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4년 04월 2004-04-01   1321

[책속의 책읽기] <불타 석가모니, 그 생애와 가르침>

모든 현상은 변한다 게으름 없이 정진하라


『불타 석가모니, 그 생애와 가르침』 (와타나베 쇼코/법정 옮김/동쪽나라)

이지은 참여연대 공익법센터 간사 jieun@pspd.org

“나에게 파고든 정신의 질식 상태를 문득 절감하게 되었던 그 해 가을, 우리는 민족을 초월한 하나의 믿음 가운데 낯선 언덕에 서서 손을 마주 잡았었지요. 그 이후로 나는 당신께 내 사랑의 표지를, 아울러 내 행위의 실증을, 즉 내 사유의 세계를 응시하는 한 줄기 시선을 전하리라는 소망을 간직해 왔었습니다.”

헤르만 헤세가 『싯다르타』에서 로망 롤랑에게 헌사한 글의 일부이다. 이 위대한 작가이자 사색가가 한탄한 것이 정신의 질식 상태였다니 의외일 법하다. 헤세가 그린 싯다르타는 불타 싯다르타 그 자신을 그린 것이기도 하고 그렇지 않다고도 할 수 있다. 불타 석가모니의 설법을 듣고도 정신의 갈증을 채울 수 없었던 주인공 싯다르타는 다시 깨달음을 얻기 위해 자신의 길을 간다. 여기서 싯다르타는 어떤 의미에서는 헤세 자신을 빗댄 것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말하자면 로망 롤랑에게 고백했듯 도저히 견딜 수 없었던 정신의 질식 상태를 해소하기 위해 헤세는 불타 싯다르타와는 또 다른 싯다르타를 앞세워 구원의 메시지를 찾으려 했던 것 같다. 아무튼 나는 헤세의 여러 작품 중에서도 1차 세계 대전 후에 발간된 이 『싯다르타』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고백하자면 작품이 전하는 철학적 메시지보다는 어쩐 일인지 이 작가가 ‘정신의 질식’에 대해서 이야기했다는 사실이 마음에 더 깊은 인상을 남겼던 것 같다.

불타 석가모니란 석가 족 출신의 깨달은 자라는 뜻이다. 지금부터 약 2500년 전에 세상에 와서 깨달음을 얻고 45년 간 가르침을 펴다가 여든 살에 세상을 떠났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석가모니 부처에 대해서는 아쉽게도 정확한 연대기가 남아 있지 않다. 이는 인도에서 연도를 기록하지 않는 습관이 있어 정확한 연대 추정을 어렵게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대부분의 종교가 그렇지만 창시자에 대해서는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사실 기록보다는 초자연적이고 신화적인 기록이 당연할 것이라고 한다면 이 불교의 창시자에 대한 기록 역시 이 점을 비껴가진 않는다. 신화적이고 초자연적인 기술이 현대인에게 신빙성을 감하는 요소라 하더라도 그것을 겉모습 그대로 이해하기보다는 종교적 진실을 표현하는 독자적인 방법이므로 그 내적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저자는 미리 귀띔한다. 또한 저자는 불타 석가모니에 대해 최대한 공평하게 전기를 쓰려고 애썼다고 밝히고 있다. 공평하다는 것이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라면 저자는 아마도 종교가로서가 아니라 학자로서의 태도를 견지하려고 했다는 뜻으로 보면 될 것 같다.

이 책 『불타 석가모니』는 석가모니의 전생에서 시작하여 룸비니 동산에서의 탄생, 출가, 고행 및 성도 그리고 가르침을 펴고 입적할 때까지를 여러 문화권에 남아 있는 경전과 기록을 토대로 살펴보고 있다. 단순한 한 위인의 생애 기록이라기보다는 석가모니가 살았던 시대의 사회상과 여러 종교의 관계들까지도 자세히 기술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는 한 종교의 창시자의 전기라기보다는 그 당시 인도의 사회상과 사상을 엿볼 수 있는 인류사적 자료로도 의미가 있을 것 같다.

와타나베 쇼코는 먼저 석가모니의 전생에서 이야기를 시작하겠다고 한다. 전생에 대한 믿음은 인도인들 사이의 보편적인 믿음이며 전생이 과학적으로 증명가능한가 아닌가를 따지기 전에 위인의 인품을 이해할 수 있는 자료로 볼 필요가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불교 경전 <자타카>에서 석가모니의 전생에 대한 기록을 보여줄 수 있는 이야기 몇 가지를 인용하는데 저자는 여기서 위인의 인품을 엿볼 수 있는 기록으로 전생을 소개하고 있다. 산스크리트어와 팔리어로 남겨진 경전 뿐 아니라 우리에게도 익숙한 삼장과 현장의 기록까지 두루 섭렵한 흔적이 곳곳에 보인다. 아마도 그가 우리와 같이 불교 문화권에 속한 사람이라는 점도 고찰의 깊이를 더하는 데 한 몫 했을 것이다.

대략 석가모니 부처는 기원전 560년경에 태어나 기원전 480년경에 입적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출가해서 깨달음을 얻어 가르침을 편 지 45년, 인간의 생으로 약 80년을 산 석가모니 부처의 가르침은 무엇이었을까. 생로병사의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윤회를 극복한 해탈을 설파했으나 범상한 인간에게 그것은 너무 아득한 얘기이지 않을까. 그 때나 지금이나 우리는 여전히 우리이고 그는 여전히 그일 뿐인가. 사실을 말하자면 그가 말한 깨달음에 가까이 다가서기는커녕 나의 무명(無明)에 대해 인식하기조차 어렵다. 그가 입적할 즈음 곁을 지키던 아난다에게 마지막으로 한 말은 또 어떤가. “모든 현상은 변천한다. 게으름 없이 정진하라.” 위대한 성인이 남긴 말치고는 평범하기 그지없다.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제자들이 기대한 마지막 유언으로는 어떤 의미에서는 실망스럽기까지 할 수도 있다. 결국 불교에서 말하는 진리란 스스로 알아서 깨닫고 정진할 도리밖에 없다는 말인가. 책을 덮는 그 순간의 허망함이라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2500년 전에 살았던 석가모니 부처의 깨달음과 가르침이 지금의 우리에게 여전히 유의미하다고 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정신의 질식 상태를 탈출하고자 했던 헤세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감히 해 본다.

이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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