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8년 12월 2008-12-04   1613

참여마당_인터뷰: 공익의 호루라기




공익의 호루라기


현준희 회원


이경휴 참여연대 회원 mairim@hanmail.net

천 명이 술에 취해 떠드는 속에      千夫裏
단정한 선비 하나 의젓하게 있고 보면 端然一士莊
그들 천 명이 모두 손가락질하며 千夫萬手指
그 한 선비를 미쳤다고 한다네 謂此一夫狂
(다산 정약용의 ‘우래(憂來)’ 12장 중에서)


늦가을의 바람이 단숨에 겨울을 몰고 왔다. 은행나무에 달린 이파리를 가을금관으로 예찬하며 내내 올려다보았는데 하룻밤 사이 모두가 나목이 되어버렸다. 굳이 불가의 제행무상(諸行無常)의 경구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절로 사색가가 되는 계절이다.

자연이 주는 최상의 은총을 누리며 이 땅에 살고 있지만 그 은혜를 역행하며 사는 사람들이 많은 나라이기도 하다. 반칙으로 스타트라인에 선 사람들에게 갖은 특혜와 혜택으로 보답하는 정권도 있었다. 물론 그들만의 ‘은밀한 리그’가 있었기에 가능했고, 지금도 그들만의 리그는 현재진행형이리라.

그 ‘은밀한 리그’를 공개해 치탈도첩(   奪度牒, 종단에서 강제로 추방시킴)을 당한 사람들이 있다. 내부고발자라는 살벌한(?) 지칭보다는 공익제보자라는 민주적인 명칭이 자리 잡기까지 험난한 길을 걸어왔던 이들이다.

현준희(55세) 회원. 그를 만나러 간 날은 12년간의 법정 투쟁이 무죄로 판결난 날이었다. 종로구 계동에 있는 그의 집(게스트하우스)에는 한 방송사의 인터뷰와 ‘공익제보자 모임’ 회원, 축하객으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대법원 무죄확정 판결 축하드립니다’(전국민주공무원노동조합), ‘양심의 승리를 축하드립니다’(공익제보자모임)……. 툇마루 끝에 줄을 서 있는 화분들을 보면서 ‘공공의 적’보다는 ‘공익의 편’이 더 많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그는 우리를 반갑게 맞았지만 지치고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기미를 알아챈 2살 삽살개 순둥이가 온갖 애교와 재롱으로 그를 환하게 만들었다. 덩달아 6살 주몽이까지 합세하여 고즈넉한 한옥마당은 순간 ‘개판’이 되어버렸다. 모두가 하나 된 지상의 천국이었다.


판사는 판결로 말한다?

1996년 효산그룹 비리 감사 중단에 의혹을 폭로했다. 이로 인해 문민정부의 도덕성에 치명타를 날렸고 그는 하루아침에 감사원이라는 안정적(?)인 직장에서 쫓겨났다. 그로부터 12년간 긴 투쟁 끝에 오늘이 찾아왔다. 한 시절 단정하고 의젓했던 용모도 세월은 비껴갈 수 없었던가보다. 귀밑머리엔 희끗희끗 서리가 내리고 생계를 꾸려온 양손엔 굳은살이 박혀 있었다. 편안한 이웃집 아저씨로 변한 인상이지만 눈빛만은 여전히 형형했다.

소회를 여쭙자, 피곤하고 허망하다는 말로 지그시 눈을 감으며 독백처럼 되뇌었다.

“결국 피해자는 나밖에 없다. 누구 하나 책임지는 사람 없고 사과하는 사람 없고……. 판사는 판결로서 말한다? 말은 근사하지 그 뒤에 자신은 숨어버리고…….”

강산이 변하고도 남을 시간 동안 그가 겪었을 고초를 얼마만큼이나 짐작 할 수 있을까. 간간히 방영되었던 TV 화면 속의 곤궁했던 생활상은 단지 측은지심의 여론만 상기시켰을 뿐, 거대한 국가권력이라는 바위산을 넘을 수는 없었다. 1·2심 무죄, 2002년 대법원에서 유죄(이규홍 대법관)취지로 파기환송, 파기환송심에서 다시 승소. 사건일지는 이렇게 간략하게 간추릴 수 있지만 녹록지 않았던 12년의 세월이었다.

참여연대에 고액을 후원하고 평생회원이 된 연유가 궁금했다. 고액후원, 평생회원 모두가 쑥스럽다며 소년처럼 웃었다.

“참여연대 참 좋은 단체죠. 늘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요. 공무원은 세금으로 월급을 받지만 참여연대 사람들은 돈 한 푼 받지 않고 일당백의 역할을 하니 대단한 거죠. 제가 좀 게으르고 어디 소속되는 걸 싫어해서 참여연대에도 한 발 물러서 있지만 인연은 1996년 참여연대 용산시절부터입니다. 그간 빚진 마음도 있고 해서 고액이 아닌 약간의 정성을 낸 거죠.”

그의 생애 전환점이 되었던 1996년 4월, 민변(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사무실에서  양심선언을 했다. 효산그룹이 남양주에 콘도를 짓으려고 권력의 실세들과 결탁하여 불법으로 건축허가를 내주고 거액을 챙겼다. 이에 대한 감사가 시작되었으나 상부의 지시로 감사가 중단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이로 인해 그는 바로 명예훼손과 파면이라는 격랑을 타게 된다. 이를 헤쳐나가기 위해 민변과 참여연대가 연대를 하고, 민변은 소송에 대한 모든 일을 책임지고 참여연대는 소송 이외의 언론플레이 및 기타 등등을 맡기로 역할을 분담했다. 그 때가 참여연대 용산시절이었고 이태호 전 협동처장과 공익제보지원단의 김창준 변호사가 지원하여 오늘까지 오게 된 것이다.

하지만 무죄 판결로 사건이 종결된 것은 아니다. 자신의 파면을 인정한 법원 판결에 복직소송을 신청할 계획이라 한다. 또 큼직한 바윗덩어리 하나 지고 나갈 세월이 얼마나 걸릴지 막막하다며 긴 숨을 내쉬었다.

“양심선언? 저는 양심(良心)이 아니고 양심(兩心)이라 생각해요. 용기 있는 선언을 하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망설임이 마음속에서 갈등하지는 상상이 됩니까? 때로는 후회도 했습니다. 그런데 대법원의 판결을 보고는 처참했습니다. 이 나라를 떠나고 싶었습니다. 이 나라가 너무나 싫었어요. 대법원 판결은 천형(天刑)입니다. 고개를 들고 다닐 수가 없었습니다.”

절절한 심사를 한센병 환자였던 한하운 시인의 <나의 슬픈 반생기>로 인용했다. 천형이라는 문둥병으로 나가 놀 수 없었던 어린 시인은 다락방에서 연을 날리며 그것을 통해 세상 이야기를 들었다는 글을 읽고 다소 진정되었고, 때로는 ‘산촌에 눈이 쌓인 어느 날 밤에 촛불을 밝혀두고 홀로 울리라’라는 <이별의 노래>(박목월 시, 김성태 곡)를 부르며 울분을 삭혔다고 한다.

이 천형과도 같았던 개인의 비극을 한 신문은 간략하게 핵심 정리를 했다- 현 씨의 ‘10여 년 투쟁’은 국가기관이 내부의 잘못을 바로 잡고자 용기를 낸 개인에게 얼마나 무참한 보복을 가할 수 있는지 보여준 상징이라고.


세상은 여전히 신을 신고 발바닥 긁는 격

그로부터 12년, 세상은 얼마나 변했으며 공익제보자에 대한 사회적인 시각은 어떠한지 질문을 드렸다.

“한마디로 격화소양(隔靴搔痒)이죠. 신을 신고 발바닥을 긁는 격이니 어디 세상살이가 시원하게 뚫리는 데가 있겠어요? 2002년엔 부패방지법도 제정되고 시대의 흐름도 도도하여 뭔가 빠른 속도로 변화가 올 줄 알았죠. 재판도 이렇게 오래 갈 줄 몰랐죠. 못된 상놈이 항렬만 높다고 우리 사회의 권력기관은 아직 바꿔야 할 게 너무 많아요. 감사원, 대법원, 검찰…항렬로 치면 최고의 기관이지만 구린 구석이 너무 많죠. 그들이 자신의 잘못을 드러내고 반성하지 않는 한 세상은 여전히 신을 신고 발바닥 긁는 수준이죠. 위에서부터 변화가 아랫물을 맑게 하는 법 아닙니까?”

더불어 언론의 역할을 강조하며 공익제보자에 대하여 말을 이었다.

“언론이 시류를 좇아 보도하는 건 당연하지만 사건을 꾸준하게 보도했으면 해요. 안목을 넓게 가지고 사건을 접근해야 합니다. 내가 구차하게 친구 사무실에서 자고 물건 팔러 다니는 모습만 찍지 말고, 국가권력이 어떻게 나를 짓밟았는지를 낱낱이 파헤치는 보도를 해야 합니다. 동정심을 유발하는 장면만 집중적으로 찍으니 공익제보자들이 양심(兩心)으로 갈등하는 것 아니겠어요? 정곡을 찔러주는 역할이 언론의 책무라 생각합니다.”

공익제보자는 조직의 배신자가 아니라 공익의 호루라기이다. 그러나 이들을 보호하기 위한 안전망은 성글기 그지없다. 부패방지법에 내부고발자 보호규정이 일부 포함되어 있을 뿐이다. ‘공익침해행위 신고자 보호제도’ 도입이 시급하다는 목소리들이 이 때문에 더 높다.

법이란 기껏해야 지배층의 이익과 안전을 꾀하는 수단이다. 특히 우리사회에서 법질서나 법과 원칙은 힘 있는 자, 돈 가진 자, 연줄 닿는 자들이 제멋대로 살기 위한 방편의 성격이 짙다는 냉소적인 글귀가 문득 떠오름은 공익제보자들의 신산한 삶 때문일까.

여기저기서 걸려오는 축하전화로 자리를 접어야 할 지경이었다. 마음이 조급하여 마지막 질문을 줄줄이 엮었다. 당장 하고 싶은 일과 2008년의 의미, 참여연대에 대한 애정 어린 비판을 부탁했다.

“대법원 앞에서 피켓시위를 하고 싶어요. 어째서 그런 ‘또라이 판결’을 내렸는지, 이런 판사는 소비자불매운동을 하듯 철저한 응징을 해야 합니다.”

같이 두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질곡의 세월이 단숨에 달려오는 듯했다.

“벌써 한 해가 가고 있네요. 촛불집회를 생각하면 올해는 가슴이 벅찹니다. 얼마나 신명나는 마당이었어요. 세상 어느 나라에 이런 민주적이고 건강한 집회가 있을까요? 저는 순둥이와 꽹과리를 가지고 거의 매일 출근했죠. 비록 공권력 앞에서 힘을 잃었지만 또다시 그 힘은 재가동될 거예요. 애정 어린 비판이라…잘 하고 있잖아요. 큰 조직이 아직껏 잡음 하나 없이 잘 꾸려나가는데 무슨 비판이 필요하겠어요. 더 잘 하려고도 하지 말고 지금처럼만 하면 세상은 바뀔 것 같아요.”

참여연대에 용기와 희망을 주는 멘트였다. 평생회원답게 느긋하게 한 길을 가는 도반이다. 천 명을 감당하는 한 사람의 선비가 바로 그가 아닐까.


정부지원금 0%, 회원의 회비로 운영됩니다

참여연대 후원/회원가입


참여연대 NOW

실시간 활동 SNS

텔레그램 채널에 가장 빠르게 게시되고,

더 많은 채널로 소통합니다. 지금 팔로우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