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5년 03월 2005-03-01   1743

드넓은 광야에 불지른 작은 불씨 – 최옥화 신세계 수지이마트 노조 분회장

『참여사회』 지령 100호를 맞았다. ‘100’이란 숫자에 연연할 필요 없다며 딴청을 부려 보지만, 인터뷰 대상을 선정하는 데 어느 때보다 신중할 수밖에 없었던 게 사실이다. 마침 우연히 읽게 된 한 잡지의 100호 특집에는 “‘익힐 습(習)’자란 새가 날갯짓을 배워 익숙하게 날아다니려면 좌우 날갯짓을 100번 해 봐야 한다는 의미로 만든 글자”라며 “‘100이라는 숫자가 피나는 노력 과정을 이르는 것이며, 동시에 100이라는 숫자를 넘어선다는 것은 그 일을 완전하게 해낼 수 있다는 보증수표이기도 하다”라고 매우 엄중한 정의를 소개하고 있기까지 하지 않은가.

하지만 100호에 걸맞는 사람을 결정하는 데는 큰 고민이 필요치 않았다. 참여연대 운동, 『참여사회』 발간 정신의 기본에 충실한 사람을 찾으면 되는 것이다. 『참여사회』가 참여연대 운동과 회원들을 이어주는 다리 노릇을 하는 매체이고, 이 잡지가 다가가야 할 대상은 힘겹게 자기 목소리를 내려 하지만 사회의 두꺼운 벽에 가로막혀 그 목소리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는 우리 사회의 약자들이라는 대전제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무노조 경영방침을 고수하고 있는 신세계 이마트에서 여성 비정규 노동운동의 길을 어렵게 개척해 가고 있는 경기일반노조 소속 이마트 노조 최옥화 분회장은 『참여사회』 100호에 가장 잘 어울리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

“남 위해 일한다 생각한 적 없다”

약속장소까지 가는 길은 매우 고달팠다. 아침부터 진눈깨비가 내리는 날씨는 나 같은 게으름뱅이에게는 고역일 수밖에 없었다. 마침 그 날은 경기도 용인시 수지 인근 학교들 졸업식이 있는 날이라 가는 곳마다 교통체증이었다. 약속 시간을 한 시간 훌쩍 넘겨 도착했건만, 그는 한 마디 불평 없이 “다 먹자고 하는 일인데, 밥부터 먹고 합시다” 한다. 뭐 뀐 사람이 성낸다고, 정작 다음 일정 때문에 조급해진 건 약속 시간을 어긴 나였다. 하지만 배려가 습관이 돼 버린 듯한 그의 한 마디에 난 뒤통수가 뻐근할 정도로 빡빡한 이후 일정을 모두 잊고, ‘밥부터 먹기로’ 했다.

자리를 잡은 뒤 그에게 인터뷰 요청 배경에 대해 이것저것 설명했다. 그는 자신이 이렇게 ‘유명한’(?) 잡지에서 만날 만한 사람이 아닐뿐더러, 더욱이 꼭지 제목처럼 ‘아름다운 사람’은 결코 아니라고 거듭 얘기했다.

“나 개인을 위해 시작한 일인데, 언론이나 사람들이 저를 아름답다고 미화하는 것 같아요. 한 번도 남을 위해 일한다는 생각을 해 본 적 없어요. 조금이라도 힘들게 느껴지면 바로 그만둘 수도 있어요.”

이 사람, 자기가 한 일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절대 인정하지 않겠다는 태도였다. 집회장이나 사람들 모인 곳에 나타날 때마다 마이크 잡고 한 마디 하라는 재촉이 싫어 자신을 자꾸 남 앞에 세우는 민주노총 활동을 그만 둘 생각도 했다는 그다. 그를 계속 마주하고 있자니, 이런 그의 말이 농담인지 진담인지 헷갈리기까지 했다. 그러나 ‘무노조 경영’이라는 일개 회사의 노동정책이 국가 법률보다 위에 있는 양 위세를 떠는 신세계 이마트에서 감히 노조 깃발을 내 건 그의 행동이 자신만을 위한 일일 순 없다.

최옥화, 그는 드넓은 광야를 불태운 들불은 아닐 수 있지만, 들불에 불을 지른 불씨인 것만은 틀림없다.

헌법이 보장하는 기본권인 노동3권이나 노동자가 노조를 조직하고 가입해 활동할 권리는 이미 법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확립된 권리지만, 신세계 이마트에서는 어림없는 일이다. 노동자의 마땅한 권리 행사는 회사 명예 실추, 상사 지시 불복종 및 반항, 회사 질서 문란, 업무 방해죄가 될 뿐이었다. 이마트 노동자들은 노조에 가입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몇날 며칠을 임직원실에 끌려가 노조 탈퇴를 강요받아야 했고, 회사 안에서는 보안원들로부터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했을 뿐 아니라, 퇴근 후엔 미행까지 당했다. 심지어는 아이 기저귀를 사기 위해 마트에 들어가려 할 때 출입을 봉쇄당하고 쫓겨나야 했다.

탄압의 결과는 가혹했다. 분회 창립 당시 22명의 조합원 중 4명만 남았고, 그 중 한 명은 해고, 최 분회장을 비롯한 3명은 3개월 정직상태다. 국가인권위에 진정을 내고, 부당징계 구제신청을 하는가 하면, 부당 노동행위와 감금 폭행 혐의로 경영진을 고소하는 등 모든 법 절차를 밟고 있지만, 그 결과에 대해 아무도 낙관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귀신도 곡할 노릇’이라는 삼성 SDI 노동자들의 핸드폰 불법 복제 사건을 들먹일 필요도 없다. 삼성그룹 이병철 전 회장의 유고가 금과옥조로 떠받들어지는 모든 계열사에서 노조 활동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이제 모르는 사람이 없다. 해서, 정직 상태인 그가 계산원으로 복귀할 거라, 농담으로라도 쉽게 단정하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그 역시 마찬가지이다.

“집회를 할 때마다 회사는 내용증명을 통해 집회가 법률 위반이고 정직기간은 자중해야 할 시기라는 점을 계속 강조하거든요. 이유가 뭐겠어요. 전 7월이 재계약 시기인데, 아마 재계약이 쉽지 않을 거예요. 통상 이마트에서 본인이 원할 경우 재계약 안 한 적은 없지만요.”

“네가 하면 나도 따를게”란 말 하나 믿고

그는 매우 평범한 주부 파트타이머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른 채 노조 깃발을 세웠고, 곧 여성 비정규 노동운동의 앞줄에 섰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깨끗하고 신사적’일 것 같았던 회사 이미지에 끌려 들어간 회사였지만, 욕설 등 관리자들로부터 비인간적 대우를 당하며 이마트에 대해 품었던 그의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졌다. 동료 계산원들 사이에서는 노조가 필요하다는 얘기가 조금씩 돌기 시작했다. 때마침 ‘장갑 사건’과 ‘청소검사 사건’이 터졌다. 손끝이 트고 갈라져서 장갑을 끼었는데 회사는 손님들 눈에 거슬린다는 이유로 그조차 못하게 했고, 계약 근무시간이 슬며시 늘어난 데 따른 불만이 쌓여가던 참에 근무 외 시간에 모멸적인 청소검사까지 이뤄지자 청소거부라는 집단행동을 하게 된 것이다.

“노조 얘기가 나오면 동료들이 ‘네가 해라, 그럼 나도 따라갈게’란 말을 했었는데, 전 참 순진했나 봐요. 그냥 그 말대로 해 버렸으니까.”

두려운 마음을 다스리며 경기일반노조에 상담을 요청했다. 그 뒤 그는 용감하게도 홀로 노조원으로 가입했고, 동료들을 하나 둘 모았다. 2004년 12월 21일, 마침내 신세계 이마트 수지점 여성 계산원 노조가 창립했다. 그러나 곧 조합원들은 여러 가지 이유를 대며 노조 탈퇴서를 제출했다. 회사 측의 회유와 협박 때문이었다.

“회사에서 오죽 괴롭혔으면 탈퇴서를 썼겠어요. 처음에는 많이 속상했지만, 한 명 한 명 탈퇴 동기를 들으면서 이해하게 됐어요. 아시잖아요. 저도 본부장과 면담하다가 탈퇴서 썼던 거.”

그는 “동료들을 이해한다”고 했다. “안타깝지만, 원망스럽진 않다”고도 했다. 괴로워하는 조합원들과 노조 결성을 사전에 차단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대기발령을 받은 점장을 보며, 그 역시 잠시 흔들렸던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탈퇴할 수밖에 없었던 심정을 알기 때문이다.

“지금도 남은 조합원들끼리 매일 1인 시위 하러 회사에 가는데요, 보안원들 때문에 편안히 얘기하진 못하지만 다들 응원을 많이 해 줘요. 날씨 춥다며 손잡아 주고, 건강 걱정도 많이 해 주고요.”

소리 없이 한 마음임을 확인케 해 주는 동료들과 “잘 모르는 가정주부가 소송 걸리면 변호사비가 많이 들어갈 텐데 걱정된다”는 얘기를 듣고 흔쾌히 법률 지원단을 꾸려준 변호사들을 비롯한 주변의 격려 덕분에 그는 더 씩씩해졌다.

“IMF터지고 나서 비정규직이 많이 늘었잖아요. 가정을 전적으로 책임져야 하는 여성들도 있지만, 남자보다 여자들이 더 열심히 싸워야 할 거 같아요.”

험난한 길, 담담하게 웃으며 가리

노조 결성을 위해 그가 비밀스럽게 동료 직원들을 만나는 과정, 회사로부터 회유와 협박을 당했을 때의 이야기 등을 들으며, 난 3년 전 미국에서 만난 한 여성 활동가를 떠올렸다. 당시 나는 미국노총(AFL-CIO)의 한 방계 조직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건물 청소원들의 권리 구제를 위한 캠페인(Justice for Janotor!)에 자원활동가로 일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워싱턴 DC에서 볼티모어에 이르기까지, 매주 한두 차례 그를 따라 한국인들이 청소부로 일하는 건물을 찾아가거나 가가호호 방문하며 그들의 노동환경을 조사하고 면담했다.

노동자들을 만나다가 매니저에게 협박을 당한 적도 있었는데, 그런 날이면 낯선 미국 땅에서 혹시 고발이라도 당하지 않을까 맘을 졸이기도 했다. 죽을 둥 살 둥 일만 하면서 자기 권리 찾기엔 무관심한 노동자들을 보며 실망스러운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태연했다. 협박을 당하면서도 노조 결성의 뜻을 굽히지 않았고, 노동자들에게 냉대를 당하면서도 항상 웃는 낯으로 사람들을 설득했다. 그를 보며 난 늘 부끄러웠다.

지면에 옮기지 못한 말들이 많지만, 최옥화 분회장은 이 꼭지를 통해 만나 본 어떤 사람보다도 삶의 부침(浮沈)이 많아 보였다. 순탄치 않은 개인사에도 불구하고, 험난한 길을 담담하게 선택한 그의 올곧음이 내게 그때의 부끄러움을 다시 맛보게 한다. “분명 잘못된 것이 있다면 감수하며 살기보다는, 적극적으로 그 문제를 고치려 든다면 좋은 사회로 좀더 빨리 다가갈 수 있다”는 그. 그가 꺾이지 않는 한, 난 계속 부끄러울 것이다. 고백컨대, 난, 기꺼이, 언제까지나, 부끄럽고 싶다.

박영선 『참여연대』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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