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4년 01월 2004-01-01   1394

[박영선이 만난 아름다운 사람] 참여연대 공동대표 최영도 변호사

“혼란한 사회의 ‘키잡이’가 됩시다”


신년호에서 만날 사람을 결정하는 데 고민은 필요없었다. 참여연대 대표와 회원들의 만남만큼 자연스러운 건 없으니까. 하지만 지난해 12월 11일 인터뷰를 위해 사당동에 있는 최영도 대표의 변호사 사무실로 찾아가는 동안 마음이 평온했던 것은 아니다. 매주 상임집행위가 열리는 월요일 아침 7시30분이면 어김없이 미리 와 혼자 회의실을 지키고 있던 부지런한 모습, 전화할 때마다 느꼈던 단정하고 간결한 말투, 한국 사람은 한 번도 들어가 본 적이 없다는 돈황 막고굴을 찾아가서 여행기를 써낸 이력, 토기 수집에서 보여주던 열의와 심미안, 이 모든 모습에서 한 치의 빈틈도 없는 엄격함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인터뷰어로서 감당하기 어려운 상대일 것 같은 예감은 적중했다. “참여연대가 총회준비로 바쁘다며 허둥거릴 때인 2002년 3월에 대표로 취임하셨는데, 벌써 2년이 다 돼간다”며 말을 꺼냈더니, 바로 정정이 들어온다. “3월이 아니고 2월입니다.” “ …. ”

최영도 대표는 그런 사람이다. 얼마 전 위암수술을 받고 투병생활을 하고 계시던 터라 건강에 대한 질문부터 시작했다.

문화 심미안을 가진 사람

박영선(이하 박) 요즘은 활동하시기 좀 어떠세요? 몸은 어느 정도 회복되셨어요?

최영도(이하 최) 염려해준 덕분에 많이 좋아졌어요. 그래도 이제부터 진짜 조심해야지요. 대개는 수술 받고 5년은 무사히 지나야 완치 선언을 받을 수 있거든요. 재발하지 않도록 의사들이 시키는 대로 하려고 합니다. 가급적이면 스트레스 받거나 두뇌 쓰는 일은 피하려고 하는데, 쉽지는 않네요.

박 대표님의 건강상황을 알면서도 신년 인터뷰에 굳이 모신 이유는 지금껏 대표님이 회원들에게 한 번도 제대로 소개된 적이 없었던 것 같아, 대표님의 다양한 면모를 알리는 자리를 만들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회원들 대부분은 대표님을 인권운동가, 법조인 정도로만 알고 있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대표님이 쓰신 여행기 같은 책을 보면 놀라는 게 당연하죠. 그래서 이참에 대표님의 ‘정체(ㅎㅎ)’를 낱낱이 밝혀보려고 합니다. 말 나온 김에 여행기 이야기부터 해 볼까요? 대표님이 집필하신 『앙코르, 티베트, 돈황』을 두고 누군가 ‘탄탄한 역사기행서’ 라고 평가하던데요. 거의 학술서적 수준이라고요. 여행기를 이렇게 꼼꼼하게 자료 조사해 쓰신 이유라도 있으신가요?

최 초등학교 때부터 가장 흥미 있어 했고, 잘했던 과목이 바로 세계역사.지리였어요. 세계 인문지리에 대한 책도 많이 읽었고요. 십대 시절, 책에서 보고 상상만 했던 풍경을 직접 봤으니 얼마나 감격했겠어요. 제 성격 때문인지 가기 전에 공부를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 감격을 단순히 감상 전달에 그치지 않고 정확한 사실을 토대로 알리고 싶었어요. 그렇게 시작하게 된 거죠.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다 보니 이제 여행에 대한 조언을 해 달라는 말도 듣게 되는데, 그 땐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총론 여행은 그만하고 각론 여행을 해라.”

박 여행만이 아니잖아요. 대표님은 20년 동안 토기를 수집해서 국립중앙박물관에다 기증까지 하셨는데요. 토기에 대한 대표님의 관심은 이미 알만한 사람은 다 알 정도니까요. 요즘은 ‘토기이야기’란 글까지 쓰신다면서요? 글 쓰는 것도 꽤 힘든 일인데, 괜찮으신지요?

최 아. 그거요? 벌써 다 마무리했어요. 한 출판사에서 한번 써보라고 해서 준비한 건데, 그런 종류의 일은 제가 즐겨 하는 일이니까 스트레스는 전혀 받지 않지요.

박 토기에 대한 관심은 어디에서 시작된 건가요? 어느 기사에서 보니까 아버님께서 미술전시회에 꼭 데리고 다니셨다고 하던데, 대표님의 문화적 심미안을 아버님께 물려받았다고 봐도 될까요?

최 아마 그럴 겁니다. 아버님께서 제일 즐기시던 것이 한시였는데, 미술 쪽에도 관심이 많으셨어요. 초등학교 5학년 때였던 것 같아요. 국전이 처음 열리던 해였는데, 우리 6남매 손목을 잡고 전시회에 가셔서 그림 하나하나를 설명해주셨던 기억이 나요. 아버님은 한마디로 멋을 아는 분이셨습니다. 전통 한옥을 손수 지으신 후 백단향을 피우며 당시를 읽곤 하셨을 정도니까요.

인생의 스승, 아버지

박 대표님을 여러 가지 모습으로 규정할 수 있지만 문화적인 면에서는 애호가의 수준을 넘어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르신 것처럼 보이는데, 인문학을 하셨어도 좋았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법대에 입학한 특별한 동기가 있었는지요?

최 그냥 진학할 때가 되니까 주위 친구들을 따라 “법대 가보자” 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정작 아버님께서 못 마땅해 하시는 거예요. “판검사나 되려거든 법대 가지 마라”고 하시더군요. 아버지는 일제시대 때 사상범으로 체포돼 혹독한 고문을 받고 죽기 직전에 석방되신 분이거든요. 이승만 독재정권을 몹시 싫어하셨죠. 성품이 강직하신 데다 반관료적이셨기 때문에 우리 형제들을 모두 공립학교가 아닌 사립학교에 보내실 정도였죠. 결국엔 법학을 학문으로 하는 법학자가 되라는 조건을 달아서 법대 진학을 허락하셨어요. 반면 저는 고등고시를 치면 판.검사가 된다는 것도 모른 채 법대를 지원할 정도로 바보였어요. 참. (웃음)

박 아버님의 정신세계가 대표님께 많은 영향을 끼쳤다는 생각이 드네요.

최 이런 일도 있었어요. 87년 6월, 아주 힘든 모습으로 앉아 계시기에 이유를 여쭸더니, 여든 둘의 연세에 글쎄 “아유, 이제 데모도 못하겠다” 그러시는 거예요. 일제 때 받은 고문 후유증 때문에 지팡이를 짚고 다니셨는데, 그 몸으로 경찰을 피해 하루 종일 학생들과 데모하느라 돌아다니시다 보니까 기운이 다 빠져 버린 거죠. 그 해가 우리 애가 대학 신입생이 됐을 땐데, 이 애도 매일 데모로 온몸에 최루탄 범벅이 되어서 돌아오고, 나도 ‘민변(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활동을 하게 되면서 최루탄 범벅이 되어 들어오고…. 3대가 데모했다는 내용의 기사가 한 일간지 전면에 실린 적도 있었지요.

박 ‘사법권침해사례’를 직접 기초하셨지요?

최 예, 초안을 아직도 가지고 있어요. 71년 사법파동이 있을 당시 ‘사법권침해사례’를 적어 제출했는데, 73년 3월 유신헌법 통과 후 대통령이 법관 임명권을 쥐고 흔들면서 법관 재임명 과정에서 국가관이 없는 판사는 필요 없다며 쫓아내더군요.

박 86년 정법회를 결성하신 이후 88년 청년법조회와 함께 민변을 창립하셨는데, 아무래도 몸으로 직접 부딪히는 운동가로서의 삶은 이때부터가 아닌가 싶은데요.

최 그렇죠.

자기혁신 위해 끊임없이 긴장해야

박 참여연대 대표직을 수락할 때는 어떤 마음이셨나요?

최 박원순 변호사와는 정법회와 민변 시절부터 같이 일했던 인연이 있었는데, 어느 날 박 변호사가 한 번 만나자고 하더군요. 대표직을 맡길 줄은 전혀 몰랐죠. 처음엔 거절했지만 고미술협회 때문에 오랜 인연을 맺어 온 이상희 선생과 함께 공동대표를 맡으라고 해 수락하게 되었지요.

박 그 소식을 접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좋아했던 생각이 납니다. 참여연대 운동이 아무래도 법률을 바탕으로 하는 운동인데다 인권의 지평을 계속 넓히려고 하고 있으니까, 그런 면에서 대표님을 따라 갈 사람이 없으니까요.

최 2002년 총회 때 인사를 하면서 이런 얘기를 했어요. ‘밖에서 참여연대를 지켜보면서 어떻게 저렇게 자발적이고 헌신적으로 할 수 있을까, 흐뭇한 마음으로 지금까지 지켜봤습니다. 이제 저를 불러 함께 일하게 해주셔서 고맙고, 절망스러운 사회현실이지만 참여연대를 통해서 희망을 찾을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저는 참 자랑스럽습니다’라고요.

박 대표님께서 민변 회장을 맡고 계실 때 형식적인 직책을 벗어 던지고 직접 일을 챙기실 정도로 아주 엄격하셨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는데요. 그 때의 기준으로 현재 참여연대 활동을 평가하신다면, 어떠신가요?

최 작년에는 제가 몸이 안 좋아 별다른 기여를 하지 못해 미안할 따름입니다. 대표직을 내놓겠다고 했는데 받아들여지지 않았고요. 그런 처지에 헌신적으로 일하고 있는 간사들에게 제가 뭐라고 말하겠어요? 다만 한 가지, 이런 건 있는 거 같아요. 시민단체의 공신력 등에 대한 설문조사를 보면 모든 면에서 참여연대가 월등하게 높더군요. 그런 결과를 보고 참여연대가, 시민운동이 권력화 되간다고 말들 하죠. 비방을 위한 비방에 우리가 매번 대꾸할 필요는 없겠지만, 그런 비방 때문에 잘 모르는 시민들에게 오해를 사게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는 있어요. 따라서 단체의 영향력이 커질수록 우리는 자기혁신뿐 아니라 민주적이고 공평한 운동방식 정립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박 맞습니다. 참여연대 내부에서 긴장을 늦추지 않는 게 필요한 거 같습니다. 참여연대 초기 자료를 보니까, 스스로의 활동을 계속 객관화하려는 노력을 끊임없이 해야 한다는 구절이 있더군요. 참여연대 사람들 모두에게 스스로 긴장하는 전통이 살아 있다면 많은 문제점이 있더라도, 헤쳐 나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최 물론입니다. 그것만 잃지 않으면 된다고 봅니다.

혼란할수록 중심을 잡아주는 운동 필요

박 지금 참여연대 대표로서 시민운동의 모든 분야에 관여를 하시고 계시지만, 그 중에서도 사법개혁 분야나 인권 분야에 가장 관심이 많으실 것 같습니다. 사법이나 인권 분야에서 시급하게 추진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것은 무엇인지요?

최 전 국민이 통합되지 못하고 갈라져서 싸우는 남남갈등의 주범이 바로 국가보안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얼마 전 송두율교수사건 때도 국가보안법만 없었다면 진보와 보수 간의 갈등이 그렇게까지 심하진 않았을 겁니다. 98년 11월 1일 국회 앞에서 국가보안법 장사를 지냈는데도, 이놈이 죽지를 않고 오늘도 맹위를 떨치고 있으니 큰일이죠. 또 국가보안법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92년 제네바 인권이사회에서 한국정부가 제출한 인권보고서에 대해 18개국 위원들이 ‘세상에 이런 악법이 어디 있냐’며 한 목소리로 비판했던 때가 생각나요. 국가보안법으로 사형에 처할 수 있는 범죄가 46개나 됩니다. 일반 국민들은 국가보안법이 본인하고는 아무런 상관없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법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하지만 아닙니다. 더군다나 노무현 정권이 인권에 역행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지요. 아주 안타깝습니다. 소수 정권이고, 국회에서 힘 못쓰는 정권이라는 한계도 있지만, 대통령이나 그 주변 참모들이 좀더 확고한 의지를 갖고 정책을 추진한다면 적어도 테러 방지법이나 집시법 개악 같은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박 오늘 법안심사소위에서 통과되었다고 하던데요. 명색이 인권변호사라는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는데도, 유감스럽기 그지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새해를 맞는 참여연대 회원여러분과 상근자들에게 한 말씀 해 주세요.

최 새해는 더욱더 건강하시고 복된 해가 되셨으면 합니다. 대선자금 수사, 대통령 측근 비리 특검 등을 비롯해 내년 총선까지 정치상황이 매우 혼란할 걸로 보이는데, 그럴 때일수록 사회의 중심을 잡는 운동이 필요할 것 같아요. 지금까지 정치, 경제, 사회 여러 분야에서 열심히 잘 해왔지만, 내년에는 좀더 심기일전하여 열심히 해보자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박영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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