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8년 12월 2009-12-01   1531

칼럼_세밑에 띄우는 작은 희망


세밑에 띄우는  작은 희망

박영선 『참여사회』 편집위원장

어느 날 가족들과 늦저녁을 먹는데 행복감이 물밀려들었습니다. 제대로 차린 밥상도 아니었는데 말이지요.
포만감 때문이라구요?^^ (김 선생은 저를 너무 잘 아신다니까요. ㅎ) 하지만 우리 꼬마가 보는 책에도
“행복이란, 온 가족이 함께 모여 저녁밥을 먹을 때. 저녁밥을 먹으며 즐겁게 얘기할 때”라고 쓰여 있는 걸 보니,
식구들과 함께 밥을 먹을 때 행복감을 느끼는 사람이 저 만은 아닌 듯합니다. 

그런데 김 선생, 상을 무르자마자 불안감이 몰려오데요. 김 선생이 짐작하다시피 불안의 실체는
내가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하는 것이었겠지요. 얼마 전 서경식 선생이 <한겨레>에 쓴 글을 읽어보셨나요?
‘가스 스토브가 타오르는 산장 거실에 앉아 따끈한 음료를 마시는’ 일상과 ‘위험으로 그득 찬 진실’이 있는
바깥세상과 대비를 하며 현재 느끼는 안온감과 평화로움이 흡사 ‘거짓말’같다고 토로했던 칼럼 말이에요.
기실 우리를 둘러 싼 세상은 행복과 참 거리가 멀지요. 그렇기에 밥을 먹거나 책을 읽는 소소한 일상 속에서
행복감을 느낄 수 있다는 게 때로는 가짜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기 마련이지요.
저처럼 평범한 이들이 모두 러셀처럼
‘인류의 고통에 대한 참기 힘든 연민’을 가진 것도 아닌데,
가족이나 가까운 이웃들과 나누는 일상의 작은 행복과 평화를
의심하게 하는 세상이 야속하기만 합니다.

하지만 어찌 보면 그 ‘의심’이 더 많은 이들의 행복, 더 큰 행복을 짓는
잔잔한 힘이 되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올해도 의심이 불안으로 끝나지 않고, 
타인을 향한 관심과 공동체에 대한 기여로 승화되어 세상을 밝히는 큰 희망의 역할을 해냈습니다.
유난히 큰 사람의 죽음이 많았던 올해 장례식장에 모였던 눈물이나
비록 도지사를 바꾸지는 못했지만 주민소환투표를 이끌어 낸 제주도민들의 투지,
재심 청구 끝에 마침내 억울한 누명을 벗은 일명 진도가족간첩단 사람들의 기쁨, 전쟁과도 같았던
용산이나 평택의 농성장에서조차 피어오르던 정겨움…….
이 모든 것이 개인의 행복이 온전하지 못하다는 의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요.  
 
한 해를 돌이켜보니, 우리가 참 인내하기 어려운 시간을 보내고 있단 생각이 문득 드네요.
그래서 옆에 있는 사람 누구에게라도 무람없이 한 해 동안 고생 많았다고
따스한 말 한마디를 건네고 싶은 심정입니다. 하루하루 삶을 영위해갈 수 있었던 작은 희망의 불꽃은
뭐니 뭐니 해도 다른 이들을 향해 열려 있는 사람의 마음에서 비롯되었을 테니까요. 

‘매듭달’입니다. 어렸을 적 엄마는 한 해가 가기 전 묵은 일을 해치우느라 분주했습니다.
당시 넉넉지 않은 살림에 가게마다 깔아두었을 외상 빚을 청산하는 일이 큰일이었겠지요.
하지만 평소 원망이나 감정이 쌓였던 이들과 화해를 하는 것도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점에 엄마의 마음을
급하게 하는 일 중 하나였습니다. 제 기억으론 화평을 청하는 엄마의 마음이 항시 흔쾌하진 않았던 거 같았어요.
상대가 누군지 가늠도 못하는 저를 앞에 두고 거의 한풀이에 가까운 지청구를 퍼붓곤 했으니까요.
어린 마음에도 상대에게 저리 악감정이 쌓였는데, 과연 그 상대가 엄마의 마음을 진지하게 받아줄까
의문이 들 정도였지요. 그래서 어느 날은 직접 묻기도 했지요. “좋으나 싫으나 같이 살 사람들인데,
계속 찝찝하게 얼굴 돌리고 살 수 있냐. 이렇게라도 맘을 풀어야지”라고 답하던 엄마의 표정이
아직도 기억납니다. 제 눈에는 몹시 인위적이고 허위적이기까지 한 행위였지만,
묘하게도 그런 일종의 화해 의식이 한 판 끝나고 나면 대충 다시 관계가 복구되는 듯 했습니다.
사람의 어딘가에 각인되어 있을 상처와 분노, 배신감까지 모두 걷어낼 순 없겠지만, 그래도 그 모든 것을 딛고
새로 출발할 수 있는 관계를 만드는 데는 매우 적절한 연례행사였던 것이지요.

2009년이 가기 전 김 선생이 매듭을 져야 할 일이 무엇인지요? 저는 용산 참사 유가족들의 참담함만큼은
올해가 가기 전에 꼭 털어버려야 하는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적어도 유가족이나 그 고통에 참여했던
변호인단을 비롯한 많은 분들에게 켜켜이 쌓여 있을 커다란 분노나 원망까지 어찌할 순 없겠지만,
최소한 사람이 할 도리만큼은 해서 새해 새 출발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요.

참, 이번 편지가 김 선생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에요. 언제나 삼가려 애쓰곤 했지만 종내에는
결국 한탄으로 끝나고 마는 제 편지가 많이 힘겨우셨죠. 죄송하고도 감사해요.
저에게는 김 선생이 아주 든든한 백(?)이었습니다. 부디 다가 올 새해에는 서로 한 해를 잘 버텼다는
소극적 위안보다는 우리 참 잘 살았다는 자긍심에 가득 찬 인사를 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연암집』에 나오는 한 구절로 제 마지막 편지를 맺겠습니다. 

“그대는 나날이 나아가오. 나도 나날이 나아가겠소. (박지원, 『연암집』 제5권 與敬甫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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