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8년 11월 2008-10-06   1120

이슈①_비정규직 해법, 농촌에 있다

비정규직 해법, 농촌에 있다


박승옥
시민발전 대표 gileseo@ournature.org

지금 이 시간에도 차마 외면할 수 없는 절박한 신음소리가 도처에서 가슴을 후벼 파듯 터져 나오고 있다. 도저히 외면할 수 없는 이 고통과 고문의 비명소리는 그러나 그저 막막하기만 할 뿐 그 어떤 출구도 보이지 않는다. 벌써 몇 년째 계속되는 비정규 노동자들의 장기투쟁과 목숨을 건 단식이 그것이다.

비정규직 문제는 우리 사회의 참모습을 맨얼굴 그대로 보여주는 최대의 양심 거울이다. 자본주의 사회를 살면서 무슨 놈의 양심 타령이냐고 타박을 해도, 경제와 양심은 전혀 상관없는 ‘카테고리 미스테이크(범주오류)’라고 이른바 전문가들이 영어를 들먹이며 아예 대거리를 피해도, 그러면 그럴수록 뚜렷이 경제는 그 핵심이 인간과 사회의 양심과 양식 문제이다. 

사실 양심과 양식에 반하는 비윤리 경제는 폐기해야 마땅한 경제이다. 우리는 어느새 그런 상식을 잊고 있다.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사회는 결코 바람직스런 사회라고 말할 수 없다. 이 때문에 비정규직 경제는 단언컨대 전복의 대상이다.

오늘날 한국 사회는 전체 노동자의 절반이 넘는 900만에 가까운 사람들이 거대한 비정규직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며 익사 직전의 삶을 살고 있다. 기업의 신규 채용은 거의 대부분 비정규직이다. 그것도 직접고용보다 간접고용의 비율이 점점 더 높아지고 있다. 비정규직의 가족과 미래의 비정규 예비군까지 합치면 적어도 전체 인구의 절반에 육박한다. 여기에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하등 다를 바 없는 영세 자영업자까지 합치면 전 국민의 대다수가 불안정 계층의 삶을 살고 있는 셈이다.


비정규직 문제, 사회를 근본부터 바꾸어야 해결돼

군사독재 시대가 무너지고 이제 비로소 민주주의 시대가 왔다고 환호하는 것도 일순간에 지나지 않았다. 민주화운동을 했다는 사람들이 시장과 자본의 논리에 투항하면서 한국은 이제 그야말로 자본이 무엇이든 불가사리처럼 집어삼키는 자본천하, 기업독재의 시대로 접어들고야 말았다.

도대체 어떻게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비정규 문제의 해결 방도를 둘러싸고 그동안 이러저러한 주장과 대안이 제시되기는 했다. 그러나 그 같은 주장의 속내를 들여다보면 특히 이른바 진보개혁세력에서조차 비정규직 문제는 한국경제, 나아가 세계경제의 구조상 해결이 불가능한 숙제이자 구조적인 악이라는 회의가 짙게 깔려 있다. 사실 비정규직 문제는 단순히 새로운 정책을 입안해서 실행하면 해결되는 그런 차원의 의제가 전혀 아니다. 비정규직 문제는 오늘날 산업 자본주의 사회를 살고 있는 우리들 자신의 생각을 근본에서부터 전환해야 해결 가능한 근원의 문제이다.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면 된다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지금 당장 구소련식 국가사회주의 사회로 이행한다면 모를까(물론 선거를 통해서) 아무도 그런 주장이 현실성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주부들처럼 시간제 노동 등 비정규 노동의 형태를 선호하는 사람들도 많다.

수출 증가와 경제성장을 통해 일자리를 늘리는 것이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이명박 정부는 목소리를 높인다. 그러나 이런 스테레오 주장은 이제 사기임이 점차 뚜렷해지고 있다. 2002년 1,625억 달러이던 연간 수출액은 해마다 늘어 2007년 3,715억 달러로 2배 이상 증가했다. 경제도 해마다 4~5%씩 성장했다. 그런데 그 기간 동안 비정규직은 더 늘어났다. 한마디로 이제 수출이 늘어나도, 경제가 성장해도 일자리는 늘어나지 않고 오히려 비정규직만 더 늘어난다.

한술 더 떠 재벌들과 재벌들의 떡값에 영혼을 판 관료들, 경제학 박사들은 정규직을 과보호하는 것이 문제의 원인이고 노동시장을 더 유연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소도둑놈이 자신은 소를 맨 새끼줄을 가져왔을 뿐이기에 새끼줄이 범인이고, 도둑놈을 없애려면 새끼줄이 더 유연해져야 한다고 충고하는 격이다. 

최저임금을 올려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사회적 일자리를 늘려야 한다는 주장도, 연대임금 정책의 도입도, 노동자의 숙련도를 높이는 방안도, 좋은 파트타임 일자리 창출도 대안으로 제시된다. 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이런 정책과 제도들도 비정규직 문제의 근본해결책이라고 여겨지지는 않는다.

조직된 노동자들의 투쟁, 비정규 노동자들 자신이 주체로 나서서 노동조합을 조직하고 투쟁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지당한 말이다. 그러나 그렇게 한다고 해서 근본의 해법이 나무에서 감 떨어지듯 하는 것 또한 아니다.

자본주의는 산업예비군을 필요로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실업자는 상수이며 이런 노동예비군의 존재야말로 저임금구조를 유지하는 핵심 골격이다. 역사상 자본주의 사회에서 실업자가 없었던 때는 단 한 순간도 없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 등 서구의 ‘요람에서 무덤까지’ 가능했던 복지체제와 거의 완전고용에 가까웠던 자본주의 체제란 기실은 제3세계 민중들의 피와 땀을 착취해서 이룬, 광범위한 제3세계의 실업자를 배경으로 얻은 비윤리의 떡고물이었다. 스웨덴 등 북유럽 사민주의 복지체제도 마찬가지이다. 한마디로 자본주의란 일국 차원이 아니면 전 세계 차원에서라도 실업자를 만들어낸다. 게다가 자본주의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저임금 체제를 유지하려 한다.

문제는 간명하다. 비정규직 문제는 자본주의를 극복하지 않으면 해결불가능하다. 우리 사회의 비정규직 문제는 사회체제를 근본에서부터 바꾸어야만 해결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다. 그렇다고 사회주의가 대안일 수도 없음은 이미 현실 사회주의의 실패로 명백해졌다. 생산수단을 사회화한다고 해서, 모든 기업을 국영기업과 공영기업으로 만든다고 해서 일자리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성장과 산업문명에 대한 맹신에서 벗어나

현재와 같은 자본주의 산업사회는 전혀 지속불가능하다. 자본주의 산업문명의 풍요의 원천이었던 값싼 석유와 가스, 천연자원이 이 지상에서 영원히 사라져가고 있기 때문이다. 석유정점(피크오일)과 식량정점, 각종 천연자원의 정점이 쓰나미처럼 들이닥치게 되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게다가 메뚜기 떼처럼 마구잡이로 민중들의 고혈을 뜯어먹던 고삐 풀린 금융자본주의와 시장만능주의의 폐해를 우리는 지금 생생하게 체험하고 있는 중이다. 전 세계 외환거래 가운데 상품 결제 액수는 2%에 지나지 않는다. 나머지는 금융자본의 이동, 투기 거래들이다. 그 2%도 대부분 초국적 기업들의 내부거래이다. 이런 체제를 칭송하는 자들이란 그야말로 예수가 말한 독사의 자식들이거나 양심이 떡값에 녹아 없어진 매국노 이완용 같은 자들뿐일 것이다. 

자본주의를 극복하다니, 이 무슨 겁 없는 빨갱이 주장인가 의심을 갖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런 낡은 좌우 이데올로기를 벗어나 자본주의 산업문명 체제를 근본에서 성찰하고 극복하지 않으면 우리 사회의 미래는 없다. 그리고 자본주의란 인류역사 전체에서 보면 극히 예외에 속하는 이상한 에일리언 같은 체제일 뿐이다.

자본주의 산업문명은 출발에서부터 끊임없는 노동자 착취, 자연 착취 체제였다. 자본주의 산업사회란 사람들 사이의 우애와 협동의 사회가 아니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살벌한 투쟁만이 강조되는 사막사회이다. 암세포처럼 무한 성장해야만 살아 있는 포식자 사회이다.

우리가 왜 그런 사막사회를 추구해야만 하는가. 우리가 왜 어쩔 수 없는 대량생산 시스템의 노예, 기계의 노예, 기업주의 노예가 되어 살아야만 하는가. 마치 다른 삶의 방식은 아예 없는 것처럼 생각하고 왜 아등바등 굳이 노예가 되기를 자청해야만 하는가.

이 지점에서 우리는 발상의 전환, 발상의 혁명을 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이제 경제성장이 안되면 죽기라도 할 것 같은 성장 중독의 미몽에서 깨어나야 한다. 그리고 사실 경제성장 자체도 이제는 머지않아 불가능하게 된다. 자본주의 산업문명의 붕괴는 필연이다. 


경쟁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협동의 공동체 사회로

우리는 우리의 삶을 노예의 삶에서 자유인의 삶으로 바꾸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동시에 우리 사회를 바꾸어야 한다.

우리는 자본주의라는 대규모 노예 사회에서 자유인들의 연대와 협업이 중시되는 공동체 사회, 우정이 중시되고 경쟁보다 협동이 더 중시되는 생태순환의 녹색사회로 사회 자체를 전환시켜 나가야 한다. 그리고 그런 사회는 너무나 당연히 실현가능하다.

노예의식에 젖어 사는 삶 속에서 자립과 자치의 민주주의 공동체 사회는 결코 형성될 수 없다. 노동조합이 민주주의의 학교라는 말은 그래서 당연하고도 소중한 상식이다. 그런데 한국의 노동조합은 지금 빠르게 자치와 자립의 노동조합에서 벗어나 노예와 굴종의 기업노조, 장사치 노조로 변질되어가고 있다. 노동조합이 공동체임을 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공동체 사회로의 전환은 자립과 자치를 실천하는 수많은 지역공동체의 형성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지역공동체의 근본은 무엇보다도 에너지와 식량을 자립하는 지역 소농공동체의 재형성이다. 여기에 비정규 문제 해결의 단초가 있다. 

비정규직 문제는 단언컨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소농으로의 존재 이전만이 근본 해결책이다. 생각해보라. 비정규직 노동자 수백만 명이 소농으로서 농촌에 간다면 아마도 우리 사회의 근본 패러다임이 바뀔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존재 이전은 단순히 실업자 축소와 노동시장의 수요공급 구조를 뒤바꾸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우리 사회 경제 구조뿐만 아니라 새로운 사회에 대한 일반 시민들의 인식과 상상력을 뒤흔들어 놓는 거대한 전환점이 될 것이다. 

공장식 생산을 하는 자본주의 대농업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대안이 결코 될 수 없다. 지금까지 정부의 농업정책이란 농업포기 정책이었다. 기껏해야 전업농-대농을 육성해서 농업의 경쟁력을 키운다는 정책이었다. 최근에는 카길과 같은 대규모 농어업 회사를 만들겠다는 코미디 같은 정책을 버젓이 발표하기도 한다. 가히 개그 수준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화학비료와 농약을 대량 투입하는 녹색혁명, 공장식 농업은 석유의 고갈과 함께 이제 지속불가능하다. 조만간 우리에게는 거대한 식량위기의 쓰나미가 밀려올 것이다. 생태순환 농업으로의 전환은 거의 유일무이한 식량위기의 대안이다.

한 사회의 기초는 산업이 아니라 농업이며, 식량과 에너지를 자립하지 못하는 사회는 언젠가는 붕괴될 수밖에 없다는 자명한 이치를 우리는 다시 인식해야 한다. 미국을 주인처럼 우러러보는 한국의 ‘어륀지족’ 상류층 매판세력은 부시 미 대통령이 ‘국민은 먹어야 살고 국가의 식량주권을 확보하는 것이 국가안보 차원에서 매우 중요하며 국민의 건강과 후생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해외농산물에 의지해서는 안 될 뿐만 아니라 식량자급을 하지 못하는 나라는 나라라고 할 수도 없다’고 한 말은 왜 우러러 떠받들지 않는지 모르겠다. 프랑스의 드골은 ‘진정한 독립은 식량자급’이라고 단언하기까지 했다. 자동차와 핸드폰 팔아서 식량을 사온다는 생각은 그야말로 위험천만한 단견이자 미래 세대를 굶겨죽이려는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 행위이다.

자주개발이란 이름으로 대안으로 거론되는 해외 식량기지 확보 방안도 말짱 도루묵일 뿐이다. 일단 식량 부족 사태가 발생하면 어떤 나라든 제일 먼저 곡물 수출 항구부터 전면 봉쇄한다고 역사는 알려주고 있다. 따라서 식량자급 대책은 화급하고도 필수불가결한 우리 사회 최우선의 과제가 아닐 수 없다. 


농촌 살리고 비정규직 문제 풀 자립농업운동 

똥오줌을 이용한 생태순환 농법은 이미 20세기 초반 미 농무부 토양관리국장을 지낸 프랭클린 히람 킹이 중국, 일본, 한국을 둘러보고 확신한 서구농업의 대안이었다. 19세기 말부터 서구 농업은 지력감퇴로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었다. 서구에서는 똥오줌을 이용한 거름 농법이 없었다. 그래서 휴경 방식을 쓰거나 비료를 얻기 위해 심지어는 농부들이 전쟁터를 누비면서 인골을 수집하기도 했다. 구아노(인광석)를 얻기 위해 구아노 제국주의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전쟁까지 불사한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바로 그 시점에서 킹 박사는 마치 콜럼부스처럼 4000년 동안이나 지속되어온 동아시아의 전통 농법이란 신대륙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대안을 버리고 우리는 엉뚱하게도 지속 불가능한 석유농업의 덫에 갇히고 말았다. 그리고 결과는 식량자급률 25% 수준, 쌀을 제외하면 5%도 안 되는 지극히 위험한 붕괴 직전의 외부의존 사회이다. 식량자급률 70% 대의 북한이 1990년대 초반 구소련으로부터 석유 공급이 끊기고나서 어떤 끔찍한 일을 겪었는지 생각해보라. 농업에 석유가 투입될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지는 순간 식량 부족의 충격은 우리 사회를 거의 허리케인처럼 덮치고 말 것이다. 

오늘날 농지는 해마다 줄어들어 1970년 230만 헥타르에서 2007년 약 178만 헥타르로 줄었다. 농가 수는 123만 가구에 지나지 않고, 농민수도 이제는 3백만을 조금 넘는 정도이다. 물론 60세 이상의 고령자들이 대다수이다. 한국 농촌에는 희망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음지가 양지 되고 양지가 음지 되는 것이 자연의 이치이다. 지금이야말로 절망의 짙은 그늘에 빠져 있는 농촌에 새로운 희망의 길이 열릴 때이다. 경자유전의 원칙을 강하게 살리면서 식량자급률도 높이고 비정규직 문제도 해결할 수 있는 길, 다름 아닌 존재이전 운동이다. 새로운 브나로드 운동이다. 자립농업은 몇 백만의 비정규직 노동자 가족이 소농으로 존재이전을 해야만 비로소 소생 가능하다.

대기업 중심의 대량생산 대량소비 산업 체제도 협동조합을 중심으로 한 생태 순환의 산업으로 전환해야 한다. 비정규직이라는 현대판 천민 노예보다 스스로 주인으로서 일하는 협동조합의 조합원으로의 존재이전이 훨씬 더 사람 냄새가 난다. 생태순환 산업은 경쟁, 생산성, 효율 면에서도 협동조합이 오히려 더 적합하다.    

소농들이 중심이 된 에너지와 식량의 지역자립 체제 구축이야말로 민주주의 실현의 기초이며, 비정규직의 촛불이자 광우병과 식량위기의 촛불이다. 청년들이여, 아마도 극히 소수를 제외하고는 그대들 대부분이 비정규직이 될 것이 뻔하다. 노예로서 죽을 것인가 농사꾼으로서 자유인의 삶을 살 것인가. 선택은 스스로 내려야 한다. 그러나 앞으로 머지않아 최고의 신랑신부는 농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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