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4년 05월 2004-04-04   1665

[인터뷰] 탄핵반대 촛불집회 사회자, 배우 권해효 씨

“광장에 모인 사람들이 무대를 이끌어간 거예요”

지난 토요일 뭔가 허전하지 않던가. 초 한자루 들고 광장을 향해야 비로소 토요일 저녁인 것 같은 이들이 많았을 것이다. 대규모 촛불집회 일정이 없는 토요일이 누구보다 허전할 이는 권해효 씨 아닐까. 그는 3월 12일 탄핵안 가결 후 있던 4번의 촛불시위 중 14일 일요일을 제외하고 3번의 토요일 저녁을 광화문에서 보냈으니 말이다. 그것도 수십만명 군중 앞에 선 사회자로.

“수고 많으셨죠? 정신 없으셨죠? 사무실은 아예 시장 돗대기판이죠?”

이런, 고생 많았다는 인사를 그가 먼저 해버린다. 햇살좋은 오후, 서울 대학로의 한 카페에 들어서는 그는 여전히 활기차다. 촛불집회에 참가한 시민들 모두가 팬이 되었을 거라고 전하자 웃음을 터뜨리며 손을 젓는다.

“최광기 씨가 스타죠. 그 친구가 워낙 잘해요. 집회나 행사의 성격과 인적구성, 안팍의 환경과 기후 그리고 참석자들의 몸 상태까지 한번에 파악하는 능력이 있어요. 우리의 기를 정말 선동적으로 자극하잖아요.(웃음). 저는 사회 잘 봤다 이런 생각하면 3번 다 못나갔을 거예요.”

최광기씨는 인터뷰를 통해 가장 호흡이 잘 맞는 파트너로 그를 꼽았다. 그 이야기를 전하자 그는 카페가 떠나도록 웃음을 터뜨리고는 사실 사회자가 되는 일은 맞지 않는 옷을 입는 것처럼 어색하다고 털어놓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대에 설 수 있는 힘은 무엇일까.

“어색하고 불편하다고 마다할 일은 아닌 것 같아서요. 광장에 있는 시민들과 마찬가지죠. 뭐. 길거리에 나와 앉아 있을때 불편한 것으로 치면 못 앉아있죠. 사회봤다고 생각하지 않고 시위에 참여했다고 생각해요. 사실 사회를 볼 줄도 모르고 정말 불편하죠. 제가 못하는거니까 미치겠어요. 그런데 잘 못해서 못하겠습니다라고 말을 하기가 진짜 미안해요. 왜냐면 탄핵반대도 그렇고 파병반대도 전문 집회꾼이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형식이 중요한게 아니라 뜻 하나 모으는게 중요하니까 그냥 가서 저도 힘을 하나 보태는거죠.”

성숙한 거리집회 문화와 함께 수십만개의 촛불이 만들어내던 장관도 화제가 되었다. 무대에서 보는 촛불의 바다가 어땠을까.

“그림이 좋죠.(웃음). 다들 위에서 볼 기회는 없을테고 그 다음날 신문에 실린 사진을 보면서, 아 우리가 저 안에 있었구나 생각하며 뭉클했을거예요. 그런데 위에서 보면 정말 말이 안나올 정도로 멋있었죠.”

사회자로 참여한 3번의 촛불집회 중 가장 인상적인 것은 역시 첫 촛불집회.

“제게는 13일 집회가 가장 뜨거웠던 것 같아요. 12일 황당한 꼴을 보고 무작정 국회 앞으로 모여든 사람들, 그리고 12일에는 참여하지 못했던 분들이 13일에 모였잖아요. 그날 오전에 550여개 시민사회단체가 급히 모였고, 뭐하나 제대로 홍보될 겨를도 없이 무대도 사람들도 급조된 상태로 진행된 집회에서 사람들은 오후 5-6시부터 밤 11시가 넘도록 자리를 뜨지 않고 거리에서 탄핵무효를 외쳤어요. 그날은 스피커도 제대로 준비되지 못해 뒤쪽은 전혀 들리지도 않았거든요. 안치환이 누가 나왔는지 들리지도 않는데도 앞에서 ‘와’하면 같이 ‘와’ 외치고 그랬는데도 대부분의 시민들이 끝까지 앉아 있었어요. 저랑 광기씨도 뛰어올라가다시피 올라갔어요. 프로그램도 없었고 무엇을 해야할지도 몰랐죠. 그때그때 쪽지로 이 사람 한다 하면 알려주고 했죠. 그게 좋았어요.”

촛불집회에서 한가지 아쉬운 점은 선관위와 검경의 불법집회와 선거법 위반 시비.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이번 총선에서 투표하겠다고 나서는 상황에 오히려감사해야할 선관위가 왜 선거법 위반이라며 자발적 정치표현을 가로막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

“선거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애매한 조항으로 촛불집회가 불법이니 시비걸지 말고 이번 총선에서 처음 도입되는 1인2표제에 대한 홍보나 제대로 하라고 하고 싶어요. 홍보가 안되서 사람들이 거의 몰라요. 안다고 해도 이 후보 찍으면 당도 똑같이 찍어야한다고 아는 사람들이 더 많구요. 자기 본연의 업무부터 열심히 했으면 좋겠어요. 탄핵을 주도한 야당들도 배후세력 운운하지 말고, 국민들의 생각과 분노를 제대로 알고 국민에게 다가가기 위한 총선전략을 세울 기회로 고맙게 받아들였어야죠.”

세상에 우연이란 없다. 그가 운동에 이렇게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된 무슨 계기가 있었을 것이다. 87년의 경험이 아닐까. 그러나 87년 그는 전혀 다른 공간에 있었다.

“군대에 있었어요. 일병이었죠. 직선제 개헌을 반대하면서 전두환이 4월 13일에 호헌조치를 하고 고뇌에 찬 결단이었다며 대국민담화문을 했잖아요. 잊을 수 없어요. 왜냐면 그때부터 한달 반 동안 정신교육으로 ‘4.13 호헌조치는 구국의 결단’이라는 시나리오를 외어야 했어요. 매일 점호 직전에요. 못 외우면 맞았죠. 4.13. 이후에 이한열이 죽고 거리에 사람들이 거리에 모이기 시작하자 군 대부분이 휴가 다 반납하고 시위대 진압훈련에 돌입했어요. 우리 부대는 휴가 고대 진입을 목표로 화염방사기까지 갖추고 산에 올라가 나무 다 잘라서 진압봉 만들고 전투모에 붙일 투석망 만들며 데모 진압하는 훈련만 받았죠.”

그래서 그에게는 87년 6월 항쟁에 대한 기억이 없다. 대신 다른 기억을 털어 놓았다.

“96년 아니면 97년일텐데. 민가협 어머님들이 하시는 1일 감옥체험에 참여한 적이 있어요. 명동성당 앞에서 아침 9시부터 저녁 6시까지 ‘독방’에 있는 일종의 퍼포먼스였죠. ‘옆방’에는 영화평론가 정성일 씨가 있었고 다른 쪽에는 어느 변호사가 있었고, 밖에서는 뜨기 전의 윤도현밴드가 노래를 하고 있었어요. 간수역할 맡은 사람들은 ‘죄수’들을 가만히 안 두더라구요. 똑바로 가부좌틀어 앉게 하고 잠도 못 자게 하더니만 급기야는 밖으로 불러내 쪼그려 뛰기를 시켰어요. 웃기잖아요. 화를 낼 수도 없고. 그런데 그 순간 보라색 수건을 두른 어머니들이 갑자기 간수들을 쥐어 뜯으면서 ‘내 새끼 괴롭히지 마라’하면서 막 우시는데… 참 황당하더라구요.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할지… 얼굴 한번 본 일 없고, 가짜 감방에 있다가 잠깐 나와 쇼를 하는건데, 가짜 간수의 가슴을 치면서 우시는게… 굉장히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어요.”

다 그때쯤이었다고 한다. 구로와 안산지역에서 노동자들이 잔업을 끝나고 연극반을 할때 돕고 지금은 21세가 청소년 열린단체 ‘희망’을 태동시킨 96-7년 청소년 여름캠프에서 연극교실에 참여하게 되며 서서히 변화되었다고 말한다.

“노동자들이 잔업 마치고 연극반이라고 뭔가 할때, 두세시간 같이 떠들고 연극에 대한 이야기하고… 1년에 한번 정도죠 뭐. 그런 것들이 좋았어요. 그런 일들이 조금씩 쌓였던 것 같아요.”

그렇게 권해효는 2004년 3월 거리에 있게 됐다. 이번 촛불집회를 보며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또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많은 이들은 87년 6월 항쟁으로 물꼬를 튼 한국사회의 민주주의가 완성되는 시점이 아니냐고 기대한다.

“처음에는 어떻게하면 이 행사를 잘 할까 그런 고민을 했었는데, 결국에는 무대 위에서 광장에 모인 사람들을 끌고 간게 아니었어요. 광장에 모인 사람들에 의해 무대가 주도됐고 끌려갔고 압도당했던 거죠. 무대 위의 몇몇이 끌어당길 수도 없었고, 그게 당연한 것 같아요.

촛불집회 현장에 있던 분들은 역사의 한 가운데 있던 분들이죠. 분명히 기억될 거예요. 집회 현장에서도 기억하자는 말을 많이 했는데, 많은 경우에는 기억하지 못하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기억할 일들을 제대로 교육받지 못하는 것 같아요. 잘 기억할 수 있게끔 되었으면 좋겠어요. 역사에 어떻게 기록될 지는 모르겠어요. 미완이든 완성이든 아니면 변화의 물꼬를 만들었다고 할지 4.15.총선이 지나야 표현이 결정될 수 있겠지요.”

이제 열흘 앞으로 다가온 4.15.총선이 만들어 낼 변화의 물꼬가 어떠할지 상상하며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국민들이 거리로 나올 일 없도록 정말로 똑바로 일할 17대 국회가 구성되는 총선이 되길 바란다는 희망도 공유했다.

함께 촛불을 밝혔던 수십만의 국민들은 총선을 통해 한국정치가 한걸음 도약하기를 염원하며 각자 삶의 공간에서 꿈을 이어가고 있다. 거리의 사회자였던 권해효도 어느새 배우로 돌아가 있다. 올 9월 그는 1년 만에 다시 연극무대에 설 계획으로 들떠있다. ‘아트’라는 작품에서 예술을 놓고 싸우는 세 남자 중 한 명이 되어 우리 앞에 다시 나타나겠다고 한다.

한 사람의 시민으로 ‘맞지 않는 옷처럼 어색하고 부끄럽지만 그저 거절하기가 미안해’ 사회자가 되었다고 하면서도 2004년 촛불바다에서 우리 모두를 즐겁고 행복하게 만들었던 권해효는 배우로서 우리에게 어떤 보따리들을 풀어 놓을까. 17대 총선 결과 못지않게 그의 활약이 기대된다.

최현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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