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4년 10월 2004-09-02   3358

[인터뷰] 故 김남주 시인 부인 박광숙씨

“진통이 없으면 진보도 없다”

김남주 시인이 타계한 지 꼭 10년이 지났다. 그를 기억하는 많은 사람들이 뜻을 모아 10주년 추모행사를 평전도 출판했다. 고향 해남에 문학관도 지을 모양이다. 기일(2월13일)을 놓쳤지만 올해를 넘기기 전에 이젠 민족시인이 된 남조선민족해방전선(이하 남민전) 전사, 오십이 채 안 돼 우리 곁을 떠난 김남주 시인의 사상과 시 세계를 되짚어 보고 싶었다. 시인의 남민전 동지였고, 문학의 길을 같이 걸어간 문우였으며, 짧은 시간이나마 시인의 옆자리를 풍요롭게 채워 준 반려자, 박광숙 선생을 만났다.

남민전은 시대가 만든 것

– 남민전 얘기부터 먼저 하지 않을 수 없겠는데요. 선생님은 남민전에 어떻게 가입하셨나요?

“당시는 유신 치하로 아주 엄혹한 시기였잖아요. 제가 1974년부터 교사생활을 했는데, 올바른 교사되기가 너무 어려웠어요. 명색이 선생인데 아이들 가르치면서 거짓말쟁이가 돼 가고있단 생각이 들었어요.

학교는 툭하면 반공궐기대회 같은 데 학생들 동원했고, 교육청에선문제 교사 색출하는 방법들을 내려보냈으니까요. 가만히 있을 순 없다, 뭔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크리스찬아카데미 같은 데서 비슷한 생각을 가진 교사들을 만났어요. 그게 남민전을 만나게 된 시초였고요. 고민하다 보니까 자연히 그쪽으로 달려가게 됐던 거 같아요.”

– 두렵지 않으셨나요? 워낙 험한 시기라 결단하시기가 쉽지 않았을텐데요.

“무서웠죠. 모두들 감옥 가는 때였으니까요. 나도 감옥 갈 수 있겠지만, 가야되면 어쩔 수 없지, 그렇게 생각했어요.”

제3세계 민족해방운동과 보조를 맞춰 예속적 독재권력 타도, 외세축출, 부의 공평분배 등을 강령으로 내걸었던 자생적 결사조직 남민전은 당시 전위적인 투쟁방식에 대한 격렬한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남한 현실에 안 맞는 좌익맹동주의의 소산”, “지나치게 급진적” 등의 평가들이 운동 내부진영에서 쏟아졌지만, 김남주 시인은 “냉전 이념에 입각한 비판의 소리”라며 받아넘겼다.

– 남민전에 대한 평가가 냉담하자 김남주 시인은 그 외로움을 시로 표현하기도 하고, “남민전은 그 시대 사회운동의 한계”라며 불가피함을 역설하셨는데요. 선생님은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너무나 억압적인 시대상황이 남민전을 만든 거예요. 좀더 살기 좋은 시대였다면 그렇게 극단적인 방법을 택하지는 않았겠죠. ‘민주’나 ‘평화’라는 것들이 그냥 얻어지는 건 아니고, 어찌 보면 죽음을 불사해야만 얻을 수 있는 거잖아요. 많은 사람들이 운동을 후퇴시켰다는 비판도 했지만, 한 번쯤은 겪을 수밖에 없지 않았나 생각해요. 자기를 죽이면서 몇 발짝씩 앞서 나갔던 사람들이 역사를 제자리로 돌리는 큰 동력이 됐다고 생각해요. 남민전이 미국과북한에 대한 화석화된 인식을 획기적으로 깬 부분만큼은 인정해야 된다고 봐요.”

그는 매우 긴 시간 동안 남민전에 대해 이야기했다. 아직까지 정확한 평가가 이뤄지지 않고 있는 남민전 사건이 정당하게 재조명되길 원해서일 것이다. 그는 현재 쟁점이 되고 있는 과거사 청산작업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은 듯했다. 쉽게 운동한 사람들은 인정도 쉽게 받는 반면, 힘들게 운동한 사람들은 평가받는 것도 너무 힘들다고….

꽃만 피우고 간 김남주 0.75평 독방에서 우유곽에 칫솔 끝을 갈아 쓴 김남주의 시들이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었던 것은 박광숙 선생 때문이었다. 미행 당하지 않을까, 집에 정보과 형사들이 들이닥치지나 않을까 한시도 마음 놓을 수 없는 상황에서 시 하나하나를 소중히 간직한 덕분에, 편하게 산우리들이 시인의 목소리를 언제든 시집으로 만날 수 있게 된 것이다.

– 김남주 시인은 남민전 때문에 처음 알게 되신 거지요?

“예. 제가 글을 끄적인다고 하니까 홍보 파트에 배치 됐어요. 그때 처음 만났죠.”

– 선생님이 먼저 석방되신 후 오랜 시간 동안 옥바라지를 하셨잖아요? 그땐 연인 사이가 아니셨는데(맞나요?) 옥바라지를 하신 이유가 있나요? 같은 조직원으로서 책임감 때문만은 아닐 듯한데.

“그냥 같은 조직원으로서 누군가는 뒷바라지해야 한다는 생각이었어요. 그러다 보니까 많은 사람들 입방아 속에서 결혼까지 하게 된 거고요.”

– 입방아 때문에 결혼을 하시게 됐다고요? (웃음)

“진짜예요. 순간의 선택이 10년은 간다잖아요. 정말 그렇더라고요.”

– 선생님께 김남주 시인은 어떤 분이셨나요?

“자유롭고 얽매이는 걸 싫어했어요. 김용태 시인이 김남주보고 딴따라라고 했는데, 맞아요. 전사라기보단 예술가 기질이 더 많은 사람이었죠. 시대가 그 사람을 전사로 만든 거예요. 김남주 시인이 요가를 했는데 항상 물구나무만 섰어요. 물구나무가 요가의 꽃이라면서. 그래서 제가 그랬어요. 뿌리도 없고 잎사귀도 없는데 꽃만 피우면 뭐하냐, 그 꽃은 금방 시들어버리지 않느냐고요. 결국 꽃만 피우고 갔지요.”

– 제가 김남주 시인의 시를 처음 접한 게 대학 2학년 때였는데, ‘낫’이란 제목의 시였어요. “낫 놓고 ㄱ자도 모른다고 / 주인이 종을 깔보자 / 종이 주인의 모가지를 베어버리더라 / 바로 그 낫으로…”라는.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몰라요. 글 쓰시는 분으로서 남편의 시에 대해 한 말씀 해 주세요.

“교과서에도 김남주 시인의 시가 실려 있거든요. 남편 시가 나올 때마다 아이들이 ‘김남주 시인 얘기해주세요’하는데, 참 민망해요. 창작과비평사에서 처음 발표된 시는 상당히 모더니즘적이었어요. 상당히 강렬했지요. 그만큼 경직돼 있었던 게 사실이에요. 오로지 정치의식과사회의식의 집약이지요. 서정성이 부족해요.”

– 김남주 시인은 자신의 사상을 직접 시로 표현하기도 했지만, 우리들에게 하이네나 네루 다, 브레이트 같은 서정적이면서도 혁명적인 시인을 소개해 주었잖아요. 전 「아침 저녁으로 읽기 위하여」 같은 번역시집을 보면 김남주 시인의 서정성이 읽히던데요.

“그렇죠. 제가 처음 하이네 시를 접한 게 중학생 때였어요. 그땐 서정시인 줄만 알고 읽었는 데 나중에 하이네가 혁명시인이란 걸 알고 깜짝 놀랐어요. 똑같은 시를 두고 우리가 양극단을 오간 거예요. 우리 사회가 어느 한 편을 완벽하고 철저하게 은폐시켰다는 말이에요. 김남주 시인이 그 은폐된 한쪽을 헐어 냈다고 할 수 있죠.”

지금은 한 고비 넘어가는 중

그는 지금 강화에 살고 있다. 강화에는 왜 내려갔냐고 물었다. ‘우연’과 ‘객기’일 뿐 별다른 이유는 없다고 답했다. 하지만 그에게 강화는 김남주 시인과 함께 한 세 번의 여름 동안 ‘우리의 땀과 행복한 날들의 기억’을 만든 곳이었으며, 시인이 떠난 후에는 ‘고통의 바다’가 됐다. 그 고통과 적극적으로 마주하며 고통을 이기고자 발버둥친 끝에 강화는 이제 그의 삶에서 ‘필연’으로 변했다.

-강화에서의 생활은 어떠신지요?

“처음에는 미친 듯이 농사만 지었어요. 봄마다 셀 수 없이 많은 나무를 심고, ‘꽃사태’가 나도록 꽃도 심고요. 지금은 복직해서 고등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쳐요.”

– 입시 교육 때문에 갈등은 없으신가요?

“교과서 무시하고 자기 멋대로 가르치면 되요. 내가 가르치고 싶은 대로 가르치면 그게 입학성적에도 상당히 도움이 되더라고요. 다양한 경험을, 내가 아는 세계를 애들한테 보여 주면 아이들 의식도 자연스럽게 성장해요.”

– 선생님께서 보시는 세상은 지금 어떤가요?

“글쎄요. 시골 사는 아줌마가 뭘 알겠어요. 다만 어떤 때는 서울 한복판에서보다 멀리 떨어진 시골에서 바라보는 세상이 더 명료할 때가 있어요. 애들이 왜 이리 사회가 혼란스럽냐고 질문을 해요. 전 지금 우리 사회가 한 고비를 넘어가는 중이라 당연한 것이다, 이런 진통 없이는 진보도 없다, 그렇게 설명해요. 그렇게 생각하고요.”

마지막으로 참여연대 회원들에게 책 한 권 권해 달라고 부탁했다. 최근에 읽었다며 그는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 얘길 했다. “사람들은 자유롭길 꿈꾸면서도 자유롭지 못하잖아요. 그런 우리에게 이 책은 어디에도 속박되지 않는 영혼의 자유로움, 원시 그대로의 생명력을 느끼게 해 줘요.”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불섶으로 뛰어드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을 보며 공연히 어깨가 무거웠던,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가위눌린 삶을 살아야 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 시절을 헤치며 살아 온 그는 아직까지 완전히 자유롭지 못한 듯 했다. 누가 그의 어깨를 짓누르는 짐을 나눠질 수 있을까. 누가 그로 하여금 한 마리 기운 넘치는 말이 되어 거친 들판을 맘껏 달리게 할 수 있을까. 그가 자유로울 때까지 이 강고한 세상은 또 얼마나 변해야 할까.

* 이 글은 <참여사회> 9월호에도 실렸습니다.

글: 박영선 (참여연대 사무처장) 사진: 김영광(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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