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8년 04월 2008-04-02   2319

이제훈이 만난 사람_최유림 천안 두정중학교 영어교사





소리로 만나는 세상



최유림 천안 두정중학교 영어 교사


이제훈<한겨레> 통일팀장  사진 김영광 사진가


친구의 형은 지체장애인이다. 전동휠체어의 도움 없이는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한다. 그 형은 1980년대 중반 내가 대학에 다닐 때, ‘전설’이었다. 당시 학생운동과 사회운동에 큰 영향을 끼친 정파의 거두였다. 그 형이 자신을 쉼 없이 쫓던 ‘군사독재의 파수꾼들’에게 잡혔을 때, 텔레비전 방송 뉴스는 “어려서부터 소아마비로 자라 사회에 불만을 품고 책을 많이 읽어 이념적 편향이 심한…” 식으로 보도했다. 운동권 주요 인사의 체포 사실을 보도하며 ‘책을 많이 읽었다’는 사실을 도드라지게 전하는 뉴스는 그 전에도, 그 후로도 접해보지 못했다.


형은 지금은 장애인들을 중심으로 이뤄진 ‘사회적 기업’을 이끌고 있고, 다양한 사회운동에 관여하고 있다. 가끔 그 형을 만난다. 그럴 때마다 곤혹스럽고 민망하다. 전동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형과 함께 만날 수 있는 마땅한 곳이 떠오르지 않아서다. 어딘 문턱이 있고, 어딘 계단을 통하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고, 어딘 식당 내부에 전동휠체어가 다닐 수 있는 통로가 없다, 대충 이런 식이다. 형을 만날 때마다, ‘전동휠체어가 자유로이 드나들 수 있는 장소를 알아둬야겠다’는 다짐을 하지만, 그때뿐이다. 결국은 늘 그 형이 약속 장소를 정한다. 10년 가까이 내 태도에 달라지는 게 없는 걸 보면, ‘무관심의 병’을 언제나 고칠 수 있을지 걱정이다.



시각장애 딛고 일반학교 영어교사 되다


3월 21일 저녁 7시 30분 참여연대 5층 소회의실에서 천안 두정중학교 영어교사로 일하고 있는 최유림 씨를 만났다. 왜 최 선생을 만났냐고? 기자 특유의 싸가지 없는 답변을 하자면, 4월엔 장애인의 날이 있고, 그는 ‘시각장애인으로 일반 과목 임용시험에 합격해 일반 중학교에서 영어교사로 일하고 있다’는 ‘한국 신기록 보유자’라는 사실이 적잖이 작용했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1시간 30분 남짓한 인터뷰 내용을 풀어가기 전에 그가 쓴 책의 일부를 길게 인용하는 것으로 내게 허용된 지면의 상당 부분을 채울 생각이다. 아깝지 않다.




“얘들아, 유림이 봐라. 병신 같지 않냐?”


수업 시연을 끝낸 나를 보고 휴버트 교수님이 다짜고짜 하신 말씀이었다.


강의실이 찬물을 끼얹은 듯이 조용해졌다. 나 역시 너무 놀라서 움찔했다. 비록 시각장애인이긴 하지만 대놓고 나한테 그런 욕설을 퍼부은 사람은 없었다. 교수님이 세게 나올 거라고 짐작하긴 했지만, 막상 당하고 보니 얼굴이 저절로 화끈거렸다. 내가 서 있던 곳은 중등교사 임용고시 2차 시험을 준비하는 임용캠프 강의실이었다. 2007년 중등교사 임용고시 2차 합격자 발표 직후였다. 교사가 되려는 사범대 학생들은 임용고시 1차 시험에 합격한 뒤 곧바로 2차 시험 준비에 들어간다. 1차 시험은 지필고사지만 영어교육과 2차 시험은 한글면접과 영어면접, 논술과 학습지도안 작성, 그리고 수업 시연까지 모두 5가지나 된다. 다른 대학교는 임용고시를 대학이나 학과 차원에서 어떻게 준비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공주대학교 영어교육과에서는 임용캠프를 운영한다.


지도교수인 휴버트 교수님께 치욕적인 욕설을 들은 나는 어찌할 줄 몰라 엉거주춤하게 서 있었고, 여기저기서 학생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대부분이 너무한다, 저렇게까지 해야 되나? 이런 말들이었다.


그런 소리를 무시한 채 교수님은 다시 말씀하셨다.


“얘들아, 너희들이 보기엔 유림이의 어디가 이상해 보이니? 자, 하나씩 지적해보자.”


잠시 뒤에 마지못해 한 명이 말을 꺼냈다.


“시선이 한 방향에만 고정돼 있어서 자연스럽지 않습니다.”


“그렇지? 바로 그거야! 유림아, 우린 지금 강의실 한가운데에 앉아 있어. 그러니까 너도 가운데를 바라봐야지. 넌 처음부터 끝까지 대각선 방향만 바라보고 수업을 했어. 사람은 여기 있는데 왜 그 구석만 바라보고 있는 거야?”


선생님은 가까이 다가와 내 몸이 한가운데를 바라보도록 돌려놓으셨다. 하지만 그게 쉽지 않았다. 시각장애인들은 앞을 똑바로 바라보고 서 있을 수가 없다. 언제나 한쪽 발을 반 발자국 정도 앞으로 내밀고 서기 때문에 몸이 약간 틀어지게 되고, 때문에 시선은 어쩔 수 없이 대각선 방향을 바라보게 된다. 시각장애인이 아니더라도 눈을 감은 채 오랫동안 서 있으려면 자연히 그렇게 된다. 두 발을 나란히 놓고 서 있으면 넘어질 위험이 크기 때문이다. 결국, 일반인들이 앞으로 똑바로 바라보고 서 있을 수 있는 것은 눈이 보이기 때문이다. 나는 몸을 똑바로 세우고 정면을 바라보기 위해 애썼다. … 지금까지 내게 이런 지적을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20년 넘게 내 몸에 굳어진 습관을 한 순간에 고치는 건 힘든 일이었다. 교수님은 모욕을 주는 극단적인 방법을 사용해 오랫동안 굳어진 내 습관을 고쳐주고 계셨다. 면접위원들에게 내가 일반인만큼이나 자연스럽고 활발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말이다.


(최유림, 『최유림이 사는 세상』, 둥지, 2008년, 13~16쪽)



목소리만으로 21개 반 아이들 거의 다 알아


최유림은 하루에 3시간만 자며, 그렇게 혹독하게 준비하고도 2006년 임용시험에 떨어졌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았다. 목표를 정하면 결코 포기하지 않는 집요함과 특유의 낙천적 성격이 버무려진 결과다. 2007년 정식 교사가 됐다. 지난해에는 1학년과 2학년 21개 반에서 영어를 가르쳤다. 한 주 한 시간씩인 ‘교과재량활동’시간에 영어 말하기 등을 가르친 것이다.


아이들도 많이 사귀었다. 복도나 길에서 쪼르르 달려와 인사한다.


“최유림 선생님, 안녕히 가세요. 전 2학년 1반 수미고요.” “전 1학년 10반 신애예요.”


앞을 못 보는 선생님을 배려해 자신을 알리는 인사법이다. 하지만 이젠 이름을 말하지 않아도 누군지 알 수 있다. “새앰, 안녕하세요?” “안녕, 소희야!” “어머, 선생님! 전줄 어떻게 아셨어요?”


다른 선생님들은 아이들의 이름과 얼굴을 맞추지만, 최유림 선생은 목소리와 이름을 맞춘다. 다 살아가는 방법이 있는 것이다. 그는 “지난해 1, 2학년을 가르친 탓에 지금 2, 3 학년생은 거의 다 안다”고 자랑스레 말했다.


그에게 물었다. “교사 노릇 하기 전과 1년 정도 해본 뒤 느낌이 어떻게 다른가?”


그는 이렇게 답했다. “교사하기 전에 워낙 오래 고민했다. 교사들의 조언도 많이 받았다. 늘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해보니 하기 전과 느낌은 크게 다르지 않다.” ‘최악의 상황’이라…. 그의 말이다. “내가 눈이 보이지 않는다고 학생들의 수업 태도가 엉망이 되고, 학부모들이 막 항의하면 어쩌나 걱정했다. 하지만 아직까지 그런 일은 없었다.”



끼리끼리가 아니라 어울려 살기 위하여


좀 짓궂은 질문을 던졌다. “특수학교도 있는데, 왜 굳이 일반학교 교사를 하려고 했나?”


그의 대답이다. “맹학교에서도 영어를 가르칠 수 있겠지만, 현실적으로 쉽진 않다. 맹학교 고등부에서는 이료과목이라고, 안마, 침술, 해부학, 생리학, 한방 등을 배우는 수업 시간이 절반이 넘는다. 교사 가운데 시각장애인이 절반 정도 되고. 대학에서 국어나 영어 전공을 했더라도 맹학교에선 이료과목을 맡게 되는 경우가 많다. 시각장애 교사는 어려서부터 배워서 익숙하지만, 일반 교사는 이료과목을 가르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난 학생 때부터 이료과목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내가 이료과목을 잘 가르칠 수 있을까’ 고민했다. 꿈을 너무 크게 꾸면 안 된다는 건 어려서부터 경험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꿈이 있으니 도전해보자 마음먹었다. 실패해도 후회하지 않기로 했다. 그래서 임용시험 준비에 나섰다. 솔직히 좀 더 많은 학생들과 만나고 싶었다. 영어로 대화하고 학식을 나누고 싶었다.”


그는 담담하게 자신의 경험과 소망에 대해 얘기했지만, 그 답변의 울림은 깊고 넓다. 그는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따로 살게 하는 것보다, ‘서로 다른 개성을 지닌 이들’이 ‘섞여 사는 게 좋다’는 얘기를 하고 있는 중이다.



‘나도 프로야구와 다큐멘터리를 본다. 방법이 다를 뿐’


그는 늘 ‘눈이 안 보인다’는 사실이 ‘거대한 장벽’이 돼 그를 가로막지 못하도록 애써왔다. 그는 아버지의 고향을 연고지로 한 프로야구 롯데 팬이고 가끔 야구장에도 간다. 소리로 관람한다. 요즘은 인터넷에서 관련 기사를 챙겨보며 나름 안목을 높이기도 한다. 그는 다큐멘터리 보기도 좋아한다. 히말라야를 눈으로 볼 순 없지만, 탐험대의 헉헉거리는 숨소리로 ‘보는’ 것이다. 단지 다른 사람들과 보는 방법이 다를 뿐이다. 그는 책에 이렇게 써놓았다.




어떤 사람들은 나에게 묻는다.


“앞이 안 보이는데 찻길 건널 때 어떻게 건너세요?”


“귀에 온 신경을 집중하면 자동차가 어디 있는지 알 수 있어요.”


그래도 그는 고개를 갸우뚱한다.


“그래도 힘들 것 같은데….”


단 하루만이라도 눈을 감고 생활해보면 알 것이다. 세상의 소리가 우리에게 알려주는 정보가 얼마나 풍부하고 성실한지를.


(『최유림이 사는 세상』, 108~109쪽)



살다 보면 누구나 도와주고 도움 받고


교사가 되는 마지막 관문이었던 지난해 충남교육청의 최종 심의위원회 때 오간 문답을 전하는 것으로 글을 맺는다.



심의위원 한 분이 질문을 하셨다.


“시각장애인으로서 교사직을 수행하려면 어려운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닐 텐데, 어떻게 대처하실 생각입니까?”


“앞이 안 보이니까 교사 생활에 이런저런 어려움이 따르겠지요. 하지만 장애가 없다고 해서 어려움이 없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일반인들 역시 저와는 또 다른 종류의 어려움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서로 돕고 사는 것 아니겠습니까? 어차피 혼자서는 못 사는 세상이니까요. 제가 가진 장애 때문에 다른 사람의 도움을 많이 받아야겠지요. 하지만 저도 저만이 가진 방법으로 다른 분들을 얼마든지 도울 수 있습니다. 장애인들만 도움이 필요한 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살다 보면 누구나 도와주고 도움 받고 그러면서 사는 거니까요.”


(『최유림이 사는 세상』, 34~35쪽)




최유림은 1983년 11월 서울 외곽의 슈퍼마켓 집 외동아들로 태어났다. ‘선천성 시신경위축망막증’. 그래도 어려선 어렴풋한 윤곽은 알아볼 수 있었다. 가게 앞 놀이터에서 동네 아이들과 그네도 타고, 미끄럼도 타고, 공놀이도 하고, 눈썰매도 타고, 자전거도 타고 놀았다. 유치원부터 고등학교까지 서울맹학교를 나왔다. 2002년 공주대학교 특수교육과에 들어갔다. 영어를 복수전공하며 영어교사의 꿈을 키웠다. 한 번의 낙방을 거쳐 2007년 1월 시각장애인으론 한국에선 처음으로 충청남도 일반과목 임용시험 영어과에 최종 합격해 천안 두정중학교에서 이태째 영어 교사 노릇을 하고 있다. 올 초 출판사의 권유로 『최유림이 사는 세상』이라는 책을 펴냈다. 학교 일과가 끝나면 집에 가는 길에 헬스장에서 체력을 키우고, 주말엔 왕십리에서 골프를 배우며 지내고 있다. 여자친구는 없다. 그는 “적극적으로 재미있게 살다보면 언젠가 생기지 않겠냐.”며 빙그레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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