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8년 11월 2008-10-06   1094

참여마당_삶의 길목에서: 지겨운 추석이 또 왔네요?

지겨운 추석이

또 왔네요?


고진하『참여사회』 편집위원 gojinayo@hanmail.net

올 여름의 꼬리는 유난히 길었다. 9월에도 한낮에는 30도를 오르내리는 늦더위가 맹위를 떨쳤다. 그런 반면에 추석은 유난히 빨리 찾아왔다. 여름 추석은 너무 일찍 도착해버린 어정쩡한 손님맞이, 그것이었다. 중부지방인 우리 동네 들판은 추석에도 여전히 초록 물결이었다. 푸르스름한 밤송이도 익으려면 아직 한참 있어야 할 듯했다. 더욱이 올해 공식적인 추석 연휴는 주말까지 해서 고작 사흘밖에 되지 않아 귀성포기족도 적지 않았다. 뒷동산에 떠오른 보름달만은 어김없이 꽉 찬 보름달이었지만 명절 분위기는 어쩐지 어설펐다.

이런 분위기는 차를 몰고 추석 장을 보러 가는 길에 들은 라디오 방송에서도 감지되었다. 오후의 음악 프로그램 진행자는 애청자들이 보낸 문자메시지를 소개하고 있었다. “지겨운 추석이 또 왔네요.” 한 청취자의 지극히 솔직한 푸념을 진행자는 담담하게 읽어주었다. 끝 모르는 불황에 명절이라니 차례 올리고 선물 마련할 생각에 서민들은 한숨 쉴 만하겠다. 살인적인 교통체증 속에 장거리 운전해야 하는 가장들과 음식 장만이며 뒤치다꺼리에 정신없을 주부들, 마냥 신바람이 날 수는 없으리라. 그렇지만 약간의 불만이 있더라도 언제까지나 공순하게 받들어야 할 어떤 성스러운 것에 대한 금기를 일순에 깨버리는 대담한 말을 들으니 등골이 서늘했다. 추석이, 홀딱 벗은 몸을 왕의 위세로 감추었지만 아이의 눈에 들켜 망신당하고 마는 ‘벌거벗은 임금님’ 꼴이 되어버렸지 않은가. 대나무 숲을 찾아가 ‘임금님 귀는 당나귀’를 목청껏 외친 옛 이야기의 주인공도 10년 묵은 체증이 한꺼번에 내려가는 후련함과 통쾌함을 만끽했겠지만 곧바로 큰 벌을 받을지 모른다는 공포에 시달리지 않았을까.

우리 곁에서 하나 둘 차례로 사라져가는 소중한 것들을 바라볼 때의 스산한 기분도 들었다. 추석이 천덕꾸러기가 된 것은 힘겨운 경제 사정에만 원인이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새해를 맞이하는 설렘이 그런대로 살아 있는 설과 달리 추수감사제로서의 추석의 고유성은 점점 빛이 바래고 있다. 농업은 몰락했다. 농업 인구 300만, 그마저도 거의 상노인들이다. 농경민족이라는 낱말은 더 이상 우리의 것은 아니다. 농사를 짓지 않으면서 어떻게 추수의 기쁨을 알 수 있겠는가? 굶주림이 아니라 비만이 문제인 세상에 곡식을 거두는 일이 무에 그리 대단할까? 명절에나 맛볼 수 있었던 떡과 고기와 과일과 기름진 음식들이 1년 365일 마트에 넘쳐난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는 옛 노래가 되어버렸다. 

추석은 이제 우리에게 별다른 감흥을 주지 못하는 채로 ‘민족의 양대 명절’이란 낡은 타이틀에 기대어 명맥을 잇고 있다. 한국인의 마음속에만 ‘영원한 고향’으로 남아 있는 농촌처럼. ‘지겨운 추석이 또 왔네요’에서 농업과 공동운명체인 추석의 현주소를 떠올린 나는 과민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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