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8년 11월 2008-11-06   1876

[이제훈이 만난 사람]뉴라이트는 90년대 이후 역사 전진에 대한 반동현상

 
뉴라이트는 90년대 이후 역사 전진에 대한 반동현상


서중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이제훈이 만난 사람


글    이제훈<한겨레> 통일팀장 nomad@hani.co.kr
사진  김영광사진가 k-photo@hanmail.net


“…뉴라이트들이 옛 동료들을 향해 사상고백을 하라고 을러대는 모습을 보면서 정말 품성이 중요하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지금 뉴라이트 문제, 이는 이념의 문제가 아니다. 주체사상 식으로 얘기하면 품성의 문제이고, 우리의 일상의 말로 바꾼다면 ‘싸가지’ 문제일 뿐이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가 2005년 1월 <한겨레21>에  “뉴라이트는 ‘품성’을 갖춰라”라는 제목으로 쓴 글의 끝부분이다. 

한데, 그 ‘싸가지’가 문제일 뿐이던 이른바 ‘뉴라이트’가 2008년 대한민국 역사의 전면에 나섰다. 이명박 정부, 청와대와 국회 등지에 둥지를 틀었다. 광복절을 건국절로 바꾸려 하고, 중고등학교 역사교과서를 고치려 하고, 각종 과거사위원회를 역사 속으로 묻어버리려 하고, 지난 10년간 강화되어온 남북 화해협력의 흐름을 역류시키려 하고 있다. ‘친북좌빨들에 의해 훼손되었던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바로 세워야 한다’는 게 이런 행보의 명분이다(뉴라이트 등 이른바 ‘대한민국 정통보수’들은 자기네와 의견이 다른 사람들을 ‘친북좌빨’(친북한+좌익 빨갱이)라고 부르곤 한다). 

지금 대한민국에서는 온갖 곳에서 ‘뉴라이트’가 문제다. 이승만 초대 대통령을 ‘건국의 아버지’로, 박정희 전 대통령을 ‘부국의 아버지’로 치켜세우고 있는 뉴라이트의 근현대사 인식이 천박하고 균형감각을 결여하고 있다는 다수 학자들의 지적과 별개로, ‘뉴라이트’들의 현실 권력 지형에서의 영향력은 문제다. 힘센 자들과 이권이 있는 곳으로만 몰린다는 ‘돈’이 뉴라이트 단체들에 몰려드는 건 그 한 방증일 수 있다. 자고 일어나보니 유명인사가 되어 있더라는 어느 시인의 고백도 있었지만, 자고 일어나보니, 세상에 웬 ‘뉴라이트’가 그렇게 많은지…….


노사학자에게 뉴라이트를 묻다

하여, 이번 호에선 그 스스로 근현대사의 일부였을 뿐만 아니라, 곡절 많은 근현대사를 연구하고 동시대인들에게 알리는 데 평생을 바친 노학자를 만나보기로 했다. 성균관대 서중석 교수다. 서 교수는 역사문제연구소 소장,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 민간위원, 아시아평화와 역사교육연대 상임공동대표, 남북역사학자협의회 남측위원장 등을 맡고 있다. 1974년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는 등 젊은 시절을 반독재 민주화투쟁에 바쳤다. 학자가 된 뒤로도, 역사의 상흔에 ‘반성과 용서와 화해’의 징검다리를 놓으려는 지난한 몸짓에 늘 함께 해왔다. 올 들어선 “한국현대사에서 감춰진 국가폭력의 진실을 규명함으로써 사회정의를 실현하려”는 목적 아래, 시민중심의 과거청산작업을 지속하기 위해 <진실과 정의>라는 포럼을 새로 만드는 데에도 주도적으로 나섰다. 이명박 정부의 각종 과거사위원회 정리 움직임에 대한 맞대응의 성격이 강하다.

서 교수와의 1시간 30분 남짓한 만남의 상당 부분은 ‘뉴라이트’에 관한 문답이었다. 한국의 근현대사 연구에 평생을 바쳐온 노학자에게 ‘싸가지’ 뉴라이트 얘기를 꺼내는 건 결례일 뿐만 아니라, 질문자에게도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죄송스럽게 생각한다.


‘민족’ 기피하고 ‘민중’ 업신여기고

이른바 ‘뉴라이트’와 ‘올드 라이트’는 같다고 보는가, 다르다고 보는가? 다르다면 뭐가 다르다고 생각하는가?

“우선 뉴라이트가 그렇게 영향력을 크게 발휘하는 것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수구보수세력이 일제 강점기부터 전두환 때까지 기득권을 누려왔는데도 학문적 이론적 능력이 부족한 게 아닌가, 그러니까 뉴라이트가 저렇게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게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든다. 우리 민족 전체의 역량이 이만큼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올드 라이트와 다른 게 없는 거 같다. 올드 라이트와 다르려면 새 세대의 감각과 역사인식에 맞춰 우익적 견해를 훨씬 더 현실에 맞게 적용해나가야 한다. 또 6월 항쟁 이후 민주화와 과거사 청산은 우리 사회가 대세로 받아들여야지 부정의 대상이 아니다. 그런데 ‘뉴라이트’라면서도 젊은 세대를 이해하는 것 같지도 않고, 6월 항쟁 이후 한국인 모두가 당연시하는 민주화 과정에 불만과 부정적 인식이 강한 것 같다. 그러며 펴고 있는 논리는 올드 라이트와 같다. 아니, 올드 라이트보다 더 하다. 올드 라이트는 그래도 차마 일제 강점기를 미화하지는 못했다. 그런데 뉴라이트는 (일제의 지배가 조선의 근대화에 크게 기여했다는)놀라운 주장을 하기도 한다. 도대체 우리가 어느 시대를 살고 있나 하는 생각까지 든다.”

뉴라이트 역사인식의 특징은 뭐라고 생각하나?

“그들이 역사인식을 공유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몇 사람이 여기저기 쓴 글 따위를 보면 두 가지 정도가 눈에 띈다. 우선 ‘민족’이라는 말을 쓰는 걸 기피하는 것 같다. 또 ‘민중’을 업신여기고, ‘민중=강력한 권력 밑에서 통제되어야 하는 존재’라는 사고가 엿보인다. 그들은 한국인이라는 것을 강조하지만, 민족이나 한국사회에서 도피하려는 의식이 보인다. 반민족적, 반민중적인 19세기식 엘리트주의가 작용하고 있는 것 같다. 스스로 자유주의사관이라고 주장하는데, 극우적 역사인식을 드러낸 일본 후쇼사 교과서의 자유주의사관을 연상시킨다. 그런 역사관은 위험하다.”


수구 및 극우반공 세력의 방어의식 대변

일제 강점기 친일파한테는 강제, 강압이라는 게 있었는데, 뉴라이트한테는 외부에서 누가 강제하는 게 없지 않나? 그런데도 왜 뉴라이트는 일제 강점기를 미화하는 역사관을 주장하는 것일까?

“이른바 ‘올드 라이트’들은 조심하고 두려워해서 역사적 현상에 대해 겉과 속이 다른 반응을 보이는 측면이 있었는데, 뉴라이트는 다르다. 시대와 사회의 변화가 작용한 측면이 있다. 1970~80년대엔 강압적 분위기 탓에 냉전적 의식 말고는 다른 어떤 것도 공개적으로 말하기 어려운 흑백사회였다. 그런데 (1987년)6월 항쟁 이후 민주화되면서 현대사 연구가 장족의 발전을 거듭했고 많은 성과를 냈다. 일제 시기 친일파, 민족개량주의자, 실력양성론자, 해방 뒤 단독정부론자, 이승만 박정희 독재, 4월 혁명 등에 대해 상당히 깊이 있는 연구가 이뤄졌다. 그러면서 일부 수구언론이나 극우반공통치에 협력해 수혜한 이들이 한편으론 혼란스러워하고 다른 한편으론 자기행위를 정당화하려는 강한 방어욕구가 발동한 것 같다. 그래서 예전의 이중적 행태를 걷어차고 ‘내가 과거 일제 때 한 게 꼭 잘못이냐? 이승만, 박정희 때 협력한 게 뭐 잘못이냐, 경제 성장하려면 그럴 수밖에 없지 않았냐?’ 이런 식으로 나오는 거 같다. 뉴라이트들이 이런 것을 감각 있게 잡아내 대변해준다는 느낌을 받았다. 1990년대, 2000년대 역사가 전진한 것에 대한 반동 현상이다.”

<진실과 정의> 포럼의 기본 문제의식은 뭔가?

“보수세력이 가장 싫어하고 두려워하는 게 과거사의 진실이 밝혀지는 거 아니겠나? 현 정부 들어 가장 큰 어려움을 겪을 게 과거사위원회 아니겠냐는 생각을 많은 사람들이 했다. 21세기 들어 간신히 국가적 차원에서 과거사 문제에 접근할 수 있게 됐고 많은 의혹사건의 진상을 밝히는 작업을 할 수 있게 됐는데…. 과거사 문제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면, 민주주의와 인권, 바람직한 미래를 조망하기 어렵다. 과거사위원회 활동이 중대한 위기를 만날 수 있다는 위기감 속에 여러 갈래 논의가 있었고, 그 가운데 하나로 <진실과 정의> 포럼을 만들게 된 것이다.”


근현대사에 무관심하고 복고주의 강한 한국인

요즘 인문사회과학 서적이 참 안 팔리는데 그나마 역사책은 좀 나가는 것 같다. 사람들이 역사책에 관심을 보이는 이유는 뭐라고 생각하나?

“사람들이 연속 사극에 유난스런 친근감을 보이고, 연속 사극이 커다란 인기를 끄는 게 놀랍다. 만날 장희빈 뭐 그런 비슷비슷한 얘기인데도 꾸준하게 인기다. 요사이엔 무대가 고대사로 이동한 거 같다. 한데 근현대사는 무시당하고 인기도 없다.
어찌됐든 이런 게 사람들이 역사에 관심이 많아서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난 한국인의 역사에 대한 관심이 프랑스나 유럽인이 갖고 있는 그것과 상당히 다른 것이라고 생각한다. 근현대사에 관심이 없고, 복고주의적 사고가 강하다. ‘박정희 향수’로도 설명될 수 있는 현실도피, 과거에 안주하고 싶은 감상주의, 그러니까 강한 역사인식이나 자의식과는 오히려 정반대에 있는 도피의식과 관련이 있는 측면이 많다고 본다.”

인터뷰 끄트머리에 ‘역사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는 이상한 질문을 던졌다. 노학자의 답변은, 단호하고도 묵직했다. 서 교수는 “역사란 교훈을 삼기 위해서, 비판정신을 높이기 위해 배우는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역사란 기억의 정치’라는 누군가의 절규와 다르지 않은 말이다.

그러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전에는 (사람들이)진실을 알게 되면 사회가 많이 달라질 거라고 믿었는데, 오히려 거꾸로 되더라. 지금은 현대사 연구로 세상을 바꾸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현대사 연구는 계속 해야 하지만, 사회 전체를 바꾸는 작업에서 현대사 연구는 아주 작은 부분이라고 생각한다.(…)우리 근현대사가 얼마나 기구하고 굴절이 많은지, 인간답게 제대로 살기가 얼마나 어려운 세상이었는지 그런 걸 뼈저리게 느끼게 한다. 누구도 당당하게 살기가 어려운 그런 사회였다…….”
60평생을 근현대와 뒹굴어온 노학자는 ‘누구도 당당하게 살기 어려운 그런 사회’였다고 되뇌었다. 그런데 ‘싸가지’ 뉴라이트는 당당 그 자체다.


역사는 반복된다, 비극과 희극으로 

칼 마르크스는 프랑스혁명에 관한 그의 유명한 저서인,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 이렇게 적어놓았다. “…헤겔은 어느 책(역사철학강의)에서 역사는 두 번 반복된다고 했다. 한번은 비극으로, 한번은 희극으로…그러나 나는 그가 다음을 빼먹었다고 생각한다. ‘처음은 비극으로, 두 번째는 희극으로…….’

헤겔과 마르크스가 언급한 ‘역사의 희비극’이 머릿속을 맴도는 어수선한 나날이다.



서중석은 1948년 8월 25일 충남 논산에서 났다. 서울고를 졸업하고 67년 서울대 사학과에 들어갔다. 84년 8월 서울대 국사학과를 졸업했다. 17년 만이다. 박정희 때 두 번, 전두환 때 한 번, 모두 세 번 대학 밖으로 쫓겨났다. 젊은 시절, 삶 자체가 역사였고, 저항이었다. “유인태, 이철이, (나)병식이, 김효순이…”, 민청학련 주역들의 이름이 온화한 미소를 타고 부드럽게 쏟아져 나온다. 79년부터 88년까지 신동아 기자 노릇을 했다. 96년부터 성균관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일하고 있다. 늦깎이 학생을 거쳐 학자의 길로 들어선 것에 대해, “정치나 사회활동을 하기엔 부적합한 체질이고, 건방진 건지는 모르겠지만, 공부 체질”이라고 말했다. 공부할 수 있게 된 것을, “내 길을 찾은 셈”이라고 규정했고, “현대사와의 지루한 싸움을 하게 된 것”이라고 표현했다.
생활은 지나칠 정도로 단순하다. 공부 빼고는 산행이나 산책이 낙이다. 스무 살 이후로 몸무게가 늘 62~63kg을 벗어나지 않았다. 그만큼 자기 관리에 철저하다는 뜻이다. 스스로를 ‘새마을 학생’이라고 부른다.
딸이 하나 있는데, 미국 아이오와대에서 공부하고 있다. ‘역사학을 해라, 잘 하면 출세할 거라고 권했더니, 정치학과에 들어가서 제일 안 팔리는 동남아를 하고 있다’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정부지원금 0%, 회원의 회비로 운영됩니다

참여연대 후원/회원가입


참여연대 NOW

실시간 활동 SNS

텔레그램 채널에 가장 빠르게 게시되고,

더 많은 채널로 소통합니다. 지금 팔로우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