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4년 05월 2004-05-01   3394

[책속의 책읽기] ‘피아노 치는 여자’, 엘프리데 옐리네크/이병애 옮김/문학동네

고독한 악기 피아노와 ‘관계의 폭력성’, 절묘한 조화

1709년 피렌체의 악기제작자 B.크리스토포리가 처음 피아노를 제작했을 당시에는 이 악기가 오늘날과 같이 가장 대중적인 악기로 사랑받으리라고는 짐작하지 못했을 것이다. 18세기 사람들에게 피아노의 발명은 가히 혁명적인 사건이었다. 피아노 발명 이전에 존재하고 있던 하프시코드는 건반에 연결된 격철로 현을 뜯어서 소리를 내기 때문에 음량조절이 안 되고 큰소리를 얻을 수 없었다. 클라비코드는 현을 뜯는 것이 아니라 건반에 연결된 탄젠트로 현을 바로 때리도록 되어 있지만 역시 큰 음량을 얻을 수 없었다. 이에 비해 <강약을 줄 수 있는 하프시코(Gravicembalocolpianoeforte)에서 피아노포르테 또는 포르테피아노란 이름이 생겨났고 다시 피아노라 줄여서 오늘에 이름>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피아노는 강약을 자유롭게 변화시킬 수 있는 장점이 있다. 피아노 건반을 누르면 이 움직임이 해머에 전달되고 이 해머가 현을 때려 소리를 내게 되는데 강약의 폭은 오르간을 제외하면 가장 크다. 피아노가 점차 하프시코드와 클라비코드의 자리를 밀어내고 대중의 사랑을 독차지하게 된 데는, 음악의 표현이 자유로운 강약 변화를 중요시하고 음악의 장(場)이 한정된 공동체의 테두리 안에서 벗어나 폭넓은 대중으로, 따라서 큰 음량을 요구하는 대회장으로 이행하기 시작한 18세기 시대 정신의 변화와도 무관하지 않다고 한다.

그러나 피아노가 처음부터 대중의 사랑을 받은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평균율 24곡을 작곡한 바흐도 1726년 질버만이 제작한 피아노를 처음 보았을 때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1786년에 이르러서야 런던에서 최초로 피아노 공개 독주회가 열린다.

‘피아노 치는 여자’는 작가 엘프리데 옐리네크의 개인사와 무관하지 않다. 짐작대로 작가는 음악을 공부했고 자신을 뛰어난 피아니스트로 키우려는 어머니에 반발해 연극과 문학의 길을 갔다. 이 작가에게서처럼 억압의 결과가 뛰어난 작품으로 이어진다고 한다면 작가에게 억압이란 어떤 의미에서는 창조의 전제조건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작가 개인에게는 너무 가혹한 일일 테지만.

‘피아노 치는 여자’ 에리카는 서른 후반의 음악원 선생이다. 그녀는 오스트리아뿐 아니라 유럽의 가장 뛰어난 피아니스트가 되는 목표로 키워졌지만 지금은 그저 음악원 피아노 선생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다. 그녀는 아버지가 쓰던 면도칼로 자신의 육체를 찢거나, 남자들만이 가는 핍쇼에 가서 남자들처럼 지켜보면서 또는 밤늦은 시간 공원에서 낯선 남녀의 정사 장면을 몰래 지켜보면서도 아무 것도 느낄 수 없는 감정적 결핍의 존재이다. 그렇다면 천재 음악가들을 자기 식대로 조롱하고 평생 가난과 고독 속에 살았던 슈베르트에 대한 연민을 표함으로써 스스로 해방을 누릴 뿐 아니라 가끔씩 미숙한 남자 학생들에게 질타를 가하고, 남자들의 역사라고도 볼 수 있는 음악 계보를 해체하며 즐거워하는 에리카에게서 페미니스트를 엿볼 수 있는 것일까.

이런 딸에게 병적일만큼 집착하는 어머니는 에리카의 귀가 시간과 의상까지 통제한다. 얼핏 보아서도 에리카와 어머니의 관계는 통상의 모녀관계 이상으로 보인다. 에리카는 아버지가 정신병원으로 가버리자 그 자리를 대신했으며 어머니는 이런 딸에게 퇴장한 남편의 역할까지 요구하고 있다. 어머니는 에리카를 자신의 둥지에 영원히 종속시키기 위해 다른 어떤 사회적 관계도 허용할 수 없다. 친구 하나 없는 에리카 역시 이런 관계에 잘 길들여져 있다고 볼 수 있다. 타인과의 거리두기와 부정하기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낼 수밖에 없는 존재로 자란 것이다. 이런 어머니와 에리카에게 클레머가 등장하면서 모든 것이 흔들린다. 음악원 제자인 이 연하의 남자는 도도한 에리카를 굴복시켜서 이후 자신의 여성 편력의 연습 대상 정도로 삼으려는 생각으로 접근했다. 그러나 클레머의 기대와는 달리 에리카는 통상의 남녀관계를 거부하고 급기야 사랑에 있어서 남성의 지배를 거부하기 위해 편지로 자신의 성적 요구를 전달한다. 평생 사랑하는 법을 몰랐기 때문에 통상의 관계를 거부할 줄 알았지만 결국 부드럽게 사랑해 줄 것을 기대한 에리카에게 돌아온 것은 클레머의 폭력이었다. 복수하기 위해 칼을 가방 속에 숨겨 들고 가지만 그녀는 자신의 어깨를 찌르는 것과 다시 어머니가 있는 집으로 되돌아가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피아노 치는 여자』는 미카엘 하네케 감독에 의해 2001년 〈La Pianiste〉란 제목의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슈베르트의 피아노3중주가 몹시 인상적이었던 영화는 원작을 아주 짜임새 있게 잘 표현했다. 영화의 인상이 너무 강렬했기 때문에 원작을 읽어보고 싶다는 바람이 생겼다. 그러나 책을 구하는 것만큼이나 읽기가 쉽지 않았다. 문장을 읽어내는 내 능력의 한계를 느낄 만큼 작가의 문체(물론 번역된 문체이긴 하지만)가 어려웠다. 어쩌면 이것은 문체의 문제만은 아닐 것이다. 작가가 표현하고자 했던 주제가 워낙 논쟁적인 탓도 있으리라. 어머니와 딸과의 관계, 남성과 여성의 관계 혹은 지배와 복종의 관계, 자아와 세계와의 관계, 그리고 표면적으로는 음악과 삶과의 관계 -이 모든 것을 담아내는 그릇으로서 가지는 무게로 본다면 말이다. 옐리네크가 의식적으로 사회에서 규정하는 여성의 성을 끝없이 조롱하고 관계의 폭력성을 가차없이 폭로하는 방식으로 이와 같은 쉽지 않은 문장을 택한 것이라고 섣불리 단정해 본다.

피아노 연주자는 220개를 전후한 검고 흰 건반들과 검은 벽 앞의 청중을 등지고 앉는다. 이 경우 청중은 기껏해야 후면이나 측면의 배경이 될 뿐이다. 그래서 피아노 치는 사람은 고독하다. 자신의 손가락과 악보, 희고 검은 건반과 검은 벽만이 존재한다. 연주회는 외면에 치중하는‘광대놀음’이며 ,“예술가는 오직 고독 속에서만 일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32세의 나이에 완전히 무대를 떠나버린 글렌 굴드에게 가장 잘 어울렸던 악기, 피아노- 이제 이 피아노라는 악기 자체가 갖는 고립성이 피아노 치는 여자 에리카 코후트라는 인물의 그것과 어떻게 절묘하게 맞아 떨어지는지 감상하는 일만 남았다.

이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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