지었다. 하나는 어머니 오기순을 중심으로 가족의 역사를 그려내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분단 역사에 대한 생각을 잠정적으로 정리할 ‘북’에 대한 글을 쓰는 것이다.
 그는 3월이면 서울에서 지낸 2년에 걸친 안식년 생활을 마치고 일본으로 떠날 예정이다.



서경식은 ‘대한민국 국적의 재일조선인 2세’다. 일제 강점기 피식민지 민족의 고통을 온몸으로 감당해야 했던 서승춘과 오기순의 아들이다. 조국이 전화에 휩싸여 있던 1951년 일본 교토에서 태어났다. 가난한 노동자 마을에서 성장기를 보냈다. 스무 살 무렵 조국으로 유학 갔던 그의 두 형(서승, 서준식)이 ‘대학가에 침투한 재일교포 간첩단’이라는 조작 사건에 걸려 20년 가까이 감옥살이를 했다. 박정희 유신독재 정권 시절 내내, 그리고 그 후로도 오래도록 그는 형들의 옥바라지와 석방운동에 청춘을 바쳤다. 1974년 와세다대학 프랑스 문학과를 졸업했다. 지금 그는 도쿄게이자이대학 교수로 일하고 있다. 1995년 자전적 에세이인 「소년의 눈물」로 일본 에세이스트클럽 상을 받았다. 2002년엔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시대의 증언자’의 상징이 된 프리모 레비를 다룬 「프리모 레비를 찾아서」로 일본 이탈리아문화원 마르코 폴로 상을 받았다. ‘역사의 슬픔’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역사의 수레바퀴에 짓이겨진 소수자의 외침을 세상에 전해온 문필가다. 「디아스포라 기행」 「시대를 건너는 법」 「사라지지 않는 사람들」 「만남」 「나의 서양미술순례」 「난민과 국민 사이」 「단절의 세기 증언의 시대」 등 다수의 저작이 국내에 소개돼 있다.


 ※ 바로 잡습니다


편집 과정에서 <이제훈이 만난 사람> 의 인터뷰이 서경식 교수님의 학교명 ‘됴쿄경제대’를 ‘됴쿄대’로 잘못 기재했습니다. 「참여사회」 표지와 기사의 인터뷰이 기재 부분에서 오류가 생겼고, 기사 본문에는 정확하게 기재되었습니다. 서경식 도쿄경제대 교수님, 필자 이제훈 <한겨레>통일팀장,  「참여사회」독자 분들께 다시 한 번 죄송하다는 말씀 드립니다. 앞으로 이런 실수가 없도록 주의하겠습니다. 「참여사회」편집부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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