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6년 04월 2006-04-01   1843

나는야 흙에 살리라

창 밖에 산수유가 활짝 노랗게 꽃을 피웠네. 이제 개나리, 진달래, 철쭉, 목련, 라일락, 아카시아로 이어지는 꽃들의 행진이 시작되겠지. 중부지방에서도 논갈이, 밭갈이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논 갈고 밭 가는 농부들 뒤를 백로들이 쫓아다니겠네. 그 모습을 앞으로 얼마나 더 볼 수 있을까?

바야흐로 흙의 향연이 펼쳐지니 모두들 즐거워할지어라. 봄볕에 무르녹는 들판 위로 아지랑이가 아롱아롱 피어오른다. 박인희의 ‘봄이 오는 길’이 생각나. ‘산 너머 조붓한 오솔길에 봄이 찾아 온다네 / 들 너머 고향 논밭에도 온다네 / 아지랑이 속삭이네 봄이 찾아온다고….’ 어려서 봄이면 라디오나 텔레비전에서 늘 들을 수 있던 노래. 그러나 이제는 구태여 찾아 듣지 않으면 결코 들을 수 없게 된 노래. 세상은 이렇게 변했다.

그런데 흙은 언제 밟아 보셨나요? 도시화율이 이미 80%를 넘었고, 머지 않아 90%를 넘게 되는 사회. 한국 사회는 도시 사회. 이 사회에서 흙을 밟는다는 건 갈수록 어려운 일이 되고 있지요. 시멘트와 아스팔트로 흙을 덮는 것이 이 사회에서 도시를 만드는 가장 기본적인 방식이기 때문에. 이 사회에서 도시가 늘어간다는 것은 흙을 덮은 시멘트와 아스팔트가 늘어간다는 것. 흙을 밟으려면 특별한 노력이 필요하지요.

흙은 생명의 원천. 오죽하면 유대인은 신이 사람을 흙으로 빚어 만들었다는 신화를 만들었을까? 한 줌의 흙 속에도 많은 생명체가 깃들여 있다네. 건강한 물가의 흙에는 생명체가 특히 많아서 한 숟가락 정도의 분량에도 2억 마리가 넘는 미생물이 살고 있다지. 흙 자체가 생명체 덩어리인 셈.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우리 손에 만져지지 않는다고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잘못. 그러니 우리의 도시는 맹목의 도시.

오랫동안 흙은 농업과 농촌의 상징이었다. 현대 사회는 농업사회에서 출발했으니 농업과 농촌은 곧 고향의 상징. 그래서 흙은 또 고향의 상징. 그러나 공업화 45년의 세월이 지나며 ‘토박이 도시민’이 전체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게 되었네. 오늘도 한국방송에서는 ‘내 고향 6시’를 방영하겠지만, 전체 인구의 다수에게 농촌은, 흙은 사실 더 이상 고향이 아니어라. 그러니 흙이 잊혀지고 더럽혀지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인지 몰라.

역시 요즘은 거의 들을 수 없는 노래인 ‘흙에 살리라’에서 홍세민은 외쳐 불렀다. ‘왜 남들은 고향을 버릴까 /고향을 버릴까 / 나는야 흙에 살리라 / 부모님 모시고 효도하면서 / 흙에 살리라….’ 그러나 세계무역기구와 자유무역협정은, 그리고 재벌들은 더욱 더 흙을 버려야 한다고 을러대네. 우리 모두 흙에서 나와 흙으로 돌아가는 존재이거늘. 이런 상황을 악용해서 아귀세력은 새만금 갯벌이라는 특별한 흙을 없애려 날뛰고 있기도 하네.

나는야 흙에 살리라. 그러자면 먼저 흙부터 살려야. 탐욕과 산업에 짓눌려 죽은 흙, 망가진 흙, 더러워진 흙. 푸슬푸슬한 봄 흙을 밟으며 새록새록 돋는 파란 새싹들을 보라. 흙은 생명의 덩어리. 흙이 건강하면, 우리도 건강하다. 시멘트에 황토를 바르고 좋아할 것이 아니라 흙이 그대로 건강하게 존재할 수 있도록 하라. 흙을 존경하라. 흙을 사랑하라.

홍성태「참여사회」 편집위원장, 상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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