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0년 06월 2000-05-15   3868

[권은정의 파워인터뷰4] 활동가의 아내 김의숙 선생님

매일 밤을 낮 삼아 돌아다니던 남편이 어느 날은 정말 너무 늦게 들어왔다. 새벽녘에 들어와서 주무시는 어부인이 깰세라 소리 죽여 양복을 벗고 있는데 잠 묻은 목소리로 아내가 묻는다.

“여보 몇 시죠?”, 화들짝 놀란 남편은 바지춤을 다시 올리며, “으응, 다섯 시 좀 덜됐어, 나 좀 일찍 나가려고 옷 입고 있어.”

그래서 그 날은 직장에 아주 일찍 출근했다는 얘기다.
하지만 이런 얘기를 웃자고 한다는 것은 우리 사회에선 좀 썰렁한 일이다. 갖가지 독립운동을 하느라 새벽녘까지 다니시는 남편들이 어디 한 둘이랴.

이번 주에는 시민활동가의 아내, 불철주야 운동하는 남편을 둔 아내는 남편의 그런 삶을 자신 안에 어떻게 수용하며 살아가는지 알아보려 한다. 사회와 전체를 위하는 대의명분이 가정과 개인의 안위와 평행해 둘 다를 모두 만족시켜 주었으면 하는 게 우리 모두의 희망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게 쉽지 않다는 것을 많은 이들은 이미 알고 있다. 특히 남편이 그 대의명분에 투신했을 경우 아내는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도대체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아가야 하는가 말이다. 중학교 교사인 김의숙 선생님 (42)과 남편 조희연 교수 부부는 이런 문제에 대한 최상의 연구대상이다.

“결혼을 하고 보니 아, 이렇게 사는 사람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처음엔 정말 옆에서 보기만 해도 정신이 없었어요. 제가 잘 때 들어오고 제가 나갈 때 자고 있었어요. 그래서 서로 얼굴 마주 보기가 상당히 힘들었었어요.”

그리고 올해 결혼 14년째를 보내고 있지만 지금도 남편은 정신 없이 바쁘다.

봄비가 오기를 간절히 기다렸건만 비는 오지 않고 대신 기온만 쑥 내려가는 월요일 오후, 아니 거의 저녁 무렵 그를 만났다. 선이 아주 단순한 짙은 회색 투피스가 썩 잘 어울리는 차림이었다. 옷은 그 사람을 잘 말해주는 언어중 하나이다. 깔끔하고 빈틈없는 성격일 것 같아 보였다. 하지만 남에게 부담을 주는 깐깐한 성격은 아니다. 한 두 마디 얘기를 나눠보면 누구나 그가 참으로 솔직하고 쾌활한 성품의 소유자라는 것을 금방 알게된다. 달빛아래 꽃 그늘은 일찌감치 포기하고 우리는 찻집에 들어가 얘기를 시작했다. 성공회대학 교수면서 참여연대 초기 창립자고 각종 사회단체활동에 책임을 지거나 혹은 빠져서는 안 되는 위치에 있는 조희연 교수. 그를 남편으로 둔 사람일 경우 상당한 각오를 하고 살아가야 할 것 같은데 과연 어떠하신 지요?

“이제는 워낙 만성이 되어서요. 저렇게 살면서도 견디는 것을 보면 용하다는 생각이 들지요. 그런데 바쁜 남편이 좋은 점은, 워낙 같이 있을 시간이 없으니 같이만 있어줘도 좋은 거예요. 아무 일 없이 곁에 있기만 해도, 얼굴만 맞대도 좋은 거죠. 마치 신혼 같은 분위기가 지금도 있어요. 그리고 사실 남편이 꼭 필요한 순간에는 옆에 있어주는 편이니 저로서는 불만이 없지요.”

아니, 이렇게 긍정적일 수가! 너무 외교적인 발언이 아닌가? 하지만 김 선생님의 표정으로 보아 이 말이 진심임에 틀림없어 보였다. 남편이 너무 정신 없이 살아서 자기 나름대로 살아갈 방도를 찾았거나 찾고 있다는 그런 대답이 나와야 하는 건데, 약간의 혼선이 빚어진다. 하지만 당황할 것까진 없다. 김의숙, 조희연 부부는 모든 부분에서 기대와 포기와 만족이 서로 편안하게 제 자리를 찾아 들어가 어느 귀퉁이에서도 삐걱대지 않을 연륜인 결혼 14년째 베테랑 부부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그래도 남편이 정신 없이 바쁘면 아무래도 집안의 크고 작은 일이나 아이 키우는 일등 모든 게 혼자의 책임으로 돌아올 텐데요?

“그런 편이죠. 하지만 제가 옆에서 꼭 중요한 일이니 기억해야 한다고 노래를 부르면 집안 일도 어지간히 챙겨나가는 편이에요. 그리고 아이 키우는 일 같은 것은 제가 친정 부모님 도움을 많이 받아서 크게 힘든 줄 모르고 살아요. 호호호…”

인터뷰 나간다는 말을 듣고 남편으로부터 뇌물이나 기타 다른 압력을 받았을 심증을 굳히지 않을 수 없다. 그럼 좀 다르게 접근해 보자. 조금만 부풀려 얘기해 보자면 몇 천명이 넘는 사람들의 전화번호를 적어 다니는 남편과 도대체 어떻게 스무쓰하게 살아가는지 그 비법부터 물어볼까?

“전 결혼 초부터 워낙 바쁜 남편에 익숙해 있어서인지 갈등이란 게 없어요. 불만이라면 좀 있을까. 애 아빠는 자기 일이 많다고 해서 집안 일에 아예 무관심하지는 않아요. 성격이 자상하고 부드러운 사람이에요. 만약 무뚝뚝하고 권위적인 그런 사람이면 우리도 갈등의 골이 깊었을지도 모르죠. 바깥일을 해내는 그 추진력과 함께 집안에서도 민주적이고 하니까, 그런 성품이 우리 가정을 받혀주는 것 같아요. 그것 때문에 전 애 아빠를 좋아하고, 사실은 어떤 면에서는 존경하지요. 그렇게 많은 일을 동시에 해나가는 것 보면서, 나 같으면 한가지도 제대로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김 선생님도 대학에서 사회학을 전공했다. 그리고 일을 통해 남편을 만났고 본인도 계속 교직생활을 통해 우리사회의 발전에 늘 관심을 보여왔다. 그래서 남편과의 관계는 일종의 동지적 입장에 기반을 둔 것 아닐까?

“글쎄요, 제가 뭐 활동한다고 말할 수는 없지요. 하지만 남편이나 제가 같은 사회학을 공부했고 관심분야도 거의 같으니 굳이 활동을 하지 않는다 해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형편이지요.”

처음에 어떻게 만나셨나요? 라는 질문을 던지면 사람들은, 중매결혼을 했든 열렬한 연애로 했든 누구든 간에 즉각적인 대답을 하지 않는다. 결혼 햇수가 지긋한 사람이라도 예외는 아니다. 모두 한결같이 두 눈을 반짝이며 먼저 호흡부터 가다듬는다. 아무렇지 않게 그냥 말할 수는 없다는 듯이, 도저히 그렇게는 말하지 않겠다는 듯이, 그 아름다운 시절을 회상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아이들 가르친 지 4년쯤 되었을까, 한 출판사에서 학생들에게 쉬운 사회학을 가르치기 위한 책을 만들자는 제의가 왔었어요. 그때 애아빠가 다른 일도 하면서 (그야 당연히!) 그 출판사의 기획 일을 맡고 있었는데 그 일로 알게 된 거지요. 처음엔 그냥 언뜻 본 사이였어요. 몇 달 걸려 마침내 책을 냈지요. 그런데 어느 날 학교로 전화가 왔어요. 출판관계 일인가 싶어서 나갔죠. 종로의 어느 빵집에서 만나 얘기를 하고 있자니 마음이 참 편안해져요. 뜬금 없이 이런 저런 주제로 얘기하고 차 마시고 저녁 먹고 그랬죠. 처음 만났는데도 같은 전공이고 주제가 같아서였는지 아주 편안했지요. 헤어질 때 언제 다시 만나자는 약속도 하지 않았어요. 집에 돌아오는 버스를 타고 오는데 이 사람이 운명이다라는 생각이 들대요 (이때 그녀의 목소리는 떨렸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내 인연이라는 느낌이 들었어요.”

연애를 해본 사람은 잘 알 것이다. 그 다음의 수순을. 당연히 얼마 안 있어 다시 전화가 왔고 서로를 알아본 두 사람은 이제 불꽃 튀는 사랑을 하게 되었다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 아닌가.

“제가 성격이 좀 강한 편이라 학교 다닐 때 서클활동에서 남학생들이 말도 안되게 뭐라 하면 그냥 못 넘어 가는 편이었지요. 그런데 애 아빠를 만나면 그냥 전부 맞는 말만 하는 것 같았어요. 하여튼 그래서 만난 지 일년도 채 안 되어 결혼한 거지요. 왜 만나면 헤어지기 싫은 시기가 오잖아요.”

원래 조희연 교수는 결혼할 생각 없이 (믿거나 말거나) 총각시절을 일로 소일하며 보내고 있었단다. 당시 결혼한 친구 집에 방 하나를 얻어서 살고 있었는데 (이 부분에서 김선생님은 “나 원 참, 친한 친구라고 해도 그렇지 신혼살림 집에 있더라구요. 그 친구분들 정말 대단한 분들이지요”라고 주를 붙였다) 한번은 아주 심하게 앓아 누웠단다. 몸이 아프면 마음도 따라 아파지는 법. 혼자서 가기에는 인생이 너무 외롭고 힘들다는 느낌이 든 청년 조희연은 그래서 이젠 결혼해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아마 이 사람 저 사람 주변에 알고 지내던 사람들 생각을 많이 했는데 제가 떠올랐나 봐요. 그런데 제 전화번호를 몰라서 여기저기 수소문해 학교 전화 번호를 알아다가 전화를 했대요…”

역시 조희연 교수답다. 연애의 시발점도 역시 전화로 했으니. 아시는 분은 아시고 모르시는 분은 아실 때까지 모르시겠지만 조희연 교수의 별명은 ‘텔레폰 조’. 그와 마주칠 가능성이 있는 모든 분들은 항상 다음과 같은 질문을 예상하고 하루하루를 살아가야 한다. “혹시 전화카드 갖고 계시면 좀 빌립시다”

“맞아요. 아휴 말도 마세요. 어쩌다 겨우 시간 내서 가족여행을 갈 때도 운전을 하면서 전화를 해요.”

김선생님은 운전 중 휴대폰 사용을 모든 운전자에게 금지하는 법이 하루 빨리 제정되어야 한다고 열변을 토했다.

“요즘은 손으로 들지 않고 귀에다 대는 이어폰 전화를 하는데 가족 여행가면서도 그러니 나원 참, 말려도 안돼요. 부부싸움 할 때도 전화해요. 우리는 싸움이든 그냥 얘기든 주로 차를 타고 가면서 해요, 제가 운전을 안 하니 꼭 차를 이용해야 할 때는 남편이 태워주지요. 그때 겨우 서로 얼굴 마주 볼 시간이 생겨요. 그런데 제가 막 열변을 토하고 있는데도 전활 하는 거예요. 그 전화버릇은 신혼 때도 마찬가지였어요. 늦도록 기다리다가 지쳐서 이젠 자야지 하고 있으면 부시럭거리면서 들어와 그때부터 또 전화를 하는 거예요. 오죽하면 제가 전화 노이로제에 걸렸겠어요.”

그래도 요즘은 핸드폰이 있어서 낮 동안 전화를 하도 많이 해서인지 밤에 돌아와서는 심하게 전화를 하는 편이 아니란다. 물론 한 삼십분 몇 통 때리는 것은 기본이지만.

“저희가 애가 둘인데 애 낳을 때 한번도 곁에 없었어요. 병원에 데려다 놓기만 하고 그 와중에도 전화를 막 하더니 사람 만나야 한다고 씽 가버리는 거 있죠. 어떤 이들은 장미를 수십 송이 선물하기도 한다는데.”

조선 남자들, 특히 40줄의 남자들은 그런 것은 케네디 대통령이나 영화의 한 장면에서나 하는 일쯤으로 알고 있다. 현실세계에서는 일어날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로 알고 있는 듯 하다. 하여튼 한국통신으로부터 우수시민 상을 받아야 마땅할 텔레폰 조가 최근에는 휴대폰을 잃어버리는 사건이 일어났단다. 아니, 잃어버릴 게 따로 있지. 무기를 잃어버리고 다니시다니. 김 의숙 선생님은 남편이 너무 많은 일을 하다보니 정신집중이 잘 안 되는 게 아닌가 의심을 하고 있다. 하지만 세계적인 첼리스트 요요 마도 택시 안에다 자기 몸체 만한 첼로를 두고 내리지 않았던가. 손바닥만한 전화기쯤이야 잃기도 쉽다.

무지 바쁜 활동가 남편이 아내에게 여성으로서의 독립에 기여하는 바가 있지 않을까? 바깥일에 바쁜 나머지 집안 일에 일일이 콩 놔라 밤 놔라 하지는 못할 것 아닌가? 오히려 그런 관계가 편하지 않을까? 결혼 십 년째가 넘으면 남편이란 존재란 애틋하기보다는 그냥 그런가보다 하는 그런 존재 아닌가요? 하면서 유도질문을 던져 보았다.

“글쎄요, 그런 면이 없잖아 있겠지요. 사실 제 자신도 집에만 있다면 남편과 갈등이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그런데 교사란 직업이 만만찮은 에너지를 요구하는 일이고 집에 돌아와서 두 아이도 돌보는 일도 바쁘니 집에서 밥 먹는 경우가 아주 드문 남편이 그다지 미워 보이지 않네요.”

으, 이번 질문도 실패다. 혹시 인터뷰 나가기 전에 남편에게서 사주 받은 것 없냐고 다그쳤더니

“그런 게 있었으면 지금 나와서 흉보기가 훨씬 좋을 텐데 그것도 없네요. 하하하…”

자꾸만 예상답안을 피해 가는 게 미안한지 덧붙인다.

“그런데 사실은요, 제가 합리화를 잘 하는 편이라 서요. 될 수 있으면 낙관적이고 긍정적으로 모든 것을 해석하면서 살려고 하지요.”

주로 중학교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올해로 교직생활 18년째인 김 선생님은 아이들 가르치는 일이 늘 재밌다고 한다. 요즘 들어 교실이 붕괴되고 있다는 말과 함께 학생들의 변화도 예견하기 힘들만큼 빠르고 다양하니 그게 조금씩 힘들어 가는 것이 고민이긴 하지만 천직이라고 믿고 있다.

“맨 처음 학교 교사발령 기다리면서 한 일년정도 어떤 기업홍보실에 근무한 적이 있었는데 남녀차별은 물론이고… 정말 개인기업이 비인간적이더군요. 학교로 옮겨오니 천국으로 온 것 같았어요. 전 주로 남학교에 많이 근무하게 되었는데 남학생들을 가르치는데도 아주 단련이 되어 별 어려움이 없어요. 하지만 요즘은 아이들이 아주 감각적이고 도전적으로 변하고 있어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교육적인 것인지 난감해요. 그렇다고 교사들에게 적절한 교육을 해주는 것도 아니고..”

교사가 변하지 않으면 학교교육은 제자리인데, 변화에 가장 느리게 반응하는 것이 바로 학교라는 현실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요즘 들어 교사들의 갈등이 더욱 심해질 수밖에 없어요. 동료 교사중 한 분은 일찌감치 명예퇴직을 하시더군요. 저는 전교조 활동을 하는데 그냥 앞서서 하진 않고요. 제 성격상 무슨 일을 맡으면 대충 넘어가질 못하거든요. 그러니 제가 책임 있는 자리를 맡게 되면 우리 집안이 뭐가 될까 싶어 참는 거지요. 남편 한 사람만 나가서 일하면 족한 거죠. 용훈이(13), 성훈이(10) 애 둘 키우고 집안 돌보고 하는 몫은 제가 맡아야지요.”

김 선생님은 일주일에 22시간 수업을 맡고 있어 매우 빡빡한 시간표를 갖고 있다. 경력으로 보거나 수업 시수상 줄일 수 있지만 이왕 하는 김에 확실하게 가르치기 위해 굳이 다른 교사에게 시간을 넘겨주지 않았다고 한다. 학교 동료 교사들에게는 남편이 누구라고 밝히지 않는 게 또한 김 선생님의 원칙이다.

“전 제 자신으로 사람들 앞에 서고 싶은 거죠. 동료들 중에는 애 아빠를 이름만으로도 아는 분들이 꽤 있지만, 굳이 말하고 싶지 않지요. 누구 부인이라고 하면 괜히 선입관도 생길 것 아니에요?”

난 나 자신으로 선다는 자신에 찬 표정이 보였다. 결혼한 여성의 자신감에는 자기 일도 중요하지만 그에 따르는 경제적인 독립도 아주 큰 비중을 차지한다고 확신하는데, 그 점에서는 자기 직업을 가지고 있다는 게 아주 다행이라고 생각되시겠군요?

“그 점이 애아빠가 저와 결혼한 주요 요인 중에 하나가 아닌가 싶은데요, 하하하… 그러더라구요. 왜 나였느냐고 하니 같은 공부를 해서 얘기도 통할 것 같고 또 교사생활을 하니 여차하면 (즉, 활동 중 구속이나 뭐 그런 일) 혼자서 생활하는 것도 문제가 없을 것 같고.”

참, 활동가의 아내들이 가장 고통스러워 하는 게 주로 경제적인 면인데, 남편의 경제성적을 매기자면?

“저희는요, 어쩌다 보니 결혼 초기부터 제 월급을 남편이 고스란히 가져가서 제가 생활비를 받아썼어요. 온라인으로 통장째 애아빠가 가져갔어요.”

보통 반대 아닌가? 활동가 하면 으레 개인의 영리는 고사하고 활동실비조차 제대로 조달하기 어려운 게 우리 상황인데 부인이라도 확실하게 경제권을 잡고 있어야 안심이 되는 거 아닌가 말이다.

“글쎄, 그렇지요. 하지만 당시 애아빠가 갖고 있는 통장이 하도 많아서 다른 이가 그걸 관리한다는 게 불가능했지요. 지출되는 곳도 워낙 복잡하고 비용도 많이 나가는 것이어서 제가 인수받아서 해낼 재간이 없었어요. 그러다가 초빙교수로 나가면서 제게 통장을 주더군요. 결혼하고 8, 9년만인가, 제가 통장을 관리하게 되었지요.”

그런데 전혀 반가와 할 일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 동안 주로 돈 안 되는 쪽으로만 일을 했었기 때문에 통장을 넘겨주면서 엄청난 빚도 함께 얹어 주었단다.

“애 아빠 스타일이 한마디 던지면 그걸로 그 일에 관해서는 더 이상 얘기를 안해요. 그 얘기도 차 타고 가면서 해주었는데 빚이 1억 가까운 금액이었어요. 짐작은 했지만 그렇게 많은 줄 몰랐지요. 얼마나 속상하고 기가 막히던지 차안에서 한바탕 울었어요. 그리고 나서 그걸로 끝이에요. 방방 뛰어봤자 혼자만 그러는 거죠.”

요즘은 무슨 일이 있어도 월급을 제대로 가져다줄 것을 엄중하게 요구하고 있어서 그런 대로 점수가 괜찮은 편이라고 한다. 김선생님은 바깥일을 남편에게 직접 듣기보다는 신문이나 방송에서 듣는 경우가 더 많다. 이번 총선연대 일을 보더라도 낙천낙선운동이 음모론으로 몰릴 때는 혼자서 속앓이를 많이 했다고 한다. 몸싸움의 한복판에 있는 남편을 신문에서 볼 때는 며칠째 집에도 못 들어오며 고생하는 게 안쓰럽기까지 했지만 강단 있고 끈기 있는 남편의 행동이 자랑스러웠다. 특히 낙천낙선운동의 성공적인 결과를 보면서 우리사회의 시민활동의 한 기점이라고 스스로 생각한다. 활동가의 아내들은 늘 구속이나 수배에 대한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었을 텐데요?

“다행스럽게도 결혼 후에는 그런 일은 없었지요. 내심 걱정을 많이 한 부분인데, 우리 사회가 나아진다는 징표인지 그런 일은 없었어요.”

점쟁이한테 물어보면 “뭐 이렇게 복잡한 사람이 다 있어?” 라는 핀잔을 받을 정도로 일이 많은 사람, 제 명에 살려면 일 좀 줄이라고 닦달을 해도 말로만 그러마 하면서 어느 새 또 새로운 일거리를 찾아 시작해 놓는 사람. 부부싸움 중간 중간에도 전화로 사회발전을 도모하는 사람. 그런 활동가를 남편으로 둔 김 선생님은 정말 행복해 보였다. 그가 행복한 이유는 남편을 가장 현명하게, 그리고 능동적인 자세에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에도 몇 바퀴를 돌아가는 남편의 시계바늘을 따라가기 보다 그 바늘의 중심이 되어 살아가고 있는 김의숙 선생님. 믿음직하고 중심이 있는 여성인 그는 그야말로 자신의 일과 가정을 맹렬하게 꾸려 나가는 “현장활동가”였다. 그래서 “덕 있는 아내는 남편의 면류관이 될지니”라고 성경에도 나와 있지 않은가.

글쓴이 : 권은정
한겨레신문과 한겨레21 런던통신원으로
오랫동안 일하면서 영국과 유럽을 취재했다.

그 과정에서 보통 사람, 특별한 사람, 유명한 사람, 덜 유명한 사람, 잘난 사람, 못난 사람들을 두루 만날 수 있었다.

저서로 <젠틀맨 만들기>, 번역서로 줄리언 반즈의 <그녀가 나를 만나기 전에>, 조아나 트롤로프의 <타인의 아이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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