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3년 06월 2003-06-01   3399

“살인의 추억” 감독 봉준호, 그가 궁금하다

한 80년대 씨네마키드에게


영화 <살인의 추억>이 뜨고 있다. 화성연쇄살인사건을 다룬 이 영화는 개봉 17일만에 관객 250만을 돌파했다. 영화가 뜨자 감독 봉준호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본지는 인터뷰 지면에서 좀체 드러나지 않는 봉 감독의 ‘알려지지 않은 그 무엇’에 대해 그의 15년지기로부터 기고를 받았다. 봉준호 감독이 80년대를 끌어안고 사는 이유는 무엇인가. 편집자 주

1. 88학번, 그 운명적 시나리오

88학번. 대학교정에서 마지막으로 군사훈련을 받았지만, 입학 첫날부터 5·18 비디오를 자유롭게 시청한 사람들. 교복자율화 1세대이자 ‘선지원 후시험’ 대학입시 덕분에 약간의 소신과 적성을 인정받은 사람들. 3저 호황의 막차를 타고 비교적 여유롭게 직업전선에 뛰어들었고 크렘린의 붕괴와 동서독의 통일을 담담하게 분석할 수 있었던 사람들. 그들을 향해 선배들은 ‘88 꿈나무’라 불렀고, 후배들은 ‘팔팔 땔나무’라 칭했다.

‘88학번’이라는 단어가 다양한 형태로 삶의 성격을 규정할 때마다 떠오르는 노래가 있다. 바로 현존하는 대중예술인 가운데 ‘386세대’의 역사적 책무에 대해 가장 치열하게 고민하는 것으로 느껴지는 가수 정태춘의 ‘92년 장마, 종로에서’다. ‘흐르는 것이 어디 사람뿐이랴. 우리들의 한 시대도 거기 묻혀 흘러간다.’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흘러갈 것이다. 전투경찰을 향해 날아가는 화염병에 정당성을 부여하던 친구들은 어느덧 노동자들의 불법파업을 점잖게 나무랄 것이고, ‘부익부 빈익빈’의 경제구조를 날카롭게 비판하던 목소리는 자연스럽게 신자유주의의 불가피성과 국가경쟁력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쪽으로 바뀌고 있을 것이다.

현실에서는 추억으로만 존재하는 과거. 사람들은 그 과거를 적당히 윤색하고 애써 외면하면서 살아간다. 소주 한잔에 그리움을 쏟아 붓는가 하면, 텔레비전 다큐멘터리에서 발견한 1980년대의 단상에 몸서리를 치는 것이다. 1988년 대학에 입학한 이래 현실의 모순을 끊임없이 고민했고 변화를 지향하는 흐름에 묵묵히 동참했던 봉준호 감독이 2003년 4월에 선물한 <살인의 추억>도 그런 종류의 물건이리라.

2. 개봉박두! <살인의 추억>

2001년 봄. 대학로의 어느 소극장에서 후속작품을 준비중이던 봉준호 감독을 만났다. 화성연쇄살인사건을 다룬 연극 <날 보러와요>를 보기 위해서였다. 긴박한 구성과 뛰어난 연기력이 어우러진 <날 보러와요>는 관객들에게 짜릿한 긴장감을 심어주었고, 당시 이 작품의 영화화를 추진하던 ‘싸이더스’ 관계자들은 매우 흥분된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이날 저녁 봉 감독은 술이 얼큰한 상태에서 괴로운 심정을 털어놓고야 말았다. 본격적으로 시나리오를 써야 할 선발투수가 등판 직전에 동요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영화는 만들어지면 안 돼. 희생자의 가족들에게 또 한번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히고 말 거야.”

봉 감독의 고민은 연쇄살인사건의 현장 근처에 숙소를 잡아놓고 시나리오를 집필할 때부터 먼지에 쌓인 사건기록을 검토하고 악몽에서 겨우 벗어난 사람들을 취재하던 때를 거쳐 1980년대의 화성지역 풍경을 찾기 위해 전라도의 시골마을을 찾아다니던 때까지 계속 됐다.

과연 감독의 이런 진통이 없었다면, 엽기적 연쇄살인사건을 다룬 영화에서 관객들이 공분과 연민을 동시에 체감할 수 있었을까? <살인의 추억>이 대중의 품속에 안기기 직전, 봉 감독은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저의 솔직한 마음을 담아 열심히 만들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마음을 느낄 수 있었으면 합니다.”

2002년 9월. 영화촬영에 한창이던 봉 감독은 대학친구들을 긴급 호출했다. 영화 <살인의 추억>에 20초쯤 등장하는 대학가의 화염병 시위 장면을 찍기 위해서였다. 엑스트라를 동원해서 적당히 분위기만 풍길 수도 있었던 이 장면을 위해 그는 수천만 원을 기꺼이 투자했다.

영화 속의 시점은 1987년 가을. 경기도 화성에서는 미스터리 살인사건이 연이어 터지던 그 시절, 화성지역의 모든 경찰 병력은 반정부시위 진압을 위해 수원 시내에 투입되고 있었다. 폭력적 등화관제와 어둠 속의 참변, 서울올림픽의 축포와 구멍 뚫린 민생치안…. 봉 감독은 1980년대가 필연적으로 빚어낸 구조적 모순을 드러내기 위해 의식적으로 시위장면을 배치한 것이다.

화염병 시위대로서는 너무 늙어버린 봉 감독의 친구들이 영화출연을 수락한 속사정이 있다. 벌써 10여 년이 지난 1990년 초여름의 일이다. 봉 감독은 농활 답사를 떠나기로 한 날 오후, 약속장소에 나타나지 않고 전교조 선생님들의 시위에 참여했다가 ‘화염병처벌법위반’ 혐의로 구속된 일이 있다. 친구들은 뒤늦게나마 그 ‘빚’을 갚기 위해 군복과 교련복으로 갈아입고 ‘복학생 시위대’로 분한 것이다. 물론 봉 감독은 영화의 리얼리티를 높이기 위해 ‘원로 배우’들을 투입했겠지만 말이다.

휘발유와 신나를 2대1로 섞은 뒤 볼펜으로 휴지를 다져넣고 헝겊으로 심지를 만든 화염병이 아스팔트 위에서 불바다를 이루는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섬뜩하다. 실제보다 더 어려운 영화 속의 화염병 시위였지만, 감독은 갈수록 주문을 보태더니 급기야 “불꽃이 제대로 찍혀야겠다. 이번에는 한 사람 당 두개씩 던져라”는 지시까지 내렸다. 필자는 지난 10여 년 동안 봉 감독의 눈빛이 그때처럼 반짝였던 모습을 기억하지 못한다.

2003년 4월. 압구정동의 어느 영화관에서 <살인의 추억> 시사회가 열렸다. 봉 감독의 친구들은 2시간 넘게 숨죽이며 영화를 지켜본 뒤 기대반 불안반의 심정에 휩싸였다. 잘 만든 영화가 반드시 흥행하는 것이 충무로의 법칙은 아니었기에, 또 2년 전 봉 감독의 첫 작품 <플란다스의 개>가 <반칙왕>의 백드롭에 허무하게 무너지는 모습을 지켜보았기에 친구들의 마음은 꽤나 무거웠다. 더구나 초반 흥행을 좌우한다는 10대 관객들이 장나라의 <오 해피데이>에 관심을 쏟고, 중국발 SARS 공포가 눈앞에 닥쳤다는 소식이 들렸기에 걱정은 더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봉 감독은 이번에도 친구들의 염려를 너끈하게 받아넘겼다. “괜찮다. 너희들이 재미있게 보았으면 그것으로 만족한다.” 그 한마디만으로도 가슴이 후련했건만, <살인의 추억>을 보석으로 만든 배우 송강호의 마무리 펀치가 터져 나왔다.

“영화인 시사회에서 벌써 뒤집어졌습니다.”

봉 감독의 바람처럼 <살인의 추억>은 1980년대를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특별한 감동을 안겨주었고, 송강호의 예견처럼

<살인의 추억>은 이후 최고의 작품으로 떠올랐다.

3. We remember Bong

봉 감독의 데뷔작 <플란다스의 개>는 뜯어볼수록 재미있는 영화다. 사람들은 <플란다스의 개>에 양념으로 등장하는 ‘보일러 김씨(변희봉 분)’의 괴담을 통해 봉 감독이 일찍부터 스릴러 영화의 가능성을 보였다고 평가하는가 하면, 주인공 윤주(이성재 분)를 둘러싼 소시민의 일상을 바라보며 봉 감독의 아기자기한 묘사에 감탄하곤 한다.

하지만 봉 감독의 정치적 성향을 잘 아는 사람이라면 윤주가 쓰레기 분리수거를 하면서 보일러 김씨와 주고받는 대화에서 묘한 일체감을 느꼈을 것이다. 따분하고 답답한 세상살이에 잔뜩 짜증이 난 윤주가 “우리나라는 뭐 하나 원칙대로 되는 게 없어요”라고 푸념하자, 보일러 김씨는 이렇게 답한다. “해방 이후 쭈∼욱 그랬어.”

첫 단편영화 <백색인>으로부터 <지리멸렬>과 <플란다스의 개>를 지나 <살인의 추억>에 이르기까지. 봉 감독의 작품에는 TV뉴스 또는 신문기사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스쳐 지나가는 일상의 풍경에도 시대적 정서가 묻어 있다고 믿는 그였기에 대중매체를 통한 배경 묘사에 세심한 공을 들였던 것이다.

필자의 기억으로 봉 감독 특유의 ‘보여주기’ 방식은 아주 오래 전부터 빛을 발했다. 그는 이미 대학시절 학보 만평을 통해 학내문제와 정치적 사안을 절묘하게 대비시키는 솜씨를 뽐냈으며, 1990년대 초반 신세대 문화의 상징이었던 록카페 열풍과 일본종교인 남묘호랑교의 한국 내 유입 실태를 본격 다큐멘터리로 제작해 눈길을 끌었다.

특히 자신이 직접 참가했던 1989년 여름농활을 추리극 형태로 꾸민 코믹만화 <농활야사>는 지금까지도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어디 그 뿐이랴. 그가 찍은 수많은 사진들은 학회실 벽면을 넉넉하게 장식했고, 그가 쏟아낸 숱한 아이디어는 각종 집회와 선거에 요긴하게 활용됐다. 가두시위 참가를 위해 일찍 파한 사회과학 세미나에서, 시위에 사용될 소주병을 모으기 위해 초저녁부터 시작된 술자리에서, 칼바람을 맞으며 ‘노동자 대통령’을 목이 터져라 외쳐대던 보라매공원 유세장에서, 그리고 축구중계를 보기 위해 딸랑 물만두 한 접시 시켜놓고 90분간 주인 아저씨와 신경전을 벌이던 어느 식당에서…. 그가 뿜어낸 풍자와 재치는 언제나 ‘힘을 주는 아름다움’이었다.

봉 감독의 넘치는 ‘끼’를 거론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명작이 하나 더 있다. 1990년 봄 교내 노래제에 참가하기 위해 안치환의 <지리산>을 노가바(노래 가사 바꿔 부르기)한 <민자당>이 그것이다. 하룻밤 사이에 만들어서 1시간 동안 연습한 뒤 노천강당 공연까지 성황리에 마쳤던 추억의 명곡. 노태우의 민정당, 김영삼의 민주당, 김종필의 공화당이 기습적으로 합당한 것을 두고 봉 감독은 이렇게 풍자했다.

“눈보라 몰아치는 저 청와대. 우리는 한 몸이 됐네. 민자의 전성시대. 한 지붕 세 가족. 개새끼들. 골프나 같이 치면서. 구국의 결단 X까라. 아무도 안 속는다. 민주자유당~ 보수대연합~….”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이 있듯이 봉 감독의 빼어난 감각은 관찰력과 취재력 덕분에 더욱 위력을 발휘한다. 실제로 필자는 그의 놀라운 기억력에 혀를 내두를 때가 종종 있었다. 굳이 <살인의 추억>에 나오는 ‘자를 이용한 전자오락 게임’이나 박두만 형사(송강호 분)가 들고 다니는 ‘농협마크 다이어리’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소품에 대한 그의 철저한 고증은 영화인들 사이에서도 화제다. 하긴 <레크레이션연구>라는 교양선택 수업시간에 “1980년대의 양대 불량식품 회사는?”이라는 퀴즈를 출제해 놓고, “정답은 L제과와 D제과”라고 기억을 더듬어주는 사람이 어디 흔할 것인가?

봉 감독 영화에 나오는 에피소드 중에는 친구들이 제공한 아이템이나 자신의 체험담도 적지 않다. 그는 남들이 한 귀로 듣고 다른 귀로 흘려버린 얘기들을 잘 새겨두었다가 적절한 타이밍에 끌어내 탄성을 자아내게 만들곤 한다.

<플란다스의 개>에 나오는 장면 한 토막. 주인공 윤주는 학과 선배들의 모임에 나가지 못해 안절부절이지만, 임신중인 그의 아내는 “나가려면 호두를 까서 컵에 가득 채워놓고 나가라”고 쐐기를 박는다. 외출을 위해 부지런히 망치로 호두를 깨는 윤주와, 침대에 누워 연신 컵 속의 호두를 입 속으로 가져가는 아내. 이 장면은 언젠가 대학동기들의 모임에서 한 친구가 털어놓은 실화였다. 물론 실제의 친구는 호두를 깨는 대신 밤을 깠지만.

다음은 <살인의 추억>에서 놓칠 수 없는 대목. 박두만 형사(송강호 분)와 조용구 형사(김뢰하 분)가 길가에 퍼질러 않아서 주고받는 대화다. 조형사가 “대학생들은 M.T 가서 남자가 여자를 따먹고, 같이 자면서 떼X을 하고 그런다면서요?”라고 묻자, 박 형사는 “몰라 임마. 저기 4년제 나온 서태윤(김상경 분)이한테 물어봐. 떼X을 하는지”라고 대꾸한다.

1980년대 대학문화에 대한 엉뚱한 오해의 출처는 어디일까? 이런 기막힌 상상이 가능한 곳은 현실과 철저히 통제된 공간일 수밖에 없다. 각종 사고를 저지른 범죄자와 시국사범들이 한 방에서 몸을 부대끼며 서로의 삶에 호기심을 표하던 시절, 봉 감독은 그 ‘닫힌 공간’의 구성원들이 쏟아낸 궁금증까지도 잊지 않고 기억 속에 묻어두었던 것이다.

이쯤 되면 봉 감독이 무서운 사람이라는 생각도 들 것이다. 실제로 <살인의 추억>의 시작과 끝을 함께 한 주연배우 송강호는 “배우의 진을 다 빼먹는 사람”이라며 봉 감독의 프로의식에 혀를 내두른다. 배우가 모든 것을 다 보여주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봉 감독은 “형, 더 좋은 거 있죠?” 하고 눙치면서 배우를 미치게 만든다는 것이다. “논두렁에 꿀을 발랐나”와 “씨발 모르겠다. 밥은 먹고 다니냐” 같은 송강호의 명대사는 그렇게 해서 탄생할 수 있었다.

봉 감독과 필자가 작당해서 절친했던 대학동기 한 명을 정말로 미치게 만들 뻔한 웃지 못할 해프닝도 있었다. 1993년 겨울. 제대를 앞둔 대학동기는 군복무 단축 혜택에 필요한 교련교육 이수증을 보내달라고 봉 감독에게 부탁했다. 이때 우리는 그 친구가 이전에 펑크낸 약속을 문제삼아 골탕을 먹이기로 의기투합하고 모종의 음모를 꾸몄다. 이렇게 해서 봉 감독은 문제의 이수증은 물론이고 학장과 총장의 직인까지 실제와 똑같이 그린 문서를 군부대로 발송했고, 우여곡절 끝에 제대한 친구는 한동안 “성씨가 특이한 놈들과는 상종하지 않겠다”며 ‘울분’을 토했다.

봉 감독의 그림 솜씨에 대해서는 이밖에도 숱한 에피소드가 있다. 학창시절 시내버스 회수권을 실물과 똑같이 만들었는가 하면, ‘큰 집’에서 기거하는 동안에는 48장의 화투를 그려 재소자들에게 아주 특별한 기쁨을 안겨주었다는 ‘야사’가 전해지고 있다. 요즘엔 그의 섬세한 터치가 촬영에 앞서 직접 구성하는 현장콘티에 잘 묻어나고 있다는 후문이다.

4. 따뜻한 초심, 오래도록 변치 않기를

대학시절을 떠올릴 때마다 왠지 미안해지는 사람들이 있다. 솔직히 말해서 필자는 음악이나 영화 등에 심취했던 사람들을 살갑게 대하지 못했고, 그 중 몇 사람에게는 마음의 상처를 입히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스스로 이 분야에 문외한이었던 탓도 있었지만, 문화적 취향을 다소 사치스럽게 여겼던 주변 분위기의 영향도 컸던 것 같다.

봉 감독에 대해서도 그런 생각이 들었던 때가 여러 차례 있었다. 중학생 때부터 영화감독의 꿈을 키웠고 스콜세즈, 코폴라, 구로자와, 미야자키 등의 작품세계에 흥미를 느끼던 그에게, 우리가 구색을 갖춰 토론주제로 꺼낼 수 있었던 영화는 장산곶매의 <파업전야>나 박광수의 <그들도 우리처럼> 황규덕의 <꼴찌부터 일등까지 우리 반을 찾습니다> 정도에 불과했다.

그런 까닭에 봉 감독으로부터 영화에 대한 얘기를 본격적으로 들은 것은 그가 군복무를 마친 뒤 한국영화아카데미 입학을 준비하면서부터다. 이 무렵 그가 홍익대 근처의 영화카페에서 원서를 탐독하던 모습과 첫 단편영화 <백색인>에 쏟아부었던 열정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다소 어감의 차이는 있었겠지만, 친구들은 그 당시 대체로 이런 말을 했다. “사람은 역시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해야 돼.”

세상 만물이 변화 발전하는 것처럼 사람도 세월이 가면 달라지게 마련이다. 꿈 많던 씨네마키드는 이제 한국영화의 희망으로 우뚝 섰고, 1980년대의 끄트머리에서 치열하게 부대끼던 젊은이는 과거를 잊고 살거나 혹은 잊으려 애쓰는 사람들에게 소중한 추억을 선물했다. 그리고 그 추억이 많은 이들의 가슴에 진지한 울림을 만들고 있다.

영화계 초년병 시절 봉 감독은 친구들에게 “광주항쟁을 영화로 만들고 싶다”는 포부를 밝힌 적이 있다. 우리는 지금 그의 5·18 프로젝트가 언제쯤 현실화될 것인지 가늠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그가 구상하는 ‘1980년 5월’이 동시대인들의 가슴에 또 하나의 강한 울림을 만들어 내리라는 점을 의심치 않는다. 오랜 친구의 고뇌가 담긴 <살인의 추억>의 성공을 축하하며, 그의 따뜻했던 초심이 오래도록 스크린에 배어나기를 빈다.

육성철 전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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