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7년 10월 2007-10-01   2721

조조의 계륵부터 한미FTA까지

갈비 이야기

갈비는 심장과 폐를 감싸주는 가슴통을 이루고 있는 뼈와 살을 말한다. 아담의 갈비뼈 하나를 빼내 이브를 만들었다는 전설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성별에 상관없이 모두 12쌍의 갈비뼈를 가지고 있다. 동물을 종에 따라 갈비뼈의 숫자가 서로 다르다. 소는 13쌍, 말은 18쌍, 돼지는 14~15쌍, 개는 13쌍, 닭은 5~6쌍과 몇 개의 떠다니는 갈비뼈가 있다.

우리 옛 조상들이 가슴통에 붙어 있는 이 뼈를 언제부터 갈비라고 불렀는지는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한자로 늑(肋)에 해당하는 우리말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울러 갈비라는 말이 생기기도 훨씬 전부터 옛 사람들은 갈비탕, 갈비찜, 갈비구이를 즐겨 먹었던 것만은 틀림없다.

먹을만한 살은 없지만 버리긴 아까운 ‘갈비’

『후한서(後漢書)』 「양수전(楊修傳)」에 조조의 계륵(鷄肋) 고사가 등장한다. 조조는 유비와 중원을 놓고 싸움을 벌였다. 그런데 조조는 진격을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후퇴도 할 수 없는 지경에 빠져 계륵이라는 말로 자신의 심경을 표현했다. 이 때 양수는 “닭의 갈비는 먹음직한 살은 없지만 그대로 버리기는 아까운 것이다. 결국 이곳을 버리기는 아깝지만 대단한 땅은 아니라는 뜻이니 버리고 돌아갈 결정이 내릴 것이다.”며 조조의 속마음을 읽었다. 고려의 지식인들도 이러한 고사를 알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고려시대에도 계륵에 해당하는 우리말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문헌으로 전해지는 기록은 없다.

고려 말 중국어 학습교재로 추정되는 『노걸대(老乞大)』에도 협조(脇條)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노걸대는 1280년경 원(元) 나라의 대도(大都, 지금의 북경)로 물건을 팔러가던 고려 상인 3명이 중국 상인을 만나 함께 여행을 다니면서 일어난 일을 회화체로 기록한 책이다. 고려시대에는 한글이 만들어지기 전이므로 협조(脇條)라는 말을 어떻게 번역했는지 알 도리가 없다. 하지만 조선 중기에 협조(脇條)라는 말을 어떻게 번역했는지 파악할 수 있는 자료가 있다. 1517년(중종 12), 최세진은 『노걸대(老乞大)』를 한글로 언해하면서, 협조(脇條)를 ‘녑발치’라고 번역했다. 한편, 최세진은 『훈몽자회(訓蒙字會)』상권 13장에서 ‘늑(肋)’자를 ‘녑발치 륵’이라고 풀이했으므로, ‘녑발치’는 ‘갈비’와 똑같은 뜻임을 알 수 있다.

그 후 ‘갈비(乫非)’라는 표기가 등장하기 시작한다. 일부에서는 “우리의 문헌에 갈비(乫非)라는 음식명이 처음 보이기 시작한 것은 1604년 중국사신을 영접하며 기록된 영접도감 ‘소선상(小膳床)’에서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 국내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영접도감의궤는 1608년(선조 41)~1610년(광해군 2)에 걸쳐 제작된 『영접도감도청의궤(迎接都監都廳儀軌)』이며, 이 의궤에서 ‘갈비(乫非)’라는 표기를 찾을 수 없다. 다만 1703년(숙종 29) 이후에 제작된 『영흥본궁(永興本宮)』의 ‘설찬지도(設饌之圖)’에 ‘갈비(乫非)’가 등장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영흥본궁은 태조 이성계의 아버지가 살던 곳으로 조선 왕실에서 정기적으로 제사를 지냈는데, 4월과 10월의 제사상 차림에 갈비를 올렸다. 이후 임금의 일기형식의 펴낸 조선왕실의 공식기록인 『일성록(日省錄)』의 1792년(정조16) 윤4월 23일자 , 규장각에서 작성한 일기인 『내각일력(內閣日曆)』1787년(정조11) 12월 초8일, 순조 때 청나라 사신을 접대하는 의식을 기록한 『빈례총람(嬪禮總覽)』, 고종 때 궁중에서 왕, 왕비, 왕대비 등에게 진찬하는 의식을 기록한 『내외진찬의궤(內外進饌儀軌)』등의 많은 기록에서 ‘갈비(乫非)’라는 단어를 찾아 볼 수 있다.

한편 다산 정약용(1762~1836)은 『아언각비(雅言覺非)』라는 어원 연구서에 “우협(牛脇)을 ‘갈비(曷非)’라 하고 갈비에 붙은 고기에서 고기만 떼어서 파는 것을 ‘갈비색임’이라 하는데, 이것으로 국을 끓이면 맛이 매우 좋다. 그리고 갈비 끝에 붙은 고기를 ‘쇠가리’라고 하는데 이것을 푹 고아서 국을 끓이면 좋다.”라는 기록을 남겼다.

또한 19세기 말의 요리책인 『시의전서(是議全書)』에는 ‘갈비(乫飛)’라는 이름과 함께 ‘가리찜’의 요리법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들 기록을 통하여 조선 후기에는 갈비를 한문으로 ‘乫非, 曷非, 乫飛’ 등으로 표기하고, 한글로는 ‘가리’라고 읽었음을 알 수 있다.

양반에겐 국법 도우금지령도 소용없어

사실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왕을 제외한 양반들과 일반 백성들은 공식적으로 소를 도살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우금(牛禁), 주금(酒禁), 송금(松禁)의 3금 정책이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 왕조는 소가 농사짓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동물이었으므로 소의 도살을 금지했고, 술로 인한 곡물낭비를 막기 위해 술을 담그지 못하게 했으며, 각종 건축자재를 원활하게 공급하기 위해 소나무를 함부로 베지 못하도록 국법으로 금했다.

그러나 조선 후기로 갈수록 경제적 능력이 있는 양반 관료를 비롯한 부유층들은 이 법을 제대로 지키지 않았다. 이수광(1563~1628)은 『지봉유설(芝峰類說)』에서 “소를 잡는 것은 나라의 대금(大禁)이다. 따라서 쇠고기를 금육(禁肉)이라 한다. (…) 선왕 때 엄하게 법으로 다스렸지만 이것이 지켜지지 않고 심지어 글을 배우는 관학에서도 소 잡기를 밥 먹듯 하니 해괴한 일이 아닐 수 없다.”고 하였다. 또한 송시열(1607~1689)은 『우암집(尤庵集)』에 “우리나라 풍속은 쇠고기를 최고의 맛으로 삼았으며 (…) 아무리 도우금지령을 내려도 돌보지 않는다.”라고 개탄하기도 했다. 물론 일반 백성들은 ‘이밥(흰 쌀밥)에 고깃국을 실컷 먹어보는 것’이 평생의 가장 큰 소원일 정도로 심하게 굶주림을 겪었다.

실제로 수원갈비의 유래는 기껏해야 해방 이후인 1946년 영동시장 싸전거리에서 화춘옥이란 해장국집에서 해장국에 갈비를 넣어주다가 갈비에 양념을 무쳐 숯불에 구워 팔면서 시작되었으며, 1960년대 이후 갈비집들이 하나둘씩 생겨났다고 한다. 물론 역사적 연원을 더 따져 올라가면 정조 때 수원화성을 쌓으면서 돌을 실어 나르다 과로사한 소들을 평소에 언감생심 쇠고기 근처에도 가기 힘들던 백성들이 맛 본 경험이 전국에 널리 알려졌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현상에 불과했을 것이다.

어쨌든 올해도 어김없이 추석 선물로 ‘한우 갈비 세트’가 불티나듯 팔리고 있다. 다른 한편 미국 정부는 광우병 위험에도 불구하고 한미 FTA의 미국 의회 비준을 위해서는 ‘갈비’까지도 수입하라고 윽박지르고 있다. 이에 따라 미국산 소갈비 때문에 국민의 생명과 안전이 동티날 지경에 이르렀다. 따라서 미국의 눈치를 너무 심하게 보느라 할 말도 제대로 못하는 노무현 정부가 심장과 폐를 감싸 안아 생명과 호흡을 지켜주는 갈비와 같은 정부의 역할마저 포기하지 않을까 짐짓 걱정된다.

박상표 국민건강을 위한 수의사연대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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