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1년 01월 2000-12-22   2358

[권은정의 파워인터뷰14] 그가 있어 행복하다 – 영화감독 이광모

광화문 구세군 건물 바로 맞은 편에 시네큐브 극장이 있다. 12월초에 문을 연 멀티 플레넘 영화관인 이 극장은 광고전단에 이런 말을 써 놓았다. ‘번지점프 보다 짜릿한 영화관’. 하지만 이 극장의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모두 책임지고 있는 이광모 감독은 ‘짜릿’하다는 말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그는 가죽점퍼도 안 입었고 야구 캡도 안 썼다. 건물 일층에 자리한 현대적인 감각의 커피숍 창문으로 쳐들어오는 햇살도 무심하게 받고만 있다. 이럴 때 선글라스를 꺼내 쓸 법도 한데 말이다. 그는 그냥 아직도 독감의 여진에서 헤어나지 못했다며 아침 분위기에 맞게 단정한 자세로 커피를 마실 뿐이다. 내 상상 속의 영화감독 이미지를 빡빡 지우며 첫 번째 질문을 한다.

개관기념으로 ‘아듀 20세기 영화제’를 준비하셨지요.(12월 18일부터 23일까지) 어떤 영화를 보여 주실 건가요?

그 동안 저희 백두대간이 국내에 배급했던 영화 15편들을 보여주는 행사입니다. 세계 영화사에 길이 남을 20세기 명감독들의 걸작들을 필름으로 감상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 영화제는 시네큐브의 역할이 어떠할 것인지를 간단히 알리는 서곡이다. 이제 영화다운 영화에 목말라 하던 사람들에게 오아시스가 생긴 것이다. 영화의 다양한 질을 생각한다는 이 멀티 플레넘 극장 씨네큐브는 고급이면서 대중적인 영화에서 예술영화, 단편, 다큐멘터리, 애니메이션을 지속적으로 공급할 것이라고 한다.

하여튼 12월중에는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의 <불안을 영혼을 잠식한다>, 또는 안드레이 타브코브스키의 <노스텔지어> 같은 영화를 감상하실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어째 영화가 너무 예술적으로 들리지 않는가? 난이도가 높으면 자칫 심심해질 수 있는데. “움직이는 것은 모두 쓰러뜨리고 움직이지 않는 것도 다수 쓰러뜨리는” (아놀드 슈의 말) 영화에만 길들여져 온 우리가 아닌가.

예술영화가 다 어려운 것은 아니지요. 하지만 그간 예술영화 하면 좀 어렵게 느껴져 온 현실에 대해서는 인정합니다. 우리는 영화의 다양성을 별로 생각해오지 않았으니까요. 영화는 가장 먼저 다양한 문화의 스펙트럼으로 보여져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나라처럼 영화에 대한 극단적인 현상이 있는 나라도 드물어요.

영화를 시작한 이후지금까지 그가 가장 관심을 기울여온 분야가 바로 다양한 영화를 관객에게 보여주기일 것이다. 질적으로 업그레이드 된 다양한 영화. 국제적으로 성공을 거둔 그의 아름다운 영화 <아름다운 시절>도 결국 그의 이런 열렬한 관심의 결과일 것이다

그는 원래영문학을 전공하던 영문학도였다. 영화를 시작한 게 대학원을 마치고 나서였다. T.S. 엘리어트로 석사논문을 쓰던 그는 직접 시를 쓰기도 했다.

제가 영화공부를 하겠다고 했을 때 부모님께서 반대를 많이 하셨어요. 계속 공부를 해서 대학에 남기를 기대하셨거든요. 그런데 문학의 한계라고 할까, 제가 느끼는 것을 백 퍼센트 표현할 수 있는 것이 필요했지요.

영화로 인생을 승부 하겠다고 마음을 굳히고 유학을 갔지만 당시 그는 한국 영화계 인사들 중에 한 명도 아는 이가 없을 정도로 ‘맨주먹 붉은 피’였다. 그는 UCLA에서 영화학 석사를 마쳤다. 그 동안 한번도 자신의 결정을 후회한 적이 없었다. 후회는커녕 너무나 재미있었다. 영화와 그가 서로 서로를 스펀지처럼 빨아들이던 시대였다. 그렇지만 학비를 벌기 위해서는 고달픈 시간을 감내할 수밖에 없었다. 접시 닦기는 기본이었고 비디오 찍는 일에서 도서관 일, 관광 안내원 등등, 길거리에서 선글라스도 팔아보았다.

그는 관객 만들기 운동이 좋은 영화 만들기 보다 우선한다고 주장했다. 91년도에 한국으로 돌아와 그는 3년 넘게 실업자 생활을 했다. 강제로 느림의 시간을 보내야만 했던 시절이었다. 좋은 영화를 만들고 싶었지만 아무도 그의 뜻에 힘을 실어주려 하지 않았다. 마침내 스스로 관객을 만들지 않으면 영화를 만들지 못하겠다는 절실한 결론을 내린 그는 영화제작의 전초작업이며 토대를 이루는 운동을 시작한 것이다. 한국영화의 중추역할을 하리라는 뜻으로 영화사 이름을 <백두대간>이라고 지은 것도 바로 이런 결의에서였다.

관객은 스스로 성장하기를 원하는데 영화인들은 그저 적당히 간지럼을 태워서 웃겨주면 된다고 생각해 온 거지요. 좋은 영화를 향유할 관객이 없기 때문에 좋은 영화가 없는 겁니다. 저는 영화를 만드는 일은 단순히 엔테터이너로서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를 문화운동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양한 영화를 소개하고 보여줌으로써 획일적인 사고의 틀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시대의 운동의 주요 덕목이 아닌가.

문화운동이라고 할 것까지는 없지요. 저는 계몽주의자가 아니에요. 제가 좋아하는 것을 하는 거지요. 미국에 영화공부 하러 갔을 때만 해도 작품을 찍겠다는 생각 같은 것은 하지 않았지요. 그런데 그곳에 가서 참 좋은 영화를 많이 접할 수 있었지요. 문학이 내게 주었던 감동과 희열에 비길만한 것을 영화를 보면서 영화에 대한 생각이 달라진 겁니다. 영화는 교육이 아닌 환경의 문제라는 생각을 한 거지요.

그는 경기도 이천에서 초등학교 5학년 때까지 지냈다. 그의 영화에 나오는 풍경들을 보노라면 아마 시골에서 살아보았을 거라는 짐작을 하게 만든다. 여름강가나 가을 억새가 피어나는 길가. 국제적으로 상을 휩쓴 그 영화를 두고 나는 묻고 싶은 게 많았다. <아름다운 시절>에서 두 소년이 당시 6.25직후 시대배경에 비해 발육상태가 너무 좋은 것 아니었나요? (내가 생각해도 그리 예술적인 질문은 아닌 것 같다.)

하하하 …..그렇지만 발육상태가 나빠 보이면서 연기를 못하는 쪽보다는 연기를 잘하는 쪽이 더 낫지요. 문제는 아이들의 환경이 많이 바뀌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우리 시대와 요즘 아이들이 얼마나 다른가 실감을 했는데 요즘 아이들은 고무신을 신고 못 걷는 거예요. 우리는 좀 불편하긴 해도 신고 걸을 수 있잖아요. 얘들은 나이키 세대잖아요. 신발 밑창이 쿠션이 된 것만 신어왔기 때문에 고양이 걸음처럼 약간 밀면서 걷는데 그게 오히려 영화상의 시대상과 어울리지 않아서 문제였지요.

<아름다운 시절>에서는 클로즈 업 되는 장면이 거의 없다. 우리는 누가 대사를 하면 재빨리 카메라가 그 배우의 눈동자 굴러가는 것까지 보여주는 영화에 익숙해져 있는데 카메라를 고정시켜 놓은 듯한 <아름다운 시절>을 보면서 그 아름다운 색감과 영상에도 불구하고 조급증에 시달린 관객도 더러 있을 것이다.

그건 카메라를 통해 시점을 읽게 하기 위한 카메라 언어지요. 88년도에 제가 아직 유학 중이었던 당시 아버님이 돌아가셨어요. 한국에 잠시 돌아와 있으면서 아버지의 세대, 우리 전세대의 삶에 대해 생각을 하다가 <아름다운 시절>의 시나리오가 시작된 셈인데요. 그때는 제게도 힘든 시기였지요.

우리 부모님들은 도대체 어떻게 인생을 겪어 나왔을까. 그 분들에게 가장 어려웠던 시기가 언제였을까에 대해 생각하다가 한국전쟁이라는 시대적 배경을 작품으로 선택하게 된 거지요. <아름다운 시절>은 지금 우리가 그 시절을 회고하면서 응시하는 시점이지요. 어떤 누구의 구체적인 삶을 세세히 보여주는 게 아니거든요. 전지적으로 모든 것을 다 보여주는 멜로 드라마적인 시점이 아닌 거지요. <아름다운 시절>에서 카메라는 삶의 의미란 뭔가를 관조 할 수 있게 지켜보고 있는 것이지요.

<아름다운 시절>에 자신의 문학적 세계가 아주 많이 투영되어 있는 게 아닌가요?

그렇게 안 보이려고 노력한 건 데요. 사실 <아름다운 시절> 시나리오는 굉장히 문학적인 거였어요. 문학공부를 하다가 영화 공부시작한 지 3년만에 쓴 시나리오거든요. 영화가 뭔지 아직 모를 때 쓴 거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런데 96년도에 보니까, 그때는 영화공부를 십 년은 했으니 영화가 뭔지는 쪼끔은 알게 된 때지요. 막상 영화감독으로 그 시나리오를 보니까 너무나 마음에 안 들었어요. 너무 문학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소설의 장점을 살리기 위해 쓴 시나리오였는데, 그 동안 사실 영화에 대해 생각이 많이 바뀌어 있었거든요. 영화적인 감수성으로 가기 위해 문학적 감수성을 모두 파괴시켜야 되겠다고 생각이 들었지요. 그런 판단에서 많이 고쳤지요. 문학적인 틀을 부수고 영화적인 해결방법을 위한 미학적 결단이었는데 감독으로서의 희생이 따르는 것이기도 했지요. 느낌, 얘기의 많은 것이 희생되었다고 볼 수 있지요.

그가 <아름다운 시절>을 만드는데 거의 십여 년이 들었다고 한다. 예술인으로서의 장인정신이다. 그는 십 몇 년이란 너무 부풀려진 것이라고 짧게 말했다. 시나리오 쓰기부터 시작하면 그렇지만 제작에 소요된 시기는 그 절반이면 설명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아름다운 시절>은 다른 이들의 혀를 내두르게 할만큼 지독한 열성과 투철함의 결과임에 분명하다. 그는 어쩌다 화면 속으로 1950년대의 소리와 다른 요즘 소리가 비집고 들어오면 가차없이 NG를 놓았다고 한다. 그는 영화 만들기란 현실과의 싸움에 다름 아닌 작업이라고 했다.

영화란 어쩌면 감독의 인생관이나 그런 문제와는 별도로 현실과의 싸움이라고 할 수 있지요. 보이지 않는 현실이지요. 영화를 만드는 현실은 소설을 만드는 현실과 다른 것이지요. 그 현실을 극복하는 게 여간 힘드는 게 아니란 거지요. 관객이나 영화 평론가들이 생각하는 영화와 감독이 생각하는 영화는 다른 것이지요. 평론가들이 아키라 구로자와에게 당신의 구도가 너무 좋다. 어떤 미학적인 이런 구도를 짰느냐고 물었더니 그가 말하기를 ‘이 구도에서 일 센티 만 더 움직이면 소니 공장이 보이고 왼쪽으로 좀더 나가면 공항이 보인다.

내가 잡을 수 있는 공간은 현실적으로 이것밖에 없었다.’ 라고 대답했거든요. 영화에 당연히 미학적인 게 들어가는 것이지만, 사실 현실적으로 더 넓히고 싶어도 더 넓힐 수 없는 상황인 거죠. 현실의 제약을 너무 많이 받는 게 영화예요. 영화만 봐선 이런 것들을 헤아릴 수 없는 거지요. 평론가들만 해도 영활 안 만들어 봤으니 진짜로 엉뚱한 소리 많이 하거든요.

나도 지금 엉뚱한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아, 난 이래서 예술하는 사람들과 같이 얘기하는 게 겁이 난다. 나의 무식이 무지막지하게 드러나는 것을 피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매스컴을 통해 전달되는 것들이 순수하지 못해요. 어쩔 수가 없어요. 대중들도 순수한 것을 좋아하거나 즐기기보다는 무시하는 경향이 많거든요. 관객동원숫자만 해도 매스컴을 통해 나가면서 많이 뻥튀기가 되지요.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를 4천만이 봤다고 하면 안타까워하고 더 많은 사람들이 봐야겠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지요. 심지어 언론에서는 어떻게 받아 들이냐 하면 4천만이 사는 나라에서 겨우 4천 명밖에 안본 영화를 우리가 왜 써 주냐는 거예요. 쓸 가치가 없다는 거예요. 무시되어 버리는 거지요. 소수의 소중함이 철저히 무시되는 거지요. 그러다 보니 아주 대중적인 것, 마치 백만이 되는 것처럼 모두 다 애써야 하는 거지요……. 홍보라는 게 참 답답할 때가 많지요.

순수가 거부당하는 것을 분명히 알면서 순수한 것에 집착하는 것은 외곬수적인 고집 아닌가요?

글쎄요. 외골수인지는 모르겠어요. 하지만 제가 좋은 것을 하니까요. 전 제가 좋아서 그렇게 만드는 거지요. 솔직히 영화관에 가서 작품들을 보고 있노라면 정말 못 보겠어요. 솔직히. 대중들이 이걸 즐기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너무나 사기를 당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뭔가 대중을 조작하는 보이지 않는 권력이랄까, 제3의 권력 말이죠. 문화적인 권력에 우리가 지배당하고 있다는 생각, 말이 안되다는 생각이 드는 거지요. 그런 측면에서 소수를 존중한다는 거지요. 소수에 대한 이데올로기적인 선호가 아니라 제가 그런 것을 좋아하니까. 그런 것을 만들고 싶고 보여주고 싶고 그런 것이지요.

<아름다운 시절>으로 국제적인 성가를 얻으셨는데 여건이 많이 좋아진 거지요?

외형적으로는 성공했다고 볼 수 있지요. 하지만 작가로서의 현실은 많이 변하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지금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예요. 99 프로 힘들지만 1 프로의 가능성만 가지고 하는 것이지요. 지금 <어머니>만들기도 여건이 어렵거든요. <아름다운 시절>은 더 열악했는데도 만들어 냈으니까 앞으로도 잘되겠다 하는 생각을 하는 거지요. 한국 영화의 현실이라고 할 수 있지요. 하지만 상품성으로 봤을 땐 투자가치가 없는 거지요. 영화제작자들은 돈을 보고 결정하니까요.

<어머니>는 요즘 구상하고 계시는 작품인가요?

<어머니>는 분단과 이산가족의 문제를 다룰 작품입니다. <아름다운 시절>이 과거라면 <어머니>는 현재의 문제점과 해결책을 찾아가는 작품이 되겠지요. 저의 집안이 분단의 아픔을 안고 살아왔습니다. 6.25 당시 할아버님과 아버지만 남쪽으로 내려오셨어요. 다른 분들은 고스란히 북에 남아 계셨지요. 결국 다시는 못 만난 채 할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아버지가 돌아가셨지요. 어이없고 말이 안 되는 이런 상황을 언제 한번 작품으로 만들어 봐야겠다 싶었지요.

영화를 하면서 가장 힘든 일을 어떤 것인가요?

생각과 현실이 제때에 맞아떨어지지 않는 거지요. 생각이 샘솟을 때는 파이낸싱이 안 되는 거지요. <아름다운 시절>경우만 보더라도 몇 년 뒤에 제작에 들어갔던 겁니다. 시나리오를 쓰고 막 만들고 싶어할 때는 그 생각이 저를 지배했지요.88년에는 눈만 감으면 동네 전경이 떠오르고 그 감흥에 눈물도 흘러내리곤 했는데 막상 파이낸싱, 캐스팅, 스태핑 다된 96년도에는 감정이 다 날아가고 없었어요. 그걸 되살리는 게 참 힘들었어요. 지금은 <어머니>를 만들고 싶은데 막상 이 영화를 찍을 형편이 마련 될 즈음에는 내가 에로물을 찍고 싶어할지도 모르는 일이지요.

최근 몇 년간 한국영화가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많이 성장했다고 하는데요?

제가 워낙 다른 사람들과 생각을 달라서요. 전 한국영화가 성장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오히려 후퇴했다고 봐요. 저는 한국영화의 전성기는 1960년대였다고 보거든요. 그때는 <마부>, <오발탄> 같은 영화가 있었어요. 한국영화가 70년대까지는 100편, 작년, 재작년에 40편 50편이 만들어졌고 올 한해 동안 70편이 만들어졌지만 질적으로도 양적으로도 팽창이나 성장이라고 볼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더 취약해졌다고 볼 수 있지요. 한국영화는 일단 인프라 구축이 시급해요. 분배의 문제예요. 몇억의 개런티를 챙겨 가는 스타가 있지만 이들을 제외한 스탭들의 90프로 이상이, 생활이란 게 상상을 불허합니다. 연봉이란 개념을 적용 할 수 있다면 일년에 천 만원, 아니 백 만원도 안돼요. 완전히 착취구조이지요. 이러니 좋은 인력들이 왔다가 결국은 못 견디고 방송계나 CF계로 나가버려요. 한국에서 가장 열악한 시장이 영화하고 대학인 것 같아요, 대학의 시간강사나 영화계 종사자들이나 불러주면 감사해라 하는 거죠.

한국영화가 장기적으로 발전하려면 하부구조를 굳힐 수 있는 형평성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남한테 강요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요. 스타 시스템에서 보완할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해요, 영화보급 문제에서도 획일화되고 다양하고 대안적인 문화육성을 해야지요. 그러나 우리 영화계의 전체 사이즈가 굉장히 작은 게 문제죠. 누군가 예를 들기를 명동에 있는 롯데백화점 한 곳 보다 한국영화계 매출규모가 작다는 거예요.

배우와 감독의 관계는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배우는 감독의 분신이라고 생각해요. 감독이 100의 지분을 갖고 있다면 배우도 똑같이 100이지요. 배우의 생명은 그 역을 소화해서 그 역할을 어떻게 잘 살려낼 수 있느냐 그것이죠. <포르노그래픽 어페어>에서 여주인공 나탈리 베이 만해도 그 배우 아니었으면 그 영화는 이류가 되었을 겁니다. 그만큼 배우는 영화를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있는 존재인 거지요.

그는 자신의 성에 차는 배우로 메릴 스트립을 들었다.(나도 이 매력적인 배우를 억수로 좋아한다. 영화를 찍을 때는 상대방 남자배우와 금방이라도 사랑에 빠져 죽을 것 같은 표정을 짓다가도 촬영이 끝나면 재빨리 짐 챙겨서 아이 넷과 남편이 기다리는 집으로 총알같이 간다는 그녀. 즉 다시 말하면 쫑 파티 같은 것은 안 한다는 얘기 같다.) 남자배우로는 마론 브란도.(물론 이 배우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다. 하지만 그냥 넘어가자. 왜 좋은 배우인지는 여러분이 더 잘 아실 테니까)

스크린 쿼터제에 대해 어떤 입장이세요?

한국영화보호 육성차원에서 전 당연히 지지하는 편입니다. 그러나 제도는 제도일 뿐 예술이 걸어가야 할 길은 따로 있는 것이지요. 우리가 결국 가야할 길을 자생력을 가진 예술 쪽이지요. 스크린 쿼터는 신의 손이 아니죠. 제가 무정부적인 성향이라서 그런지, 정부가 들어서면 어느 것도 잘 안 되는 것 같아요. 특히 문화와 예술은 제도 아래에서 숨을 내쉴 수 없는 거지요. 자체 생명력을 가진 것은 스스로 커나가야 하는 게 가장 이상적인 것 아닙니까?

이런 생각에 동조하는 이보다는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더 많지 않을까요? 외로운 싸움 같다는 생각은 안 드세요?

그래도 전 운이 좋은 거지요. 저보다 더 어렵고 힘든 일을 하면서 더 고생하시는 분들에 비하면 그런 말은 과분한 것이지요. 이건 문화운동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제가 좋은 것을, 하고 싶어하는 것을 한다는 생각이지요. 전 계몽주의자가 아니거든요.

 
이 감독이 극장 안으로 안내를 해주었다.(이 감독을 졸졸 따라가니 극장표가 없는데도 입구에서 잡지 않았다. 하지만 난 본능적으로 잠깐 스톱했다. 잡힌 줄 알고. 아, 옛날 내 어렸을 적에 우리 동네에 가설극장이 왔었다. 제목은 <남자식모>. 주연은 구봉서. 나의 친구들은 재빨리 틈을 타 엉덩이부터 천막 안으로 들이밀면서 공짜구경을 시도했다. 여차해서 잡히면 ‘아-씨, 난 나갈려던 참인데 왜 잡고 그래요. 씨’)

디지털 편집실과 미디어 갤러리도 갖춘 씨네 큐브는 정말이지 ‘쿠-울’한 극장이었다. 톰 쿠르즈가 시사회를 가진 런던의 영화관 보다 더 나아 보였다. 최고의 음향장비에, 앞사람 앉은키가 전혀 문제되지 않게 의자 높낮이도 교정되어 있었다. 그리고 제아무리 다리가 긴 사람이라도 두 다리 뻗고 감상할 수 있도록 앞자리와 뒷자리 사이도 넓었다. 모두 이 감독의 작품이다. 그는 좋은 영화를 만드는 일뿐만 아니라 좋게 영화 볼 수 있는 좋은 환경까지도 완벽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고객 만족 정신. 그는 자신의 이런 행동을 일컬어 ‘순수하지 못한 감독의 짓’이라고 한다. 그러나 제발 이런 감독이 더욱더 많아졌으면.(어쨌든 난 극장 구경만 하고 나왔다. 아까운 공짜기회를 놓쳐 버렸다. 그러나 영화는 ‘한국 영화진흥기금’을 내고 봐야 제 맛이다.)

문화적인 다양성을 제일 우선으로 고려하는 그는 지식인다운 풍모를 지녔고 작품의 수보다는 오직 작품의 예술성을 생각한다는 그는 예술인으로서의 면모를 품고 있다. 그러면서 관객의 불편함을 챙기는 감독, 그가 있는 공간에 가면 우리는 행복할 것 같다.

‘그러면 우리 갑시다. 그대와 나……'(T.S. 엘리어트의 <J.A .프루푸록의 연가>중). 그곳으로.

글쓴이 : 권은정
한겨레신문과 한겨레21 런던통신원으로
오랫동안 일하면서 영국과 유럽을 취재했다.

그 과정에서 보통 사람, 특별한 사람, 유명한 사람, 덜 유명한 사람, 잘난 사람, 못난 사람들을 두루 만날 수 있었다.

저서로 <젠틀맨 만들기>, 번역서로 줄리언 반즈의 <그녀가 나를 만나기 전에>, 조아나 트롤로프의 <타인의 아이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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