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4년 07월 2004-07-01   2166

히틀러와 박정희의 고속도로 건설 신화 깨기

독재자들은 뽐내기를 좋아하는 ‘과시병 환자’들이다. 그들은 피라미드나 자금성 같은 거대한 기념비적인 건축을 통하여 자신의 업적과 위대함을 드러내고 싶어했다. 물론 대규모 기념물은 독재 정치를 정당화시켜주기 위한 상징장치의 역할도 톡톡히 해냈다.

그런데 독재자들의 이러한 과시행위가 ‘신화’가 되어 일상생활 속에 깊숙이 침투하여 생생하게 살아남는 경우가 많다. 그 중에서 히틀러의 ‘아우토반(Autobahn) 건설’과 ‘국민차 계획(Volkswagen-Projekt)’이나 박정희의 ‘고속도로 건설’과 ‘경제개발 5개년 계획’도 신화가 된 거짓 역사라고 할 수 있다.

나치의 침략전쟁과 테러, 인종학살을 경험한 독일인들 중에서 히틀러가 처음으로 아우토반 건설 아이디어를 생각해내고 실행하여 실업을 해소하고 2차 대전 이후 독일 근대화의 밑바탕이 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아직까지도 많다고 한다.

한국 사람들 중에서도 군부와 중앙정보부를 앞세운 고문과 인권탄압으로 악명 높은 박정희가 고속도로 건설과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아이디어를 처음 생각해내고 실행하여 고도성장과 근대화에 이바지했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히틀러와 박정희의 업적으로 칭송되는 이러한 신화들은 결코 사실이 아니다.

독일에서 최초로 고속도로 건설을 계획한 것은 1909년 프로이센의 하인리히 왕자와 몇몇 사업가들이었다. 이 계획은 제1차 세계대전으로 실행되지 못하다가 1921년 9월에 처음으로 짧은 구간의 자동차 전용도로(Nur-Autostra e)를 건설했다. 그 후 민간경제인을 중심으로 한 민간단체들에 의해 아우토반 건설이 추진되었으나 재정적인 문제로 실행되지 못하다가 나치집권 이전인 1932년에 최초의 아우토반이 완공되었다. 히틀러는 집권 후 ‘아우토반 건설과 국민차 생산’을 통한 경제개발이라는 선전을 했지만 실업문제 해결, 군사적 목적, 경제성 등 어느 측면에서도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한국에서는 파쇼독재자 박정희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 열중하면서 ‘조국 근대화’에 앞장서던 중에 1964년 12월 6일 독일의 대통령 뤼브케의 초청을 받고 서독을 방문해서 ‘아우토반’을 주행해보고 돌아와 직접 연구하여 고안한 것이 고속도로 건설의 첫 단추라는 신화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경제개발계획은 사실 이승만 정권 당시 산업개발위원회의 미국 유학파 관료들이 입안한 정책을 제2공화국 장면 정권이 실시하겠다고 발표했다가 미국이 원조금을 지원해주지 않아서 실행하지 못했다. 고속도로 건설도 이승만 정권시기인 1950년대 중반에 도로기술공무원들이 미국에 연수시찰을 가서 자동차 전용도로를 둘러보고 온 이후부터 추진되었다.

‘공화국은 가도 행정은 남는다’는 말처럼 고속도로 건설이나 경제개발계획은 행정수도이전계획처럼 행정의 연속일 뿐이었다.

결국 히틀러의 아우토반 건설과 국민차 생산 신화와 박정희의 고속도로 건설과 경제개발5개년계획 신화는 그들 독재자들의 업적이 아니라 그 전 시대에 역사의 연속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인류역사에서 기술진보와 경제발전은 독재자들의 ‘영웅적인 신화’와 무관하게 쉬지 않고 계속되어 왔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했던 ‘로마가도’가 식민지 민중들의 학살과 전쟁을 통하여 이루어졌듯이 ‘아우토반’과 ‘고속도로’의 건설 또한 터무니없이 낮았던 저임금과 살인적이고 야만적으로 높았던 노동 강도로 고통을 받았던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 속에서 이루어졌음을 잊지 말자.

박상표 수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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