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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년 11월
  • 2008.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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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개혁의 한계와 새로운 상상력

이수광 이우학교 교감 leesk31@hanmail.net


교육개혁의 역사는 오래되었다. 개혁 국면이 아닌 적이 없다. 교육부문에 ‘손보기’를 하지 않은 정권은 없다. 이는 그만큼 교육문제가 심각하다는 반증일 것이다. 그런데 당대 교육질서(educational order)는 이전보다 훨씬 더 왜곡되었고 불평등하다. 그 정도는 꼭 ‘손본 만큼’ 심각하다. 한편에서는 ‘더 이상 손볼 수 없을 지경’이라는 자조도 있다. 이는 그 흔한 ‘애도의 수사학’이 아니라 실제가 그렇다. 이런 점에서 그간의 교육개혁은 과잉기획이자 배반의 기획이다.

학교의 위기는 교육주체들의 관계 위기

학교의 실제 모습을 보자. 현재의 학교는 참 ‘건조’하다. 학교의 주된 관심은 상급학교 진학과 관련된 기술·기능적 문제에 집중한다. 학교 주체 간의 관계 또한 텍스트를 매개로 한 ‘기능적 관계’로만 고착되는 경향이 뚜렷하다. 학교운영의 문법체계는 이 양자를 더욱 강화시킨다. 예컨대 입시철마다 상급학교 진학 실적을 광고하는 게시물이 학교 정문에 걸리고, 사람들은 이런 풍경을 ‘자연스럽게’받아들인다. 이런 조건에서는 일상의 언어조차도 특정어휘만을 반복할 가능성이 높다. 즉 ‘성적’ ‘시험’ ‘점수’ ‘진학’ 등의 언어가 넘쳐나는 반면 ‘교육의 언어’라 할 만한 ‘성장’ ‘배움’ ‘실존’ ‘성찰’ ‘자기발견’ 등의 언어는 실종된다. ‘시장의 말’(시장가치)이 ‘교육의 말’을 대체하는 것이다. 이런 현실에서 교육주체들의 삶이 온전할 리 없다.

학교는 학생들에게 ‘배움의 공간’이자 ‘삶의 공간’이어야 한다. 세상의 ‘현재’와 ‘미래’를 상상하고, 현상의 근본 원리를 되묻고, 각각의 지식을 연결하고 종합하면서 ‘배움의 즐거움’을 경험하는 곳이어야 한다. 그래야 평범함에서 심오함을 발견하고 진부한 것에서 아름다움을 찾아낼 수 있는 안목이 형성된다.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자신의 성장 동기를 찾게 되는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학교에서 깊이 있는 배움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학생들의 삶과 그들의 생각을 텍스트적 지식과 연결하는 ‘차원을 넘나드는 사고 훈련’이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학교에서는 관계에 대한 훈련 또한 간단치 않다. 세상을 알아간다는 것은 타자의 존재형식과 그들의 처지와 감정을 익히는 일이기도 하다. 인간사의 모든 사상(事象)이 바로 관계형식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학교가 이것을 감당하기에는 너무 ‘빈약하다’. 학생들에게는 대상에 대한 관계를 고민할 여유도 없거니와 이를 자극할 학교의 콘텐츠도 빈약하기 이를 데 없다.

상황이 이럴진대, 학생들의 일상은 정해진 텍스트를 중심으로 조직된다. 진학차원으로  학습동기가 단순화되고, 반복해서 시험과 관련된 것들만을 공부한다. 가히 초현실적이라 할 만큼 ‘학습노동’에 매진한다. 그러나 그 결과는 심히 퇴행적이다.

(우리 교육)은 두 가지 치명적 특성을 가진 정신습관을 길러놓는다. 지적무기력성과 호기심 상실이 그 특성이다. 지적 무기력성 상태는 암기력이나 수리계산력의 부족과는 다르다. 지능지수와도 별 관계없다. 암기도 잘하고 수리능력도 있고 집중력도 있다. 그런데 질문하고 생각하고, 생각한 것을 비판적, 논리적, 분석적으로 점검하는 일에 이르면 정신은 절인 배추와도 같은 무기력 상태에 빠진다. 생래적 저능이 아니기 때문에 이 무기력성은 수동적 반응만이 강하게 요구되는 환경에 오래 노출되고 거기 적응하면서 ‘길러진’ 정신습관이다. 호기심 상실의 경우도 선천적 저능이 아닌 경우에는 지능과도 큰 관계가 없다. 지적 자극에 대한 반응 능력의 둔화, 뭔가 알고 싶다는 적극적 자발적인 탐구욕의 결여, 무관심, 집중력 부족 등이 호기심을 잃어버린 정신의 특징이다.1)

그렇다고 학생들이 공부하는 이유(꿈)가 ‘건강한’ 것만도 아니다. 많은 학생들이 특정한 삶의 형식(출세·성공의 삶)을 꿈꾼다. 아마도 기성세대가 추구하는 ‘경제적 성공’이라는 시대규범이 조건화된 탓일 게다. 문제는 이러한 조건에서는 다수 학생의 실패가 자명하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학생들의 생태환경 그 자체가 바로 반인권적이자 자기패배적인 셈이다. 수많은 개혁조치가 있었는데도 학생들의 삶의 조건이 왜 이토록 어긋난 것일까? 모든 교육개혁의 출발점과 종착점은 ‘학생’이다. 그들의 성장을 위해 개혁하는 것이고, 개혁의 결과로 그들이 행복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결과는 정반대가 아닌가?

교사들의 삶이라고 다를 바가 없다. 교사들의 학교 삶의 이미지는 ‘노곤하다’라는 한마디로 축약된다. 교사의 성장판이라 할 수 있는 ‘자부심’은 이전만 못하고, 실천의지 또한 ‘의례적’ 수준이다. 교사는 스스로 자신의 교육활동에 대해 긍지를 갖는 조건에서 전문성도 향상되고 열정도 쏟게 마련이다. 교사로서의 자부심이 바로 상상력의 원천인 것이다. 그런데 현재는 이런 조건이 취약하다. 그러다보니 교사집단 내에서는 ‘건조한 행위규범’이 점차 강화된다. 즉 ‘주어진 수업만 무리 없이 하기’ 혹은 ‘무난하게 학교생활하기’, ‘남의 일에 간섭하지 않기’, ‘남하는 만큼만 하기’ 등의 규범이 심화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교사들은 자기 존재를 매우 제한적으로 규정하게 된다. 예컨대 “국가로부터 주문받는 교육과정 목표에 학생이 일치하도록 조형하는 과학적 기술과 방법을 지닌 존재”로 규정하고, 그러한 역할만을 자기 책임범주로 설정하게 된다. 실제 학교사회에서 이러한 경향은 쉽게 확인된다. 문제는 교사들의 이러한 ‘형식적·방어적 태세’가 교육개혁 국면에서 추진됐던 교원정책과 무관치 않다는 점이다. 그간 교육개혁 과정에서 교사는 실천의 주체로 인식되기보다는 대상화된 측면이 강하다. 즉 교사집단은 ‘고루한 집단’, ‘변화를 거부하는 집단’, ‘부도덕한 집단’ 등으로 인식되고 개혁의 대상으로 지목되어왔다. 이러한 정조(情調)가 사회일반에까지 확산되면서 교원집단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과잉 유포되었고, 교사들은 이에 대한 정서적 반작용으로 오히려 ‘형식적·방어적 태세’를 취하는 것이다. 교사들은 여전히 교육개혁에 냉소적이다. 이는 그들이 개혁과정에서 참여가 배제되고 도리어 개혁의 대상으로 지목되었던 ‘소외의 경험’과 무관치 않다.

학생과 학부모의 삶이 왜곡된 조건에서는 학부모의 고달픔도 심각해질 수밖에 없다. 학부모들에게 학교는 여전히 ‘거대한 곳’(배움과 배려가 불가능한 익명의 장소), ‘운으로 좋은 교사를 만나는 곳’(좋은 교사를 만나기가 어려운 곳), ‘경쟁하는 곳’(긴박한 전쟁터), ‘닫힌 곳’(학교·교사의 편의를 중심으로 운영되는 학교)2)으로 인식된다. 따라서 학교에 대한 기대보다는 자구책 찾기에 골몰하게 된다. ‘조기에 경쟁의 토대를 만들자’ ‘남보다 하나 더 하자’ ‘지속적으로 투자하자’ ‘새로운 기술을 선점하자’ ‘경쟁의 집적지에서 놀자’ 등과 같은 학부모의 문화주제는 이러한 맥락에서 형성되는 것이다.

요컨대 현재 학교는 위기이다. 핵심은 교육주체 간 관계의 위기이다. 학생들의 성장 문제를 중심으로 상호 소통하기보다는 각자가 ‘따로 논다’. 육친적 끈끈함은 말할 것도 없고 ‘대화’도 사라지고 있다. 이러한 건조한 관계 속에서 ‘보복기획’3)의 날카로움은 도를 더해간다. 결과적으로 지금까지의 교육개혁 과정에서 이런 변태(變態)가 등장한 것이다. 의도가 어떠했든 결과는 그렇다.





소통 부족, 죄책감 자극, 현실 무시로 외면 자초   

정부가 그 어떤 교육개혁안을 발표한들 교육주체들로부터 환영받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개혁조치들이 학교현장을 더욱 꼬이게 만들었던 역사적 경험으로 인해 교육주체들의 정서적 반작용은 이전보다 더욱 심화될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학생들은 ‘짜증내고’, 교사들은 ‘심드렁하고’, 학부모들은 ‘불안해’할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개혁피로증후군’은 근본적으로 정부의 기획 및 실행과정에서의 실패와 관련이 있다. 이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선 정부 스스로 교육정책에 대한 불순응의 빌미를 제공한 점이 있다. 예컨대 교육개혁안은 그 자체로 관련자들의 이해가 상충되게 마련이다. 따라서 정부에서는 각 관련자들과 소통하고, 그 과정에서 제출된 각각의 의견을 섬세하게 해석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기본적으로 소통하는 과정 자체는 사회적 합의의 도출과정이자 학습의 기회가 된다. 이런 점에서도 정부는 개혁안과 관련하여 관련자들과의 의사소통에 적극적이었어야 했다. 그런데 그간 개혁안을 입안하고 추진하는 과정에서 각 정책대상 집단과의 소통은 형식적이거나 의례적인 경우가 많았다. 일례로 현 정부에서는 ‘4·15 학교자율화조치’를 발표하면서, 토론회나 공청회 과정을 생략했다. 국민과 교육계의 참여 및 학습기회를 제공한다는 차원에서도 소통의 기회가 필요하지 않았겠는가? 문제는 이런 경우가 일회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또 다른 문제는 개혁안 추진과정에서 정부가 보여준 태도의 문제이다. 즉 정책대상 집단에 대해 ‘혐오감’을 자극하는 방식으로 진행된 사례들이 적지 않았다. 교원정년 단축 과정에서 교원을 ‘무능집단’으로 몰아갔던 사례, 사교육비 경감 대책을 추진하면서 학부모를 ‘계몽의 대상’으로 상정했던 사례 등이 이에 해당된다. 이렇게 ‘죄책감’을 자극하는 환경에서 정책목표 달성은 가능하지가 않다. 정책대상 집단의 심리적 이반이 심화되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와는 별개로 가용 자원이 부족하여 나타나는 불순응의 사례도 있다. 대개의 개혁안은 이상적인 학교태를 상정한다. 그러나 현실에서 이상적인 상태로 전환되기 위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자원이 투입되어야 한다. 즉 현실태와 이상태를 매개하는 조건충족의 여지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조건이 충족되지 않을 경우, 대개는 ‘흉내 내기’에 그칠 가능성이 있다. 일례로 제7차 교육과정 도입과 함께 추진되었던 수행평가 제도가 대표적인 경우다. 교사 1인당 담당 학생 수가 많은 조건에서 포트폴리오나 코스워크(course work) 중심으로 평가체제를 전환하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보니 강의와 참여는 분리되고, 수행평가는 또 다른 ‘숙제’로 부과되고 있는 실정이다. 국가차원의 근사한 기획이 학교 현장에서 변형된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런 과정이 반복되는 상황에서는 어떤 화려한 개혁안이라 하더라도 ‘외면의 대상’이 되기 십상이다. 교원들이 교육개혁에 대해 무신경하거나 외면하는 태도를 보이는 것은 이러한 과거 경험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빈곤한 상상력도 개혁피로증 원인

특히 개혁피로증의 원인 중 하나는 정부의 빈곤한 현실인식이다. 대개 교육개혁안의 주된 방향은 학생들에게 ‘좋은 것 많이 제공하기’에 맞추어져 있다(물량투입중심적 접근). 따라서 ‘EBS 방송과외’, ‘방과후 학교’, ‘휴무 토요일 영어프로그램’, ‘대학생 멘토링제’ 등을 강권한다. 이런 프로그램들이 지속적인 효과가 있을지 장담할 수도 없지만, 문제는 학생들이 ‘학습지옥’에 빠질 위험이 있다는 점이다. ‘학습프로그램을 제공하면 학생들의 학습생성력이 높아진다’는 판단은 지나치게 기계적 해석이다. 이런 조건 속에서 외치는 ‘경쟁력 담론’은 ‘장식적 허언’에 불과하다. 학생들의 경쟁력은 ‘포토그래픽 메모리’가 아니라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성찰하는 힘이자 차원을 달리하는 생각의 힘이기 때문이다. 이런 경쟁력의 요소는 상호 교학상장(敎學相長)하는 환경 속에서 자연스럽게 길러지는 것이다. 그렇지만 교육개혁안에는 이런 종류의 고민이 별반 없었다. 상상력이 빈곤하다.

학부모 입장에서 교육개혁을 냉소할 만한 근거도 충분하다. 그 중에 하나가 대학입시제도 변경이다. 그간 미세한 변경까지를 합치면, 대학입시는 매해 바뀌었다. 이런 과정에서 학부모들의 ‘위기인성’은 더욱 증폭되고, 그들은 자녀교육 지원행동을 위기모드로 전환한 것이다. 즉 학부모 입장에서는 입시제도의 변경을 위기상황으로 인식하고, 그런 상황에서도 성공할 수 있는 갖가지 묘수를 생각하는 것이다. 예컨대 고액과외, 학원 많이 다니기, 학습지 많이 하기, 유명학원 다니기, 선행학습 많이 하기, 조기유학 후 특목고 진학하기 등등이 위기모드의 양식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학부모들은 정부의 개혁안이 발표되는 경우, ‘위기인성’→‘위기모드’→‘상승작용’→‘위기인성 강화’의 악순환이 구조화될 것으로 판단한다. 개혁안에 대한 적합성 여부를 따져보기도 전에 야유에 가까운 반응을 보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교육주체가 대등하게 참여하는 협치를 단위학교에서

교육개혁의 출발점과 종착점은 ‘학생’이어야 한다. 학생들의 삶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교육정책의 최상위 목표가 되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교육개혁의 실천장은 바로 단위학교가 된다. 그렇다면 단위학교를 어떤 틀로, 어떻게 전환해야 하고, 이 과정에서 정부는 어떤 일들을 해야 하는가? 이에 대한 사고실험을 해보자.  

일차적으로 ‘학교’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에 부합하는 학교상을 명확하게 제시할 필요가 있다. 새로운 버전의 학교상이 필요한 것이다. 나는 이 새로운 학교를 ‘2.0학교’라 칭하고 싶다. ‘2.0학교’는 학교구성원 간 협업을 통한 자치학교, 주체 간의 쌍방향 소통을 통해 교학상장이 가능한 학교, 교육과 일상이 결합되는 지역학교 등의 중층적 의미를 담고 있다. 어떤 의미를 부여하든 새로운 버전의 학교는 ‘학교구성원 상호 간에 존엄성이 인정되고, 협업을 통해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고, 나아가 보편가치를 공유하며 종국에는 주변에 선한 영향을 미치는 학교’이다(이런 학교를 ‘공공하는 학교’로 명명할 수도 있다).

‘2.0학교’가 제 모습을 갖추기 위해서는 세 가지 원리가 충족되어야 한다. 그 첫 번째는 ‘교사 자율성 원리’이다. 교사는 교육목표를 현실화하는 직접적인 실천자이다. 따라서 이들의 자율성 발휘 정도에 따라 학생들의 ‘성장의 질’이 영향 받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교육권재학생’(敎育權在學生)의 원리가 지켜져야 한다. 학생의 교육권은 헌법상의 기본권이다. 따라서 학교는 어떤 경우라도 ‘정상을 벗어난 방법’으로 이를 침해해서는 안 된다. 특히 단위학교가 학생의 참여와 자치를 보장하는 ‘학생에 의한 학교’가 되기 위해서도 그들을 교육권의 주체로 인식하는 것이 필요하다. 같은 맥락에서 ‘교육권재학부모’(敎育權在學父母) 원리도 지켜져야 한다. 학부모는 학생의 친권자인 만큼 학교운영 과정에 참여할 권리가 있다. 이런 점에서 학부모를 학교의 주인으로 인정하고, 이에 부합하는 제도적 장치를 고안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러한 세 가지 원리는 하나의 세트개념으로서, 협치(協治)에 의한 학교운영의 충족 조건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개념적으로 가능한 ‘2.0학교’를 현실화하기 위해 정부가 취할 수 있는 조치는 무엇일까? 핵심 과제는 단위학교의 권력구조를 3원적인 균형구조로 재편하는 일이다. 쌍방향 소통을 통한 협치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시혜적 차원의 참여 장치로는 불가능하다. 협치는 교육주체가 대등한 권한을 행사하고 그에 걸맞은 책임을 갖는 구조에서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학교현실을 보면, 학교권력의 상당정도는 교원집단이 가지고 있다. 법적으로도 그렇고 심리적으로도 교원이 여타 주체보다 우위에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학교자율, 학교자치, 혹은 단위학교책임경영제의 성공가능성은 희박하다. 따라서 단기적으로는 학교장에게 집중되어 있는 권한을 학교 내부 단위로 분산하는 실질적인 조치가 있어야 한다(이런 점에서 현 정부의 4·15 학교자율화조치는 문제이다. 학교권력의 분산은 고사하고 오히려 학생들의 교육권을 침해할 수 있는 ‘정상을 벗어난 방법’의 동원 근거로 삼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뿐만 아니라 교사의 권력행사에 대한 학생·학부모의 견제장치도 필요하다. 이런 맥락에서 장기적으로는 ‘학부모회 및 학생회의 법제화’가 전향적으로 검토될 필요가 있다.

교육주권자 친화적 교육체제 구축 급선무

이에 더하여 현장 교사들이 실천과정에서 상상력을 발휘하고 사고실험을 할 수 있는 제도적 공간을 마련하는 것도 시급하다. 정부가 교육개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연역적 논리를 강조하는 경우에는 대개의 학교가 특정한 성공모델을 추격하기에 바빠진다. 문제는 이런 추격모델로는 교사들이 활력을 찾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교사들은 개혁실적을 보고하는 공문처리에 바쁘겠지만, 스스로 자기성공의 경험을 갖기는 쉽지 않다. 이런 점에서 현장 교사들의 참여와 실험적 실천을 조장하는 정책 환경 및 학교운영 체제로의 전환을 고민해야 한다. 이런 차원에서 단위학교 교육과정 운영의 자율성을 확대하고 개별 교사의 평가권을 인정하는 조치가 취해져야 한다. 이런 실행과제들이 추진될 때 개별 단위학교의 교육콘텐츠가 풍부해질 것이고, 학교마다 고유성과 독특성이 신장될 것이다. 학교교육과정 운영의 자율공간이 확대되고 개별교사에게 평가권이 주어지는 경우, 학교구성원은 집단지혜를 모아 셀프 브랜딩(self-making) 전략을 취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단위학교가 새로운 학교체제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어떤 개별과제를 채택할 것인가의 문제도 중요하지만 그 이상으로 교육개혁의 전체적인 방향을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의 문제가 더 중요하다. 이런 점에서 교육개혁의 기본 방향은 교육 4주체의 혁신동력화에 맞추어져야 한다. 구체적으로 교육개혁안은 학생·학부모 친화적이어야 한다. 우선 이들 삶의 개선에 긍정적이어야 한다. 그리고 정책추진 과정 그 자체가 바로 학생·학부모들이 혁신제안자로 참여하는 기회가 되어야 한다. 또한 교육개혁은 학교현장 친화적이어야 한다. 즉 교사들로부터 호응을 얻고, 그들의 참여의지를 북돋아 주는 방향이어야 한다. 이뿐만 아니라 시민사회 친화적이어야 한다. 시민들의 교육요구를 반영하고, 나아가 시민사회와의 협력적 네트워크 체제를 구축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그래야 ‘교육주권자 친화적 교육체제’의 구축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즉 국가와 4주체가 상호 협력하는 2.0교육체제 구축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한마디 덧붙이자면, 국가가 교육을 주도하던 시대는 이미 지났다. 이 말은 ‘교육주권은 시민에게 있다’는 의미이다. 국가가 일방적으로 지시하고, 간섭하고, 계몽하는 식의 교육혁신 방식으로부터 시민들이 자기주도적으로 교육을 혁신할 수 있는 방식으로의 전환을 강조하는 것이다. 즉 현장의 교사들과 지역사회 주민들이 협력하여 학교를 운영할 때, 시민(지역주민, 학생, 학부모)들의 교육적 요구와 필요가 충족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특히 교육주권 시대의 공공교육 모델은 시민의 교육적 필요와 국가의 교육적 필요가 접목되는 모델이 되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국가보다 시민사회가 교육개혁의 모티브를 갖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 점이 간과되는 경우 선진 학습사회에 대한 기대는 한갓 망념(妄念)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1) 도정일(2007), “경쟁력, 수월성, 창의성의 비극”, 『비평』제15호, 2007 여름, 생각의 나무, p.21.
2) 김지수(2005), “학교의 경계와 그 해체-학부모의 학교 참여에 관한 문화기술적 사례연구”, 서울대 석사학위 논문.
3) 학교(교사)·학부모·학생 삼자가 서로에 대해 갖는 배타적인 태도로, 예컨대 까뒤집기, 넘겨짚기, 문제점 공격하기, 흉보기, 무시하기, 경계 짓기 등이 이에 해당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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