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4년 06월 2004-06-01   1413

아들이 낸 캄캄한 터널의 작은 구멍, 어머니가 열어젖히다

‘단결만이 살길이요, 노동자가 살길이요, 내 하루를 살아도 인간답게 살고 싶다~.’

지난 5월 1일 노동절 집회장에서 울려 퍼진 ‘철의 노동자’는 여느 해보다도 우렁찼다. 17대 국회에 입성한 민주노동당 소속 당선자 열 명이 당당하게 노동자들 앞에 섰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은 감격스럽게 그들을 맞이했고, 『전태일 평전』을 한 권씩 선물했다. 민주노동당의 원내 진출이 확정됐을 때 그들을 국회에 입성시킨 노동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전태일 열사를 떠올렸을 것이다. 진보정당의 꿈이 현실화됐을 때 노동자들은 그 꿈의 바탕이 전태일 열사의 정신이라고 믿었을 것이다. 때문에 당선자들의 손에 들려진 한 권의 『전태일 평전』은 전태일의 마음인 동시에 노동자 모두의 마음이요 열망이다. 노동자에게, 우리 모두에게 전태일은 과거가 아닌 언제나 현실이다.

『참여사회』가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로서, 모든 노동자들의 어머니이자 동지로서 30여 년을 살아온 이소선 여사를 만난 것도 그래서다. 민노당 당선자들이 국회의사당에서 전태일 정신을 되살리길 간절히 희망해서다.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이하 유가협) 사무실을 찾았을 때 이소선 여사는 지병인 당뇨병 때문에 손수 주사기를 꽂고 있었다. “숨이 차서 말하는 것도 힘든데 왜 찾아왔냐”는 첫인사조차 한 움큼의 약을 삼킨 후에나 들을 수 있었다.

“태일이가 제일 기쁠 거야”

많은 사람들은 이소선 여사를 주저하지 않고 ‘어머니’라 부른다. 어머니는 오늘도 며칠 전 분신한 택시기사 조경식 씨의 가족을 만나고 오셨다고 했다. 일흔을 훌쩍 넘긴 나이지만 안락하고 평범한 삶을 마다하고 언제나 고통받고 소외받는 약자들과 함께 하는 이유, 하나마나한 질문 같지만 하지 않을 수 없는 질문이었다.

이렇게 몸이 안 좋으신데 노동자들 그만 챙기셔도 되지 않나요? 그러셔도 아무도 뭐라 그럴 사람 없는데, 오히려 어머님 건강이 더 중요할 때인 것 같은데요.

“아직도 자기 권리를 찾지 못하고 소외당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아? 나도 내가 왜 지금까지 이러고 다니는가 잘 모르겠지만 그 사람들 죽은 현장이나 분신한 현장에 가 보면 뭐라 할 말을 찾을 수가 없어. 김주익 열사 자살했을 때 부산에 갔었는데, 하늘에서 까마귀가 계속 맴돌아. 마음이 어찌나 안 좋던지…. 가족들은 울고만 있고. 태일이가 죽은 지 34년이 지났는데도 태일이 절규가 아직도 내 맘을 절절 끓게 하는데, 저 젊은 부인이 어린애들 데리고 어떻게 살아갈거나 생각하니 너무 기가 차서 말이 안 나와. 부인이 그러는 거야. “남편은 죽을 수밖에 없었어요. 난 이해할 수 있어요”라고. 저 사람들을 죽을 수밖에 없게끔 벼랑끝으로 내몰지 않는 현실이 언제쯤에나 올 건지, 답답해.“

유가협 사무실에서 주로 생활하시는 걸로 아는데, 어떻게 지내시나요?

“내가 여기서 유가협 어머니 아버지들과 같이 지내는 이유는 아픈 사람들과 같이 울고 같이 웃고 싶어서야. 제 시간에 밥 못 먹는 사람, 억지로 사는 사람이 너무 많다고. 우리 사회에서 가장 약하고 굶주린 사람들, 권리를 찾지 못한 사람들 위로라도 하자 이런 마음이었어. 소외 받는 약자, 빈민, 장애자 이런 사람들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향한 내 기다림이었지. 시간이 지나면서 민주노총도 합법화되고 민주노동당도 국회진출을 하게 됐잖아. 이 정도의 세상이라도 보려고 35년 가까이 이러고 다녔던 것 같아.”

최근 전태일 열사가 다른 때보다 더 많이 생각날 것 같습니다. 전태일 열사가 노동자로 살아 있다면, 노동자들의 손으로 만든 정당에서 국회의원이 배출되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기뻐했을 텐데요.

“이번 노동절 집회 때 단상에 올라서서 가만히 내려다보니까 우리 태일이가 살아 있으면 저 속에 앉아서 누구보다 큰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겠지 싶더라고. 태일이가 죽을 때 했던 말도 생각나고. “엄마, 노동자들과 학생들과 힘을 합해 끝까지 투쟁해달라”고 했거든. 나 생전에 울지 않았는데 눈물이 났어. 기쁨의 눈물인지, 태일이가 보고 싶어 흘린 눈물인지 나도 잘 모르겠더라고. 태일이 죽었을 때, 너는 살아오지 못하니까 네가 하려했던 것, 원했던 것 내가 살아서 해야겠다는, 그 생각 하나 가지고 지금까지 살아왔어. 지금 생각하면 그때의 기억이 떠올라 눈물이 났던 것 같아.”

준비된 운동가, 어머니

어머님을 ‘준비된 운동가’라고 부르는 거 들어보셨지요? 사상이나 이념, 사회경력은 없었지만 이 사회에서 소외 받고 무시당하는 이들의 고통을 진작부터 경험하셨고, 그 경험을 어머님 운동의 기본으로 삼으셨으니까요.

“나는 아무것도 몰라. 하지만 옛날부터 봉건적인 사고나 차별, 이런 것들 때문에 너무 한이 맺혀 있었어. 우리 아버지가 항일운동가 조직에 계시다 왜놈들 손에 돌아가셨어. 왜놈들이 우리 민족과 가족을 강탈하는 것을 보면서, 또 권력있고 힘있는 사람들이 우리 같은 약자들을 짓밟고 멸시하는 거 보면서 이래도 되나, 그런 생각을 많이 했지. 인간은 모두 인권이 있고, 거지도 부자도 사람의 존재는 다 똑같은데, 하는 생각들 말이야.”

전태일 열사 평전을 보면 어머님이 자신을 실천하는 사람이 되도록 키웠다고 하던데요. “나는 자기보다 남을 더 사랑하고 도와줘야 한다는 엄마 말을 그대로 실천했으니까 엄마도 내 부탁을 들어주세요. 엄마가 내 친구들하고 노력해서 노동조합을 만들어서 노동자들에게 이익을 준다면 많은 아들 딸과 함께 살게 될 거예요”라는 말, 기억나시죠?

“태일이가 분신하고 죽기 전에 나한테 “어린 노동자들이 너무 불쌍하다고, 끝까지 투쟁해서 이겨야 된다고, 엄마가 그 일을 하라”고 그러더라고. 내가 하지 않으면 자기를 위선적으로 키운 거라며, 대답하라는 거야. 그래서 내가 내 몸이 가루가 되어도 네가 원하는 대로 할 거니까 걱정마라 그랬지. 말을 할 때마다 피가 펑펑 쏟아지는데도 자꾸 나한테 다짐을 받더라고.”

어머님과 전태일 열사의 사이가 참 돈독하셨던 것 같습니다. 평전에도 어머님과의 대화가 많이 나오던데요.

“태일이는 밖에 나갔다 들어오면 누굴 만나서 뭘 했는지, 내일은 누굴 만나 무얼 할 건지에 대해 꼬박꼬박 얘기했어. 근로기준법도 맨날 가르쳐줬고. 태일이가 호프만 산정방식이 어떤 거다 가르쳐주면 하루 종일 노상에서 장사하는 내내 달달 외우다가 저녁에 태일이 만나면 다시 복습하고 그랬지. 결국 써먹을 때가 있더라고. 태일이가 민주화 운동 관련자로 인정되어 보상금을 계산하는데, 호프만식으로 계산한다는 거야. 근데 어이없게 830만원이 나왔어. 그래서 내가 회의에 가서 호프만식은 그런게 아니라구 한 마디 했지.”

어머님도 노동운동가로 혹독한 학습과 훈련을 받으신 것이네요.

“근데, 난 얼마 배우니까 싫더라고. 그래서 어느 날엔가는 근로기준법 책만 보면 저것이 내 목을 조르는 것 같다고 말하고 돌아누워 자는 척 했지. 그랬더니 태일이 혼자 탄식을 하면서 “엄마가 이제 안 배우려고 하니까 어떻게 하나, 안 배운 걸 후회할 날이 올지도 모르는데” 그러더라고. 그래서 내가 “니가 이민을 가든지 죽고 없어지든지 나랑 영원히 떨어질 때라야 그 때 배우지 못한 걸 후회하지”라며 왜 그런 소리를 하는지 이유를 대라고 따

졌어. 그랬더니, 그냥 해본 소리라며 웃어넘겼는데….”

“ 희망을 품으면 쓰러지지 않아”

민주동당의 원내진출이 평생에 가장 기쁜 일이라고 말씀하셨는데요. 민주노동당 당선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을실 텐데.

“민주노동당이 다른 정당들처럼 의원 숫자가 많지는 않지만 지금까지 투쟁해온 그 모습을 지켜줬으면 좋겠어. 내가 이제까지 살며 보니까 금뺏지를 달면 변하더구만. 그래도 우리 민주노동당은 그렇지 않을 거라고 믿고 있어. 노동자 문제가 시급하잖아. 열심히 일한 대가를 받아가며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 달라는 거야. 또 벼랑 끝으로 몰린 비정규직 노동자들도 힘써야 될 거고, 노사문제 해결에도 앞장서 줬음 해.”

어머님 말씀을 들어보면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가 아니고, 저를 비롯한 많은 활동가들의 동지라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 전반적인 운동이 예전에 비해 많이 쇠퇴하고 또 변하기도 했다는 평가도 있는데요. 참여연대나 시민운동에 대해 평소 갖고 계시던 바람이나 아쉬움이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시민운동단체가 없었다면 저렇게 발광하는 정부를 누가 견제하고 감시하겠어. 참여연대 같은 시민단체가 있으니 시민들도 의식이 생기는 거라 생각해. 여러분들이 어려운 여건에서 민중과 더불어서 함께 한다는 생각으로 지금까지 해왔기 때문에 회원들이 조금씩 늘어나는 거 아니겠어. 온 국민이 함께 한 촛불시위도 그런 활동이 바탕이 되고 뿌리가 됐기 때문에 가능한 거라 생각해. 나는 지식도 없고 논리도 없어. 그냥 현실을 보고 살면서 감각으로 느끼는 걸 말하는 거야.”

이소선 여사는 희망을 품지 않으면 금방 쓰러진다고 했다. 열 명의 민주노동당 국회의원 당선자는 우리가 수십 년 동안 품어온 희망이 맺은 작은 결실이라고 했다. 전태일 열사, “내 목숨 하나로 캄캄한 어둠의 터널에 조그만 구멍이라도 내어 그 구멍을 보고 열심히 투쟁하면 조금씩 열려서 수십 명이 지나가게 되고 노동자들이 인간답게 사는 세상이 올 거라”고 외쳤던 그 아들이 이소선 여사에겐 지금도 품고 사는 희망이다. 전태일 열사, 분신을 결단한 그에게 돌아가야 할 고향과도 같았던 희망은 ‘내 이상의 전부인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곁’이었다.

열사가 떠난 지 오랜 시간이 흐른 오늘, 우리가 품고 살지 않으면 쓰러질 수밖에 없는 희망은 예전과 다르지 않다. 다르지 않은 현실이 슬프다. 이제 당선자들의 손에 들려진 『전태일 평전』에 그 슬픈 희망을 실어 보낸다. 아직도 우리 곁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을.

박영선 참여연대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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