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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년 11월
  • 2008.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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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북한인 납치 합리화

글·사진 김재명 <프레시안> 국제분쟁전문기자, 성공회대겸임교수 kimsphoto@hanmail.net

미국 국무부는 해마다 봄철이면 <국가별 테러 보고서>를 발간해왔다. 21세기 들어 이 보고서에서 ‘테러지원국’으로 낙인찍혀온 나라들은 모두 4개국(북한, 이란, 시리아, 수단, 쿠바). 이들의 공통점은 반미국가들이고, 미국이 사실상 지배하는 국제금융이나 무역에서 갖가지 불이익을 겪어왔다. 1987년 대한항공여객기 폭파사건이 터진 뒤로 미국의 테러지원국 명단에 올랐던 북한은 지난 10월에 그 명단에서 빠졌다. 한반도 평화 분위기를 위해선 어쨌든 좋은 소식이었다. 그런데 여기저기서 볼멘소리들이 튀어나왔다.

냉전적 사고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미국과 한국의 일부 보수 극우파들은 “왜 북한을 테러지원국에서 빼냐? 그냥 놔두지…”라며 미국 부시행정부를 탓했다. 동해 건너 일본 쪽에서도 같은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그들의 반대논리는 “북한이 1970년대와 80년대에 일본인들을 납치해갔고 아직도 그 문제가 안 풀렸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납치는 테러 행위나 마찬가지”라는 목청을 돋우었다. 일본 정부가 ‘납치 피해자’로 공식 인정한 숫자는 17명. 북한은 2002년 9월 일본인 납치사건을 일부만 인정하면서 유감을 나타냈고, 생존자 5명을 일본으로 돌려보냈다. 북한은 “납치문제는 이미 해결이 끝난 문제”라는 입장이다. 그러나 일본은 지난 6년 동안 “나머지 피해자에 관해서 아직 납득이 가는 설명이 없다”며 끈질기게 북한을 압박해왔다.

한국인 납치문제, 일본은 사죄해야

여기서 분명히 짚고 넘어갈 점이 있다. 납치문제에 관한 한 일본은 할 말이 없는 나라다. 20세기 전반기 일본이 중국침략(1937년)과 진주만 공습(1941년)에 이어 필리핀과 인도차이나 반도로 쳐들어가면서 전쟁의 미치광이 바람에 휩싸였을 때, 수많은 한국인들을 납치해갔다. 그러고는 이른바 ‘대동아공영권’을 위한 제국주의적 침략전쟁 놀음에 희생시켰다. 우리 학계에선 그 무렵 강제로 끌려간 우리 한국인들이 무려 240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한다.

납치된 이들 가운데엔 논밭에서 일하다가, 우물가에서 물을 긷다가, 시냇가에서 빨래를 하다가 인간사냥군들에게 붙들려가 일본군의 성노예가 됐던 수만 명의 꽃다운 여성들도 있다. 일본 본토와 사할린의 탄광, 필리핀과 인도차이나 반도의 전선으로 끌려가 고통 속에 죽어갔던 이들 가운데 일부는 문제의 일본 야스쿠니신사 안에 위패로 놓여 있다(민주당 김원웅 전 의원은 어느 글에서 이런 상황을 가리켜 “죽은 영혼마저도 지금까지 일제의 강제연행에서 풀려나지 못하고 있다”고 한탄했다).

한국인들을 전쟁노동력으로 써먹기 위해 강제로 끌고 간 납치행위는 곧 전쟁범죄다. 국제법학자들은 전쟁범죄를 가리켜 ‘전쟁과 관련된 국제법의 규정들을 어긴 범죄’라고 포괄적으로 설명한다. 전쟁과 관련된 국제법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제네바협정(1949년)이다. 이 협정에 따르면, 비무장 일반시민(비전투원)을 학대하거나 사살하는 것은 전쟁범죄다. 무려 5천만 명이 목숨을 잃은 제2차 세계대전 뒤 나치 독일과 일본제국주의자들은 각기 독일 뉘른베르크와 일본 도쿄에서 그들이 저질렀던 죄악상을 심판 받았다. 그들이 저지른 전쟁범죄는 크게 3가지 범주로 나뉜다.

강제연행은 반인도적 전쟁범죄

첫째, ‘반평화 범죄’로서, 정당한 이유 없이 타국의 영토를 빼앗으려는 침략전쟁을 벌이는 행위를 뜻한다. 이는 ‘침략전쟁 또는 국제법·조약·협정·서약을 어기는 전쟁을 계획 준비하고 실행한 일, 또는 이런 행위를 이루기 위한 공동계획이나 모의에 참가한 일’(도쿄 극동국제군사재판소 조례 5조)을 가리킨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의 진주만 기습(1941년)은 다름 아닌 ‘평화에 대한 죄’를 저질렀다고 지적된다.

둘째, ‘반인도 범죄’로서, 비무장 민간인에 대한 정치적·인종적·종교적 박해와 집단살해 행위를 가리킨다. 전쟁을 벌이는 중에 일반 민간인에게 가해진 살육행위, 민족집단을 말살시키려는 대량학살, 강제노동과 강제이동을 비롯한 비인도적 행위와 박해가 여기에 포함된다.

셋째, 일반적인 전쟁범죄로서, 점령지역 민간인 거주민들과 전쟁포로들을 죽이거나 학대하는 짓을 가리킨다. 부녀자들에 대한 성폭행도 여기에 해당하는 전쟁범죄다. 일본은 그들의 침략전쟁을 벌이면서 우리 한국인들에게 ‘강제노동과 강제이동을 비롯한 비인도적 행위와 박해’와 성폭행을 일삼았다. 그러니 국제법으로 따져보면 일본은 분명히 ‘반인도 범죄’를 저질렀다. 

문제는 일본의 주요 전쟁범죄자들은 그들 자신을 ‘전쟁범죄자’라고 여기질 않았다는 점이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1944년까지 3년 동안 전시내각의 총리로서 일본의 전쟁을 지휘했던 도조 히데키는 1948년 12월 사형집행을 앞두고 이렇게 중얼거렸다. “아무리 분석해봐도, 도쿄재판은 정치적인 재판이야. 그것은 오로지 전쟁에서 이긴 자들의 정의야.” 아베 신조 전 총리를 비롯해 오늘의 일본 정치인들이 걸핏하면 “위안부 강제 동원은 없었다”고 우기는 것도 같은 맥락이라 볼 수밖에 없다.

적지 않은 일본인들은 아마도 속으로는 이런 생각을 품을 것이다. 일제 식민지 시절의 한국인 납치는 이미 오래 전에 있었던 지나간 일이고, 북한의 일본인 납치는 지금의 문제라고……. 과연 그럴까? 지금도 피눈물을 흘리는 ‘위안부’ 할머니들을 떠올리면 그걸 ‘지나간 일’(과거사)라고 둘러댈 수는 없다. “우리 일본이 지난날 참으로 못된 짓을 했다”며 진정성 담긴 사죄를 하며 머리 숙이지 않는 한, 그리고 일생을 고통스럽게 살아온 피해자들에게 적절한 배상을 하지 않는 한, 일본의 한국인 납치문제는 현재진행형이다. 어두웠던 과거사가 말끔하게 매듭지어지지 않는 한, 한국과 일본 사이의 평화는 없고 갈등만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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