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4년 05월 2004-05-01   1252

[회원마당]<인터뷰> 목포 선종문 회원

“난 철도인이다, 평생토록”


일상을 벗어나 어디론가 떠나고 싶을 때면 으레 떠오르는 것 중 하나가 기차다. 아무런 생각 없이 창밖 풍경에 눈을 맡긴 채 획일적인 하루하루로부터 잠시 놓여났다는 해방감만으로 그저 기분 좋아지는 기차여행. 그렇다면 팍팍한 일상에 찌든 이들에게 편안한 위로가 되는 이 기차를 운전하는 사람의 삶은 어떨까? 그들에게도 기차는 위로와 휴식을 주는 존재일까? 열차 기관사로 일하는 목포 선종문 회원을 만나고 싶었던 것도 이런 궁금증 때문이다.

“내 자리, 철도기관사로 다시 돌아올 겁니다”

기관사를 ‘계절을 제일 먼저 알고, 계절을 느끼며 사는 직업’이라고 소개하는 선종문 회원. 하지만 그런 그도 올해만큼은 봄이 오는걸 기차 안에서 느낄 수 없었다. 운전을 못한지 벌써 반년이 넘는다.

작년 6월 28일, 전국철도노조는 정부가 철도 노동자 등 이해당자사와 합의를 거쳐 철도구조개혁관련법을 추진하기로 약속했던 4.20 합의를 지키지 않고 일방적으로 법 제정을 추진하자 파업에 돌입했고, 정부는 파업돌입 3시간만에 경찰력을 투입해 조합원을 강제 해산시켰다. 철도노동자들의 거센 반발은 전국곳곳에서 산개투쟁으로 이어졌고, 그 결과 8천여 명이 징계를 받고 90여 명이 파면을 당했다. 선종문 회원도 이때 해직됐다. 기차운전 경력 15년의 베테랑 기관사이자 철도노조 목포기관차 승무 지부장으로 활동하는 그. 하지만 그의 철도인생에서 어려움이 닥친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1994년에도 파업 때문에 다른 곳으로 전출됐다 기관사로 복귀했다고 한다. 견디기 쉽지 않은 경험일 텐데 그것도 두 번씩이나…. 지금의 생활이 힘들지 않은지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직까지는 견딜만합니다. 가장 미안한 건 가족입니다. 결혼하고 나서 장모님이 하신 말씀이 있어요. 딸자식 생과부 만들지 말라는 당부셨죠. 제가 노조활동을 처음 시작한 게 무엇 때문인지 아세요? 철도노동자에게는 휴일이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정해진 휴일이라는 게 없는 철도노동자는 가족들과 시간다운 시간을 갖기가 힘들어요. 제대로 가장 구실하며 가정을 꾸리고 싶어서 파업도 시작했는데…. 허허, 도리어 그게 해직으로 이어지니까 참 우습네요. 94년 전출됐다 복귀했을 때도 눈물을 쏟으며 아내와 했던 약속이 있습니다. 휴일이 보장되면 노조일 안 하겠다고요. 근데 아직도 근로조건이 안 변했어요. 저 지금도 휴일 보장되면 그만할 생각이랍니다. 허허.”

낙천적이어서일까, 그만큼 단련이 되어서일까. 철도노동자의 근로조건에서부터 민영화문제까지 철도산업의 구조적 문제를 날카롭게 지적하면서도, 그는 정작 본인의 어려움에 대해선 별 것 아닌 냥 흔연히 말하고 있었다. 결코 쉽지 않았을 싸움을 지속해올 수 있었던 것도 아마 그의 이런 초연함이 큰 힘이 되었으리라 생각했다. 해직으로 인한 당장의 경제적 곤란은 조합원들의 구호기금으로 해결하고 있다지만, 언제까지 이 상태로 지낼 순 없는 일이다. 복직 전망은 있는 건지 궁금했다.

“철도는 나의 평생직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다시 돌아와야 합니다. 조합원의 관심과 힘으로 돌아와야죠. 작년 파업 이후 현장이 가라앉아 있는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조합원들은 그간의 활동경험을 통해 힘과 저력을 쌓았다고 봅니다. 조합원장 선거에서도 철도청의 개입 등 방해가 많았지만 조합원들이 쉽게 넘어가지 않았어요. 결국엔 조합원들의 힘으로 철도노조를 지키고, 저도 복직될 거라 믿습니다.”

올 4월부터 개통된 고속철도가 이동시간의 단축을 가져온 반면, 높아진 요금만큼 고비용을 지출해야 하고 기존 열차의 질과 서비스가 상대적으로 하향화되고 있다는 우려가 높다. 이런 논란의 중심에는 철도가 갖는 공공성에 대한 입장차이가 존재한다. 철도의 공공성에 대한 그의 생각은 이랬다.

“철도는 이문나는 장사가 아닙니다. 그런데 정부나 국민은 이문을 내라고 합니다. 동시에 싼 요금을 원하고, 질 좋은 서비스도 원합니다. 공공성과 이익창출의 충돌이죠. 여기서 철도의 고질적인 문제가 시작됩니다. 이런 철도산업의 구조적 문제는 철도역사 105년간 계속돼 왔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상반된 두 가지 요구를 한꺼번에 충족시키려면 철도는 비정규직의 천국이 돼야 하고 노동자는 죽어야 합니다. 우리사회가 철도의 공공적 성격과 특성에 대한 이해를 전제로 철도문제를 바라봐야 합니다. 이 문제가 철도노동자만의 문제가 아니란 점도 함께 말입니다. 그나마 철도민영화를 부분적으로나마 막아내고 2005년 1월부터 철도발전관련법에 따라 철도공사가 출범하는 것은 다행입니다.”

100여 년의 철도역사를 설명하면서 철도가 향후 동북아시아 대륙 국가들과의 중요한 네트워크 기능을 담당하게 될 주요 기간산업임을 강조하는 그에게서 철도인의 자부심이 물씬 느껴진다. 그가 왜 다시 철도인으로 복귀해야 하는지 조금은 알 거 같았다.

동네아저씨처럼 친근한, 투사

해직생활이 힘든 반면, 개인적으론 여유시간도 늘고 그렇게 원하던 휴일(?)도 많을 텐데, 가족들과의 관계는 한결 여유로워졌을까.

“애가 두 명이에요. 큰 애는 초등학교 다니고 둘째는 6살인데 아이들은 제가 해직된 줄 모르죠. 아빠가 예전보다 자주 보이니까 그냥 좋아하죠. 조합일 등 특별한 일을 빼고는 집에서 보내는 편입니다. 걷는 걸 좋아해서 아내와 함께 유달산 일주도로를 걷곤 합니다. 전 목포가 좋아요. 목포에서 나서 지금껏 군대에 입대한 기간을 빼면 목포를 떠나본 적이 없는 목포인입니다. 고향이라서 좋기도 하지만, 사람들이 좋고 큰 도시에 비해 아직 덜 발전된 것도 정감이 갑니다.”

비록 해직 중이긴 하지만 활동적인 성격 탓에 하고 있는 활동도 다양할 것 같았다. 꼬치꼬치 캐묻는 말에 줄곧 그는 “하는 거 없다”며 쑥스러워 했다. 그에게 듣는 15년 철길인생은 선이 굵고 강하되 유연하고, 선명하되 투명한 투사의 삶이었지만, 말하는 모습은 영락없이 수줍은 동네아저씨다.

“전 결심만 하는 바보죠. 뭘 하고 싶다고 생각은 많이 하는데 자꾸 그걸 할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해요. 쑥스러운데, 최근 아내의 강권으로 공부를 시작했어요. 올해부터 방송통신대 문화교양학과를 다니고 있습니다. 평소 흥미를 가졌던 분야여서 선택했어요. 근데 1학년도 못다니고 짤리는 게 아닌지 모르겠어요, 허허. 시험날짜와 조카결혼식까지 겹치고…. 남들에겐 알리지도 못했어요. 창피하잖아요.”

아무것도 안 한다더니, 역시나! 내일을 일구느라, 그는 자기 손을 내버려두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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