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7년 02월 2007-02-01   1931

구룡마을 사람들의 스스로 가난한 벗

인경희 모니카 수녀

 

구룡마을이라고 하자 대부분 거기가 어디냐는 눈치다. 하지만 서울 강남구 개포동에 있는 빈민마을이라고 말하면 모두들 ‘아, 타워팰리스 앞에 있는 판자촌’이라고 아는 체를 한다. 사람들에게 구룡마을은 타워팰리스의 대립항이다. 부의 상징인 타워팰리스와 직선으로 1.3㎞ 떨어진 곳에 2천 여 채의 판잣집이 마을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경이로워 할 뿐이다. 삶을 일구어왔던 터전에서 쫓겨나, 작가 조세희가 소설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 쓴 것처럼 “피와 눈물 그리고 힘없는 웃음소리, 밭은 기침소리”로 이십 년을 흘려보낸 구룡마을 사람들은 염두에 없다.

하지만 모니카 수녀에게 구룡마을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삶의 자리일 뿐이다. 이곳에 터를 잡은 지 6년, 아줌마들과 수다 떨며 밭일하고, 채마밭에서 나온 푸성귀로 노인들에게 소박한 밥상을 차려내고, 천방지축 날뛰는 아이들에게 엄마처럼 잔소리를 하며 하루해를 보낸다.

그냥 같이 살려고

“빈민사목에 나온 것은 1999년, ‘바울로 사도직’이라는 빈민지역 활동가 양성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부터예요. 그 전에는 애덕의 집, 소년예수의 집에서 중중장애인들과 함께 있거나, 아이들을 키웠지요. 물론 본당에도 있었고요. 바울로 사도직 교육은 수도자는 조직 안에서 간부가 아니라 가난한 사람으로 존재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스스로 가난하게 살면서 가난한 사람들이 가난을 이겨내는 데 도움을 준다는 게 제가 늘 생각하던 것과 접목이 되었어요.”

그는 3년 동안 살던 서울 미아리 솔샘공동체에서 주소도 없는 유령마을인 이곳에 온 이유를 그저 이곳이 좀 더 열악해보였기 때문이라고 했다. 왜 굳이 더 열악한 곳을 찾아 나선 걸까, 아니 그보다 왜 가난한 곳에 있으려고 하는 것일까? 개발 때문에 온 사람들은 그를 투기꾼으로, 종교인들은 교세를 넓히려는 성직자로 그를 바라보았던 모양이다. 마을 사람들도 심심하면 그에게 “왜 왔는데?”하고 물었다. 그의 한결같은 대답은 “그냥 같이 살려구.”

“제 일생을 생각하면 제가 이렇게 나와 있는 게 대단해요. 수도 생활이 뭔지 모르고 들어갔는데 처음엔 주방소임을 자청했지요. 집안일은 늘 즐겨하던 것이고 사람 만나는 것이 어렵기도 하고, 무엇보다 그 일이 중요하기도 하고.”

그래 맞다. 주방일은 중요하다. 하지만 그 일이 중요하다고 하는 이가 많지 않고, 그 중요성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정작 그 일을 자원하는 이는 드문 것이 우리네 현실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빈민사목의 길을 택하기 전에 이미 그에겐 어떤 싹수(?)가 있었던 것 같다.

“주방소임을 하면 한 시 반부터 네 시까지 휴식 시간인데, 보통 책을 읽지요. 그 때 「목마른 사람들」이라는 책을 읽었는데, 주인공인 많이 배우고 좋은 조건을 가진 신부님이 인도의 빈민가에서 모든 것을 버리고 소유하지 않고 살아가는 모습, 사람들과 함께 어려움을 겪어 나가는 모습이 저한테 다가오더라고요. 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라고 생각했죠. 솔직히 수도생활을 하면서 갈등이 있었거든요. 다들 어렵게 살던 때인데, 먹고 사는 걱정이 없는 수녀원 생활이 편하지 않았어요. 그런 불편함과 책 읽으면서 느낀 것, 내성적인 성격 이런 것들이 빈민사목에 관심을 가지게 한 거 같아요.”

그래도 나는 자꾸 딴죽을 걸고 싶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 챙기는 끼니조차 불로소득이라 여기는 그가 이해가 되지 않을 뿐더러 설령 그렇다 해도 굳이 가난을 자청할 필요가 있을까. 그는 앞집에 사는 아흔 두 살 할머니 이야기를 꺼냈다.

“바로 앞집에 살기 때문에 오며 가며 안 볼 수 없는 할머니인데, 들락날락거리다보니 할머니가 자꾸 밥 먹으라고 귀찮게 해요. 솔직히 설거지도 대충 한 그릇으로 먹으라고 하면 먹고 싶지 않잖아요. 하지만 그냥 먹어요. 할머니가 저를 이뻐하는 이유지요. 보통 어렵고 가난한 사람들을 꺼리고 사람 대접 안 하는데 그 사람들과 같이 있어주면서 더럽다 안하고 귀찮다고 여기지 않는 거. 빈민사목 하는 사람들은 다 그 마음일거예요.”

그는 가난한 사람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하여 특별히 하는 일 없이 그냥 그들과 먹고 마시고 놀고 돌아다녔던 예수 이야기도 덧붙였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따랐어요. 왜 그랬겠어요?”라고 묻고는 머뭇거리는 나에게 “삶을 공유했기 때문이에요.”라고 말했다. 어마한 물음에 대한 답변으론 너무 단순하지 않은가.

깐깐한 미아리 사람들도 인정한 ‘진짜 주민’

가톨릭교회는 19세기 말 교황 레오 13세가 최초로 가난한 이들에 대한 교회의 사회적 관심을 표명한 이래 꾸준히 교회의 사회적 가르침을 천명하면서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인 선택과 가난한 이들과의 공동체 건설이라는 빈민사목의 정신을 구체화하였다. 그러나 가난한 이들 “밖에서” 그들을 어떤 방식으로든 “돕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삶을 선택하며, 가난의 무력함에서 살아갈 힘을 얻고, 가난한 이들 안에서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길을 걷는” 빈민사목이 어떤 종교적 소임보다도 어려운 일일 것이다. 1987년 가톨릭 서울교구에 도시빈민사목위원회가 설립되었지만 현재 빈민사목 전담사제가 6명, 수도자 17명, 선교활동가 10명에 불과한 것을 그 증거로 보아도 되지 않을까.

하지만 신기하게도 그의 표정에는 조금의 불편도, 갈등도 배어있지 않다. 그의 얼굴이 퍽이나 자연스럽고 화평해 보이는 이유는 아마도 그가 빈민사목의 정신을 매우 깊게 체현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에게는 엄격함이나 권위가 조금도 묻어 있지 않다. 수도복을 입은 것만 빼놓는다면 거리감조차 느낄 수 없다. 그래서인가. 빈민‘운동’을 하러 들어온 사람들과 끊임없이 거리두기를 하던 깐깐한 미아리 주민들로부터 그는 ‘진짜 주민’이란 말을 들으며 떠날 수 있었다. 대신 언제, 어디서나 특별하게 대접받는 성직자의 권한은 포기해야 했다.

‘눈물 냄새’ 나는 구룡마을

구룡마을은 예상했던 것보다 더 심각했다. 나 역시 대학시절 철거반대투쟁을 한다며 사당동, 상계동 등을 뛰어 다닌 경험이 있고, 참여연대에서도 최저생계비 체험 캠페인을 하며 서울의 마지막 달동네라 불리는 하월곡동까지 다녀본 바 있어 마을 풍경이 그리 충격적일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마을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깊어지는 판자촌 행렬은 동행 모두에게 침묵을 강요했다. 마을로 들어오자마자 자욱하게 깔려있는 연탄가스 냄새와 한겨울인데도 생생하기만 한 악취 때문에 후각이 먼저 이곳의 상태를 가늠했다. 조세희가 「난쏘공」에서 말한 눈물냄새란 게 이런 것일까?

그는 이곳에서 구룡 바오로 공부방과 놀이방, 모래 치료실 등을 운영하며 아이들을 ‘키우고’ 있다. 재작년부터는 청소년 스카우트 활동을 도입했고, 자모회를 꾸려 건강가정공동체교육이나 효과적인 의사소통교육 등 부모를 위한 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다. 이것들을 통해 마을에 작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매우 큰 변화들을 도모하고 있는데, 외양은 추레하기 그지없다. 사제관이면서 성당이라 할 수 있는 선교본당도 판자문에 수녀원이라고 써놓았을 뿐이다.

하지만 그 문을 열기만 하면 곤궁을 넘어선 세계가 펼쳐져 있다. 남의 땅에 사는 탓에 부모들이 날품을 파는 곳의 주소를 가질 수밖에 없는 아이들, 커갈수록 친구를 제 집에 데려오기 꺼리는 아이들, 위험한 환경 때문에 마음 놓고 놀 곳이 하나도 없는 아이들, 어렵게 마련한 놀이방조차 어른들의 다툼 때문에 잃어버릴 처지에 있는 아이들이 그 안에서 작은 희망을 키워가고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 변하는 것 보면 보람 있어요. 아이들에게 기본 교육시키느라 안 좋은 소리 하고 부모들한테도 안 좋은 소리 듣고 그랬지만 아이들이 미래를 생각하며 자기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려고 하는 모습을 보면 잘 클 것 같아요.”

그는 본당을 떠나 사회복지시설에 있을 때, 아픈 아이를 간호하다가도 자정이 넘으면 자기 방으로 돌아가야 했던 경험에서 수녀로서의 한계를 절실히 느꼈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그는 엄마 같은 마음으로 아이들의 미래까지 염려하고 있었다.

▲ 한 사람이 지나가기에도 버겁고 빽빽한 판자집 골목 사이사이를 지나면 모니카 수녀의 집이 보인다

가난으로 일그러진 마음이 평화를 되찾을 때까지

지금에야 고백하자면, 그를 처음 대면한 순간 나는 잠시 숨을 멈추었더랬다. 그의 빼어난 얼굴 때문이었다. 이런 곳에서 만날 것이라 예상했던 얼굴이 아니었던 것이다. 마주하여 앉은 다음에는 그의 명랑한 목소리에 다시금 놀라고 말았다. 역시 이런 곳에서 들을 수 있을 것으로 상상했던 목소리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완벽한 구룡마을 주민이었다. 오롯한 자신의 모습으로 어설프지 않은 마을 주민이 되기까지 그는 얼마나 오래 수련했을까?

어쩌면 그가 토로했던 대인기피증은 사치스러운 장애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가장 큰 어려움은 가난에 일그러지고 짓밟힌 사람들의 마음이 아니었을까. 그 마음들은 그에게 때때로 마을을 떠나라고 부추기기도 했다. 가난의 자발적 선택을 넘어 누구보다 주민답게 사는 그를 아무래도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이 그에게 치명적인 폭력을 행사하기도 했던 것이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마음들이 그를 그곳에 눌러 앉혔다. 그 마음들이 평화로워질 때까지 그는 자리를 지키고 있을 것이다.

후기:인터뷰 말미에 안타까운 이야기를 들었다. 마을회관에 터 잡은 놀이방이 곧 이사를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의 작은 집에서 끼니도 챙기지 못하는 아이들을 거두어 먹이고 가르치기 시작하자 주민들이 어렵게 놀이방을 만들었는데, 그마저 걸핏하면 나가라고 한다는 것이다. 아이들을 키울 수 있는 작은 공간조차 배려하지 않는 각박함이 야속하다. 우리는 그에게 구룡마을의 가난함조차 허락하지 못하는 것인가.

글 박영선 참여연대 사무처장 | 사진 김영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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