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4년 04월 2004-04-01   1524

[박영선이 만난 아름다운 사람] 이선종 참여연대 신임 대표

더불어 함꼐 사는 것이 중요하지요


지난 3월 13일 참여연대 총회에서 원불교 이선종 교무가 신임 대표로 선출됐다. 이선종 교무는 대표직을 맡기 전부터 참여연대와는 임원으로 오랫동안 인연을 맺어왔다. 늘 안 보이는 곳에서 참여연대의 든든한 버팀목이 돼 주었던 그는 앞에 나서는 대신 가장 먼저 ‘뒤’가 되길 자처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를, 그동안 여성 대표를 고대해왔던 참여연대가 억지로 앞으로 끌어냈다.

따사로운 봄 햇살이 평화스럽기만 하던 지난 3월 중순, 원서동에 있는 원불교 특별교구 사무실에서 새 공동대표를 만났다. 봄기운이 아직 마당 깊은 곳까지는 다다르지 못했지만, 이 대표가 생활하는 공간은 봄이 주는 화사함으로 가득했다. 시국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종교에서 사회개혁의 길을 찾다

까만 한복을 입고 머리를 단정하게 쪽찐 이선종 교무의 첫 인상은 ‘빈틈없음’ 그 자체였다. 엄숙한 종교인의 표상이랄까? 하지만 심한 감기 때문에 코맹맹이 소리를 내는 필자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미국에서 후배가 보내왔다는 특효약(?)을 내놓는 모습에서, 엄숙한 종교인의 인상은 이내 세상 무엇보다도 사람 아끼기를 우선하는 넉넉한 성정의 인간 이선종으로 바뀌고 있었다.

원불교 얘기부터 시작했다. 평소 이선종 교무의 목소리는 톤이 높고 말하는 속도도 빨랐지만, 담담하게 어린 시절을 회고할 때는 낮고 잠잠했다.

원광대에서 원불교학을 전공하셨던데, 공부하시면서 관심을 갖게 되셨는지요? 아님 원불교와 특별한 인연이 있으셨나요?

“저희 집이 원래 원불교 집안이었어요. 집안 분위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신앙생활에 젖어 들었죠. 그 후 제가 고등학교에 진학할 무렵 큰 수술을 받은 적이 있는데, 그때 원불교의 높은 어른이 집에 와 계셨어요. 그분이 넌 커서 뭐가 될 거냐 하시길래, 결혼 안 하고 여성들을 위해서 훌륭한 일을 하고 싶다고 대답했던 기억이 나네요. 그런데 그 당시는 결혼을 하건 안 하건 여성이 사회활동을 한다는 것 자체가 어려웠잖아요. 그래서 출가를 하고 원불교에 대해 깊이 공부하게 되었지요. 전문적으로 공부를 하다보니 원불교 법이 참 좋았어요. 우리 사회에서 종교의 역할이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이 나오더라고요. 또 종교라는 큰 사상을 통해 참된 뜻을 폈을 때 그 영향력은 어떤 전문지식을 통한 것보다 더 크다는 생각을 했어요. 지금 생각해도 원불교에 귀의한 건 현명한 판단이었다고 생각해요.”

주변 분들은 교무님을 ‘여장부’라고 표현하기도 하던데요. 종교라는 틀 속에 갇히지 않고 다양한 방법으로 적극적인 사회참여를 하시기 때문인 듯합니다. 사회참여에 관심을 가지시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으신가요?

“시골이었지만, 저희 집안이 좀 넉넉했습니다. 하지만 우물물부터 뭐든지 혼자 먹었던 적이 없었습니다. 덕이 많으신 어머님 성품 덕택에 이웃과 나누는 게 아주 익숙했습니다. 아버님도 지역 사회활동을 하셨고, 이종오빠 되는 분은 소설 『상록수』의 주인공처럼 농민운동을 하시기도 했고요. 이런 주변 환경 때문에 막연하지만 저도 커서 사회활동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대학 졸업 후 서울에 올라와서부터는 유네스코며 흥사단, YMCA 등에서 어른들을 따라다니면서 많이 배웠지요. 비록 제가 종교에 몸담고 있는 입장이었지만 남강 이승훈, 도산 안창호, 김규식 선생님 등의 사회의식에 대해 관심을 갖고 끊임없이 공부했습니다. 원불교인의 신분으로 사회성을 띈 단체에 드나든다고 교단에서 지탄도 많이 받았죠. 하지만 개의치 않고 더 적극적으로 했어요. 그래선지 원불교 내에서는 지금도 저를 ‘야당’이라고 부른답니다. 20대에는 청년운동에, 30대에는 일선 현장활동에 힘을 쏟으면서 교단에서도 어느 정도 위치에 올랐어요. 그러다가 몸이 너무 아파서 여수로 내려갔을 때는, 거기서 지역사회활동을 열심히 했습니다. 기관장들이 저희 교당을 자기 집처럼 알고 드나들 정도였지요.”

남녀는 ‘차별’이 아닌 ‘구별’

참여연대의 오랜 숙원이 여성 대표를 모시는 것이었는데, 드디어 교무님을 모실 수 있어서 모두들 너무 기뻐하고 있습니다. 참여연대가 여성대표를 모시는 건 단순히 대표단의 성비를 맞춘다 걸 의미하는 게 아니니까요. 여성으로서 교무님의 어린 시절은 어땠나요?

“항상 학교에서 일등은 제가 도맡아서 했는데, 반장만큼은 남자를 시키더라고요. 화가 나서 선생님한테 따졌던 기억이 있어요. 저희 집은 딸만 여섯이에요. 명절 때 친척들이 다 모여 제사를 지내도 저희는 끼지 못했죠. 그래서 한 번은 자고 있는 동생들을 모두 깨운 후, 우리끼리만 먼저 제사 지내자고 아버지를 조르기도 했어요. 같은 자식인데도 딸들만 제사를 못 지낸다는 사실이 어린 꼬마였지만 불만이었던 것 같아요. 남녀는 구별이지 차별이 아니잖아요.”

일반 사람들이 볼 때 남녀차별이 가장 적은 곳이 종교인 것 같지만, 실상은 종교 내부에서도 완강한 차별이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삼소회(원불교, 불교, 천주교의 여성성직자 모임)와 같은 종교별 여성성직자 모임이 구성되어 있는 것도 이런 차별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인 동시에, 그 자체가 차별적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라 볼 수도 있고요. 교무님의 경우는 어땠나요?

“원불교 교리에서는 남성과 여성이 동등해요. 문제는 법이 남녀가 평등하다고 아무리 이야기해도 법을 수용하고 활용하는 주체가 그렇질 못해요. 차별의 당사자들인 여성들도 마찬가지에요. 사회는 우리에게 비뚤어진 여성성을 원합니다. 얼굴이 예쁘다든지, 남자들한테 서비스를 잘한다든지 하는 것들 말예요. 그런 것들은 지도자의 자질과는 아무 상관이 없잖아요. 한 종교의 지도자로서, 교육자로서 여성교무가 필요한 자질을 갖출 수 있도록 하기보다는, 그 왜곡된 여성성이란 것에 자꾸 신경쓰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분위기가 분명 있어요. 그걸 깨 나가기가 굉장히 힘들었어요.”

환경운동은 보은의 길

지금은 주로 환경과 관련된 사회활동을 하고 계시지요. 천지보은회 상임대표도 맡고 계시고요.

“원불교에 ‘은(恩)사상’이란 게 있어요. 진리의 내용, 신앙적 측면을 사은(四恩)으로 풀어낸 것인데, 천지, 부모, 동포, 그리고 법률을 네 가지 은혜라고 봅니다. 원불교 원리로 보면 환경운동을 하는 게 천지에 보은하는 것이 되니까 자연스럽지요. 원불교 교단 내에서는 환경운동을 일찌감치 시작했어요. 2000년부터는 천지보은회를 만들어서 본격적으로 활동하게 되었고요.”

지난 2월에는 영국에서 람사협약 등록 습지보호구역인 스네티시엄에서 삼보일배 순례를 하고 오셨다고 들었어요. 생명평화 탁발순례를 시작하시는 도법스님과 수경스님을 위한 기도회 자리에서 하신 말씀이 세간에 화제가 되기도 했고요.

“도법, 수경 스님은 이 세상 하나뿐인 목숨을 던질 만큼 이 땅의 생명 살리기가 절실하다는 걸 온몸으로 표현하고 있는 분들이에요. 도법, 수경스님과 같이 영국에 가서 삼보일배를 하니까 그곳 사람들은 시범으로 해보는 것만도 너무 아픈데, 새만금 살리기 삼보일배 때 어떻게 65일이라는 긴 시간 동안 그렇게 할 수 있었냐며, 너무 거룩한 일이라고 감격해 하더군요. 이번 생명평화 탁발순례도 삼보일배의 그 순교자적 정신을 그대로 이은 거예요. 그건 누구에게 보여주려고 하는 게 아니죠. 내가 죽어서 다시 돌아오지 못하더라도 후회하지 않겠다는, 마치 유언 같은 말을 남기고 성직자들이 나선 거예요. 불교라는 종교 밖으로 나와서 시대의 문제를 함께 고민하고 풀어나가려 몸부림치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녜요. 그런 의미에서 저도 도법스님, 수경스님의 생각과 고민이 같기에 비록 전혀 다른 환경에서 살고 있지만 그분들에게 좋은 일이 있으면 저도 기쁘고, 힘든 일이 있으면 저도 눈물이 나고 돕고 싶고 그래요. 피를 나누진 않았지만 짧은 인생에 같은 가치를 품은 이라면 그는 형제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눈물이 그렇게 나요.”

앞으로 참여연대 공동대표로서, 여성대표로서 만나시게 될 참여연대 회원들께 마지막으로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우리 사회 대부분의 단체들이 시작할 때는 목소리도 크죠. 하지만 세월이 갈수록 힘이 좀 약해져요. 겉과 속이 다른 경우도 있고요. 시민단체도 조직인지라 때로는 삐걱거리고 갈등이 생길 때도 있을 거예요. 하지만 참여연대만큼은 각자의 자리에서 먼저 충실한 자기혁신으로 든든하게 무장하고, 이를 바탕으로 성숙한 사회 만들기에 기여하는 모범적인 단체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저 스스로 참여연대에 왜 애정이 있을까 자문해 보면 그 공신력 때문인 것 같습니다. 공신력이란 바깥에서 알아줘서 생기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자기 스스로에 대한 신뢰를 통해 생긴다고 봐요. 참여연대를 이끄는 공신력은 참여연대 가족들의 나라살림에 대한 주인정신에 있다고 생각해요. 앞으로도 주인으로서 헌신하고, 실천하며, 봉사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이선종 교무는 스스로 인생의 나이를 ‘가을’이라고 했다. 또 미운 일도, 잘못한 일도 이젠 모두 보자기로 싸야 할 나이라고도 했다. 인터뷰는 끝났다. 동행한 사진작가가 사진 한 장만 더 찍자고 했다. 카메라 조명을 쳐다봐 달라는 작가의 요청에 이 교무는 “뭐가 조명이에요”라며 짐짓 딴전을 부렸다. 그 사이 언뜻 비치는 그의 웃음. 그 웃음으로 읽는 이 교무의 나이는 분명, ‘이제 겨우 봄’이다.

박영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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