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2년 11월 2002-10-30   10427

학대와 고통으로 얼룩진 “아메리카의 삶” – 미군과 결혼한 한국 여성들

한국전쟁 이후 지금까지 우리나라에 주둔한 미군 숫자는 얼마나 될까. 한미연합사로부터 자료를 받아 1953년부터 지난해까지 통합한 결과 총 200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밝혀졌다.

200만 명의 군인들에게는 이런 공통점이 있다. 첫째는 그들이 미혼이거나, 기혼자라도 홀로 왔다는 점, 둘째는 많은 수가 한국 여성들과 결혼을 했다는 점이다.

미국 ‘이중문화가정목회 전국연합’이 2001년 해외동포재단에 제출한 문건에 따르면, 지금까지 미군과 결혼한 한국여성들은 대략 20만 명으로 추정된다. 한국을 거쳐간 10명의 미군 중 1명 꼴로 한국여성과 결혼한 셈이다. 인생에서 배우자를 만난다는 것이 어느 누구한테나 그리 쉬운 일은 아닐텐데 이들은 한국에 근무하는 1∼2년 사이에 한국 여성들과 그렇게 결혼을 해댔다.

미군과 결혼한 한국 여성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지난 9월 2일부터 2주일 동안 미군과 결혼해 건너간 한국 여성들이 많이 산다는 미국의 여러 지역을 돌아봤다. 이들은 군기지 주변에 살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군인 남편을 따라나선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미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 중 하나인 워싱턴주 시애틀은 복잡한 해안선에 수심 또한 깊어 대형 군함이 쉽게 접할 수 있는 해안 요새다. 시애틀 주변에는 포트 루이스 등 군부대가 밀집해 있다. 미군을 따라온 많은 한국 여성들이 주로 여기에 살고 있다.

시애틀에서 비행기로 4시간 거리에 있는 미주리주와 일리노이주. 이곳에도 한국 여성들이 많다. 여기에는 지형조건상 비행기 소음이 별로 나지 않는 천혜의 공군기지가 있다. 이밖에도 대규모 육군기지가 있는 텍사스주의 킬린과 샌 안토니오, 군 장교학교가 위치한 캔자스주 노브롤스, 노스캐롤라이나주 ‘포트 브래그’ 주변 등 한국여성들이 수백 명에서 수천 명씩 거주하고 있는 곳은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많다.

매 맞는 한국여성

세인트루이스에서 만난 47세의 P씨. 그는 84년 백인 미군 병사와 결혼해 들어왔다. 기지촌에서 만난 남편은 결혼 뒤 얼마간은 그럭저럭 잘 대해줬다. 그러나 남편은 곧 알코올 중독자가 됐고 술만 마시면 아내를 심하게 때렸다. 남편의 학대는 P씨가 임신하면서 더 심해졌다. 나중에 안 사실이었지만 남편에게는 이미 부인과 딸이 있었다. 다른 아이를 원치 않았던지 남편은 임신 7개월이던 P씨를 캘리포니아의 한 사막으로 끌고 가 무차별 폭행했다. 뱃속의 아이는 숨지고 말았다. 두 번째 임신도 남편의 손찌검 탓에 유산으로 끝났다. 결혼 4년째 되던 해 P씨는 세 번째 아이를 갖게 됐다. 남편은 임신 3개월인 P씨를 집에 가둬놓고 머리채를 잡아당기는 ‘놀이’로 학대했다. P씨는 약을 먹고 자살을 시도했고 이틀만에 정신병원에서 깨어났다. 다행히 병원에 격리돼 아이를 어렵게 낳을 수는 있었지만 남편은 딸이 네 살 되던 해 이번에는 아버지로서 할 수 없는 짓을 딸에게 하기 시작했다.

P씨는 마침내 이혼에 성공했고 어렵게 딸의 양육권을 얻었다. 하지만 P씨의 고난은 이혼 뒤에도 계속됐다. 양육비로 받는 한달 134달러가 수입의 전부였기 때문에 차디찬 겨울에도 온기 없는 싸늘한 방에서 지내야 했다. 게다가 전 남편은 시도 때도 없이 나타나 P씨 모녀에게 욕설과 협박을 일삼았다. 그러던 끝에 전 남편은 옛 부인을 권총으로 쏘아 죽이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러나 전 남편의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니다. 비행 소녀로 성장한 딸이 이번에는 엄마를 때리기 시작했다. 딸은 현재 소년원에 들어가 있고 P씨는 식당 종업원으로 일하며 연명하고 있다.

정신적 학대

워싱턴주에서 만난 올해 쉰의 K씨. K씨는 76년 백인 남편과 결혼해 미국으로 들어왔다. 보잘 것 없던 자신과 결혼해 준 남편을 K씨는 왕처럼 떠받들었다. 외출도 삼갔고 미국 주부들은 좀처럼 하지 않는 손빨래를 해가며 집안 살림에 몰두했다. 남편도 그런 K씨를 처음에는 잘 대해줬다. 하지만 곧 바람둥이로 변했다. K씨는 남편의 옷을 빨면서 남편이 바람을 피우는 사실을 알게 됐다. 하지만 심리학을 전공한 남편은 오히려 K씨를 정신 이상자로 몰면서 교묘하게 정신적 고통을 주었다. 게다가 남편은 간혹 견디기 힘든 이상 성욕을 보이기까지 했다. 그래도 K씨는 누구한테도 자신의 상황을 얘기할 수 없었다. 수치스럽기도 하고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할 게 뻔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결혼 15년째를 맞은 K씨는 ‘남편이 자신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외로워서 택한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자살을 결심했다.

“남편은 자기가 기르던 애완견이 죽었을 때 개를 껴안고 한없이 울었던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제가 자살을 결심하고 약을 먹고 지하실에 쓰러져 있을 때는 발로 툭툭 차며 히죽 거렸지요. 그에게 있어 저는 개만도 못한 인간이었습니다.”

그후 K씨는 정신병원에 보내졌고 곧바로 이혼 당했다. 정신병은 정당한 이혼 사유가 됐기 때문에 K씨는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하고 내쫓겼다.

아내가 아니라 식모

미주리주에서 만난 51세의 L씨. L씨는 동두천에서 흑인 남편과 결혼해 81년 미국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남편은 결혼 후 반년 정도만 남편이었을 뿐 그 뒤부터는 손님에 지나지 않았다. 월급 한푼 가져다 준 적이 없었을 뿐 아니라 늘 새로운 여자와 딴 살림을 차렸다. L씨는 시집 식구 27명을 뒷바라지했다. 별 수 없이 돈벌이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시작한 것이 건물 청소. 잠 못 자고 일해도 대식구이다 보니 입에 풀칠하기조차 어려웠다. 밥이 모자란 적도 여러 차례였다. 그럴 때 L씨는 시집 식구만 밥을 해 먹이고 아이들은 친구들 집에서 끼니를 해결하고 오게 했다. 그리고 자기는 굶었다. 결국 L씨는 영양실조로 쓰러져 두달간 입원해야 했다. 남편은 그림자도 비치지 않았다. L씨는 3년 전 이혼한 뒤 지금은 혼자 살고 있다.

미군 남편과 결혼해 가족이 아니라 일꾼처럼 살고 있는 여성들은 L씨 주위에도 적지 않았다. 미군 남편들은 대체로 한국인 아내에게 운전을 가르치지 않는다. 아내가 운전을 하면 밖으로 나돌아다녀 집안 일을 소홀히 한다는 이유에서다. 한 여성은 10년 동안 살면서 집 밖 구경을 한 번도 해보지 못했다고 했다. 시집 식구들을 대신해 파티를 준비하고 손님들을 맞곤 했지만 그때마다 시집 어른들은 그녀를 식모라고 소개했다.

노숙하는 여성들

96년 루이지애나주의 작은 도시 리즈빌. 깨끗하고 잘 정돈된 이곳에서 한 동양 여인이 10년째 거지생활을 하고 있었다. 주민들은 이 여인을 중국 여자라고 부르며 불쾌하게만 여겼을 뿐 어느 누구도 돌보지 않았다. 이 지역에는 미군과 결혼해 잘 살고 있던 한국 여성들도 많았다. 이들은 당시 미국 이곳 저곳에서 노숙 생활을 하는 한국 여성에 대한 보고가 끊이지 않음에 따라 설마 하는 마음에서 여인을 찾아보기로 했다. 주택가 쓰레기 더미에서 검은 비닐을 뒤집어쓴 채 발견된 여인의 입에서는 뜻밖에도 한국말이 튀어나왔다. 오랜 노숙 생활로 이미 제 정신을 잃은 상태였다. 한국 여성들은 수소문 끝에 이 여성에 대한 몇 가지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다. 이름이 J이며 미군 남편과 결혼한 뒤 이 곳에서 딸 둘을 낳고 살다 남편에게 버림받았다는 사실이었다. J씨가 영어를 한 마디도 못하면서 이곳을 떠돌았던 것은 남편이 혹시 자신을 찾을까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세인트루이스의 한 교회에서 만난 J씨는 아직도 망상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기억이 18년 전 에 멈춰 있어서 그 이후의 일들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J씨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도 아무도 알지 못한다.

매매춘에 마약복용까지

노숙자로 살다 거리에서 횡사한 한국 여성도 있었다. 91년 겨울, 시카고에서는 김용섭이라는 이름의 한국 여성이 지나가던 제설차에 치여 숨졌다. 몇년째 노숙생활을 해오던 김씨는 추위를 피해 빈 건물에 들어갔다가 경비원에 내쫓겼다. 추위 속을 전전하던 그녀는 결국 제설차에 치여 숨을 거뒀다. 이 여인은 그나마 신분이 확인됐기 때문에 세상에 알려졌다. 하지만 대다수 한국여성들은 신분증도 없이 집에서 쫓겨난다. 이 때문에 얼마나 많은 한국여성들이 어떤 일을 당하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다.

미군 남편에게 쫓겨난 많은 한국 여성들이 죽지 못해 찾아 들어가는 곳이 있다. 바로 매매춘 업소다. 미국의 여러 도시에는 ‘마사지 팔러’라는 매매춘 업소가 성업중이다. 놀라운 것은 ‘마사지 팔러’ 여종업원들의 상당수가 한국 여성들이라는 사실이다. 뉴욕에서 만난 한 여성은 어떻게 매매춘 업소에 들어가게 되고 어떤 생활을 하는지 솔직하게 들려주었다.

78년 미군과 결혼한 K씨. K씨는 텍사스주 킬린에 정착했으나 곧 불행이 시작됐다. 결혼 전에는 몰랐지만 남편은 지독한 알코올 중독자였고 술만 마시면 K씨에게 마구 주먹을 휘둘렀다. 이혼을 요구하면 손찌검은 더 심해졌다. 남편의 학대를 피해 K씨는 무작정 집에서 도망 나왔다. K씨는 집 근처에 살던 다른 한국여성의 도움으로 휴스턴으로 피신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곳은 매매춘 업소였고, 거기에서 일하는 40∼50명의 여성이 모두 한국인이었다. 그들은 거의 K씨와 비슷한 처지의 여성들이었다. 한국의 친정으로 돈을 보내기 위해 집을 오가며 일하는 여성들도 있었지만 대개는 K씨처럼 오갈 데가 없는 경우였다.

K씨는 그곳에 눌러앉았다. 큰돈도 만질 수 있었다. 한 달에 4만 달러라는 엄청난 돈이 벌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K씨는 마약 중독이라는 또 다른 덫에 걸려들고 말았다. 주인이 직접 파는 마약은 밥과도 같았다. 목숨을 잃는 여성도 여럿 보았다. 마약중독으로 일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면 길에 버려지기도 하고 때로는 총을 든 강도에게 죽임을 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일을 시작한지 6년 만에 K씨는 마약 때문에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업소 측은 K씨를 멀리 뉴욕에 데려다 버렸다. 그 뒤 1년 간 뉴욕에서 노숙자 생활을 한 끝에 K씨는 한국인이 운영하는 노숙자를 위한 쉼터로 실려갔다. 3년 간의 치료로 그녀는 ‘새 사람’이 될 수 있었고 지금은 뉴욕의 한 봉제 공장에 취직해 바느질을 하고 있다.

‘마사지 팔러’와 종업원들의 마약 복용실태는 미국에서도 여러 차례 사회문제가 되었다. 특히 지난 4월 폭스 TV가 오하이오주 클리브랜드의 한국인 ‘마사지 걸’들과 한국의 미군 기지촌 문제를 대대적으로 보도해 미국 사회에 충격을 던졌다. 한국여성의 매매춘 문제는 이미 80년대부터 하와이에서 여러 차례 대서특필됐다.

남편에게 버림받은 뒤 거리를 헤매고 다니거나 마약 복용으로 정신이상 증세를 보이는 한국인 여성들이 경찰에 신고돼 병원에 실려 가는 경우가 종종 있다. 뉴욕 플러싱 지구에 있는 시립 엘름 허스트 병원 정신병동에 가면 가족 없이 입원 중인 한국인 여성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정신병동의 28개 병상 중 12개 정도가 한국 여성들로 채워지고 있다. 이 때문에 한국말을 할 수 있는 의료인력 5명이 배치돼 있다. 하지만 이곳에 실려오는 여성들은 응급구호만 받고 3주 후에 퇴원 당하는 경우가 많다. 이들 대부분이 신분이 확인되지 않거나 영주권이 없어 사회복지 혜택을 받을 자격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병원에서 나온 여성들은 다시 길거리로 나서거나 한국인이 운영하는 쉼터로 안내된다.

멍든 이들의 쉼터, 무지개집과 샤론의 집

뉴욕에는 ‘무지개 집’이라는 한국 노숙자 여성을 위한 쉼터가 운영되고 있다. 91년 문을 연 뒤 지금까지 수백 명이 이곳을 거쳐갔다. 쉼터는 한국인 여금현 목사가 운영하고 있다. 뉴욕에서 신학을 공부하던 그는 한 한국인 여성 노숙자를 알게 된 것이 인연이 돼 10년 넘게 이곳에서 봉사하고 있다. 군화 발에 맞아 얼굴이 일그러진 사람, 다 떨어진 누더기 옷을 두서너 개 겹쳐 입은 사람, 이가 모두 빠져버린 사람, 동상으로 손을 쓸 수 없게 된 사람 등 말로 표현하기 힘들만큼 비참한 모습의 한국 여성들을 데려다 침식을 제공하고 정신질환과 마약 중독을 치료해주려고 노력해왔다. 하지만 운영이 만만치 않다. 게다가 이런 활동이 한국과 한국 여성들의 이미지를 훼손한다는 이유로 못마땅하게 바라보는 교포들이 많다. 2년 전 ‘무지개 집’은 큰 위기를 맞았다. 한 독지가가 100만 달러 지원을 약속했으나 그 약속이 지켜지지 않은 것이다. 그 뒤로 후원금이 끊겼고 결국 문을 닫았다. 그때까지 ‘무지개 집’을 거쳐간 한국여성들은 267명. 겨우 두 달 전에야 작은 후원으로 다시 문을 열 수 있게 됐다.

피폐된 정신

워싱턴주 타코마에도 ‘샤론의 집’이란 쉼터가 운영되고 있다. 미군 남편한테 얻어맞아 온몸이 퉁퉁 부은 한 여성을 김명부 씨가 길에서 발견하고서부터 시작됐다. 그는 이 같은 여성이 많다는 사실을 알고 이듬해 건물을 빌려 여성들을 받아들이기 시작했고 3년 전에는 농가를 사들였다. 도시를 돌아다니며 버려진 가구며 집기를 거둬들여 재활용하는 방식으로 ‘샤론의 집’은 운영된다. 현재 이곳에 머물고 있는 여성들은 20여 명이며 5명의 한국여성들이 자원봉사를 하고 있다.

미군과 결혼해 순조롭게 살고 있는 다른 한국여성들도 불행한 동포여성들을 돕기 위해 팔을 걷어 붙였다. 91년 세인트루이스의 김민지 씨를 중심으로 26명의 여성들이 모여 ‘이중문화가정 목회 전국연합’이라는 단체를 만들었다. 회원은 모두 미군과 결혼한 한국여성들이다. 이 단체는 현재 미 전역에 30개의 지회를 두고 있고, 회원은 모두 2000여 명이다. 이들은 국제결혼에 대해 한인사회가 가지고 있는 비뚤어진 의식을 바로잡고 핍박받는 국제결혼 한국여성들과 더불어 사는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많은 활동을 벌이고 있다. 거리에 버려진 한국여성들이 더 이상 없도록 이들은 99년 미주리주 로버츠빌에 14만 평의 땅을 할부로 구입했다. 한국여성 타운을 만들려는 것이다. 하지만 4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땅값을 다 갚지 못한 상태다.

미국에 살고 있는 한국 출신의 미군 아내들은 한국에서 완전히 잊혀진 존재다. 그들을 지난 시기 기지촌 여성, 혹은 ‘양공주’라 손가락질하며 냉대와 무관심으로 일관해오지 않았던가. 하지만 잘 따지고 보면 이들은 한국 현대사의 희생양이다. 위험 부담을 줄이기 위해 가족 없는 젊은 군인들을 주로 한반도에 주둔시키고 주둔군을 유지하기 위해 기지촌을 부양한 한미 두 나라의 정책에 의해 희생된 피해자들이다. 미국에서 버림받은 이들을 이제라도 주목하고 도와줘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숨어 있다.

미국에서 도망치듯 돌아온 미군 아내들에 대해서는 기지촌의 몇몇 시민단체가 도움의 손길을 뻗고 있다. 이들은 그나마 운 좋은 편에 속한다. 얼마나 많은 한국여성들이 미국의 뒷골목을 헤매고 있는지, 또 어떻게 비참하게 목숨을 잃고 있는지 파악할 길이 없다. 현재로선 미국에서 운영되고 있는 단체들을 통해 버려진 여성들을 돕는 것이 적절한 방법으로 보인다. 이들 단체 또한 고국의 관심과 지원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단체들은 특히 국내 기업들의 작은 관심이 자신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라며 기대를 걸고 있다.

국내 관심 절실

또 한편으로는 이들 여성들에 대한 정확한 실태 조사가 필요하다. 한국정부는 미국당국과 달리 미군과 결혼한 자국 여성들에 대한 어떤 통계도 갖고 있지 않다. 미군 남편을 따라간 한국여성들의 국내 가족들을 대상으로 한 조사도 고려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미군과 결혼한 여성들에 대한 한국 사회의 인식이 바뀌어야 한다.

전국에는 여전히 많은 기지촌이 성업중이다. 최근에는 한국여성 대신 필리핀이나 러시아 출신 여성들이 기지촌의 밤을 밝히고 있다. 이들 중에서도 미군의 아내들이 생겨나고 있다. 서울 용산의 미군 지원 시설인 USO에 개설된 미군 약혼녀를 위한 ‘신부학교(bride school)’는 필리핀과 러시아 여성들이 채워가고 있다. 기지촌이 있는 한 미군과 결혼한 외국인 아내의 악몽은, 그 악몽을 꾸는 사람의 살색만 바뀔 뿐, 계속 될 수밖에 없다.

권민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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