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1년 07월 2001-07-01   1609

조영래 변호사를 기리며 …

누구나 한번쯤 인생에서 잊지 못할 사랑을 한다. 연인 간이든, 선후배 간이든 …. 『참여사회』는 이번 호부터 저마다의 가슴 속에 남아 있는 ‘잊지 못할 사랑이야기’를 연재한다. 이번 호엔 시민운동가로 살아가는 박원순 변호사의 가슴 속에 남아 있는 ‘선배사랑’ 얘기를 담는다.

사람이 일생을 살아가는 동안 여러 사람들로부터 영향을 받게 마련이다. 가까이는 부모와 친구로부터 멀리는 책이나 영화로부터 영향을 받기도 한다. 때로는 그 영향이 지대하여 한 사람의 인생을 완전히 바꿔 놓을 수도 있다. 아직 인생을 회고할 나이는 아니지만 그래도 구태여 생각해 보면 나도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그분들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사랑은 받기보다 주는 것이 더 좋다지만 나는 아직 준 편이라기보다는 받은 편이라고 할 수 있다. 조영래 변호사님은 10여 년이나 후배였던 나를 사랑해주고 도움을 준 잊을 수 없는 분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1980년 사법연수원에서 인연을 맺기 시작하면서부터 1990년 돌아가실 때까지 10년 동안 그분 곁에서 함께 활동했던 것이 내겐 큰 행복이었다. 그 기간은 조영래 변호사 자신으로서도 온 몸과 정열을 불태운 황금기였다. 시대가 영웅을 만든다더니 5공의 엄혹한 군사독재정권과 민주화의 이행기였던 그 시기는 바로 조영래를 전설적 인물로 만들었다. 어둡고 고통스런 나날이었지만 그것은 새벽의 짙은 어둠에 다름 아니었다. 그는 짧았지만 굵고 진한 삶을 살았다. 그 곁에서 나는 많은 것을 보고 배웠다. 많은 사람들 또한 그로 인해 절망적 세월 속에서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인간을 사랑하는 방법을 안 사람이었다. 가난하고 억압받고 고통받는 사람들과 함께 산 짧은 일생이었다. 빗지 않은 머리, 아무렇게나 물어 드는 담배, 누구와도 쉽게 터놓고 대화하는 모습. 서울대를 수석입학했던 천재였지만, 그는 아무에게도 거부감을 주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집중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부천서 성고문사건 1심 변론 요지서는 내가 초안을 썼다. 그러면 그는 그것을 가지고 처음부터 다시 쓰기 시작해 재판이 시작되기 전까지 초읽기로 몰리면서 써 내려갔다. 무서운 집중력이었다. 신문이나 잡지에 칼럼 하나를 쓰면서 그는 밤샘을 하기 일쑤였다. 글을 쓰고 난 다음날이면 재떨이에 담배꽁초가 수북이 쌓였다고 한다. 결국 그는 암을 얻고 말았지만.

더구나 그는 명쾌한 판단력과 실천력을 갖춘 사람이었다. 부천서 성고문 사실을 전해듣고 이미 그는 5공 정권을 뒤흔들 사건이라고 판단하여 그 사건에 전력을 다했다. 6·29 후 대선에서 양김 분열은 필패일 수밖에 없음을 단언하고 단일화운동에 나섰다. 그러한 판단력에는 물론 언제나 진지하게 묻고 다니고 연구하는 자세가 뒷받침되어 있었다.

마침내 서울대병원에 입원하여 폐암과 싸우고 있을 때 그는 나에게 말했다. 이제 변호사 그만두고 좀더 넓은 세상을 보라고. 당시로는 한 귀로 흘려들었으나 그가 세상을 떠난 후 그 권고는 새삼 큰 목소리로 다가왔다. 그 말대로 나는 영국에서 1년, 미국에서 1년을 지낸 다음 돌아왔다. 그리고 새로운 기분으로 시민운동을 시작했다. 바로 참여연대의 시작이었다. 그 운동의 과정에서 조 변호사님과 함께 한 세월동안 배웠던 그 모든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

조 변호사님의 죽음은 많은 사람들에게 아쉬움을 남겼다. 좀더 많은 일을 할 사람이라고 입을 모았다. 그 명쾌한 판단력과 돌파력을 아쉬워했다. 군사독재 시기에 오히려 운동은 단순했다. 그러나 지금은 용기 이상을 필요로 한다. 사태는 훨씬 복잡하다. 더 깊은 지혜가 필요하다. 그럴 때마다 나는 묻는다. “조영래 선배가 살아있다면 지금 어떻게 했을까?”라고.

박원순 참여연대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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