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8년 11월 2008-11-07   989

칼럼_’형벌로서의 가난’과 ‘자발적 가난’




형벌로서의 가난’과 ‘자발적 가난’


박영선『참여사회』 편집위원장 baram@pspd.org


난리가 났습니다. 여기저기 아우성입니다. 굳이 경제 전문가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경제상황이 좋지 않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한국 주식 시장 전체로는 ‘67조 증발’, 개인 투자자들에게는 ‘반 토막 주식’, ‘껌값만도 못한 주가’라는 자조적인 표현이 현재 한국 경제의 실상입니다. 급여 외에는 별다른 수입이 없으니 재테크할 여력이 없는 저는 그동안 주가나 금리, 환율 같은 경제 지표를 그다지 체감하며 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올해 들이닥친 경제 한파는 저에게도 근심거리를 안겨주네요. 작년 말 아들내미와 일본 여행을 갈 요량으로 정기 예금을 한 계좌 들었는데, 그게 바로 펀드형이었거든요. ㅎㅎ 몇 달 전 펀드 손실률이 높다는 보도를 보고 망설이다 은행에 가서 상담을 했더니, 은행원 왈, ‘이제 바닥을 쳤으니 곧 만회할 겁니다’하며 해지를 만류하더군요. 하지만 현재의 손실율과 비교하면 그 때의 손실률은 참 양호한 편이었는데……. 저처럼 소액이 물린 사람의 심사도 이리 편치 않은데, 남의 돈을 끌어다 쓴 사람의 마음은 얼마나 애가 탈까요. 끝내 목숨을 내던지고 만 개인투자자들의 시꺼멓게 타들어간 속은 어떻고요. 혹시 김 선생도 애물이 된 주식이나 펀드를 갖고 있나요? 제 예상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펀드에 가입하거나 주식 투자를 하고 있더군요. 물론 재테크라고 부르기에는 민망한 규모이지만, 마치 데일리 트레이더처럼 열심인 사람들도 꽤 되더군요. 놀랐습니다. 제가 세상 돌아가는 이치나 정황을 너무 몰랐나봅니다.


어쨌거나 ‘파국’이니 ‘추락’같은 험한 수사가 동반되는 경제 형편이 빨리 나아져야 할 텐데요. 언제나 우리 경제에 훈풍이 돌아올까요. 김 선생도 제 물음에 막막하기는 마찬가지겠지요. 경제 불황이 지속된다고 해서 가뜩이나 불안한데 언제 탈출구가 마련될지 누구하나 또렷한 답변을 제시하지 못하니 그 불확실성 때문에 불안감이 더욱 가중합니다. 우리가 느끼는 불안감이나 두려움의 실체는 무엇일까요? ‘가난이 우환’이라는 속담처럼 살림살이가 넉넉지 못하고 쪼들리는 것에 대한, 한마디로 제대로 소비하지 못할까봐 생기는 불안과 두려움이겠지요. 저는 요즘과 같은 상황에서 ‘이것이 정말 내가 두려워하던 상황인가’라는 세네카식 질문을 한번 스스로에게 던져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경기가 안 좋으니 소비가 위축된다고 겁을 먹기보다는, 그동안 우리의 소비 행태가 어땠는지, 혹시 우리의 소비 양식 때문에 이런 경제 상황을 맞이한 것은 아닌지 성찰해보자는 것이지요. 더 나아가 미국의 평화운동가 더글러스 러미스 교수의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라는 문제제기도 한번 곱씹어 봤으면 좋겠습니다. 러미스 교수는 ‘가난’이 정치적 개념이라고 주장하더군요. 제가 지나치게 한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건가요. 하지만 김 선생, 저는 현재의 금융 위기나 세계적인 경제 불황을 극복하기 위한 처방이 정부 개입을 적극 옹호하는 네오케인지언적 접근에 머물고 만다면 현재 대한민국 1%만을 위한 감세정책을 일삼는 MB노믹스는 뛰어넘을 수 있지만 구조적으로 반복되는 경제 위기는 막을 수 없을 거 같단 생각이 듭니다. 야만의 시장에 대한 근본적인 브레이크는 제도가 아닌 사람들의 변화된 마음을 통해서만 가능한 게 아닐까요.


녹색 경제학자인 E. 슈마허를 비롯해 여러 현인들의 글을 모은 『자발적 가난』이란 책을 읽다보니 「가만히 욕망을 들여다보기」라는 장이 있더군요. 읽는 동안 내내 ‘취향’이나 ‘기호’란 미명하에 낭비를 일삼았던 저의 소비 습관이 떠올랐습니다. 그 덕분에 제 주변에 물건들이 넘쳐납니다. 무엇이 들어 있는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는 냉장고 안의 검정 봉지,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고 싶은 욕망에 ‘질러버렸던’ 지갑이나 가방들이 대표적이지요. 사실 편리함만을 추구하고 넘치는 것에서만 비로소 만족과 행복을 느끼는 저에게는 톨스토이의 통찰대로 ‘가난’이란 말은 ‘재앙’과 거의 동의어수준입니다. 그러나 소박한 삶을 실천해오던 많은 이들을 통해 ‘성스러운 가난’이 있다는 것도 우리는 분명히 알고 있지요. ‘성스러운 가난’은 ‘가난을 정복’하는 것에서 가능합니다. ‘형벌로서의 가난’이 ‘빈곤’이라는 가난의 희생자만을 낳는다면 ‘성스러운 가난’은 ‘자발적 가난’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발적 가난』을 번역해서 한국에 소개한 이덕임은 자발적 가난을 ‘고통스러운 절제와 무분별한 사치의 중간쯤에 있는 즐겁고 진보적이고 소박한 삶의 형태’로 설명하더군요.


물론 지금 우리 주변에는 형벌로서의 가난 때문에 신음하는 많은 이웃들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자발적 가난은 언감생심이겠지요. 하지만 저는 경제파탄 상황에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무한질주하는 이웃들도 상당하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현재처럼 주가가 한껏 폭락한 상황이 투자의 적기라며 ‘워렌 버핏이 (주식 시장에) 들어가면 나도 들어간다’는 한 개미투자자의 포부(?)가 대표적이지요. 아무리 부나비처럼 덤벼봐야 기껏 야만의 시장경제 먹이사슬의 최하층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기는 참 힘듭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가난을 자발적으로 선택하는 길밖에 없는 게 아닐까요. 그 길만이 현재의 경제 위기를 근본적으로 벗어나게 할 유일한 해법이 아닐까요. 뱀처럼 냉철한 이성을 가진 김 선생의 답변이 궁금하군요. 그동안 격조했는데 한번 만나지요.


※ 이번 호의 편지는 도서출판 그물코에서 나온 『자발적 가난』을 읽고 썼습니다. 여러분들의 일독을 권합니다.

정부지원금 0%, 회원의 회비로 운영됩니다

참여연대 후원/회원가입


참여연대 NOW

실시간 활동 SNS

텔레그램 채널에 가장 빠르게 게시되고,

더 많은 채널로 소통합니다. 지금 팔로우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