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1999년 12월 1999-12-01   19600

이근안이 자백하는 걸 보니 측은하기도 하대요. 하지만 지금 화해나 용서는 할 수 없습니다.

고문기술자 이근안과 조작간첩 함주명의 빼앗긴 16년

한 남자가 서 있다.

딥블루의 더블재킷, 사각의 안경테. 조용필처럼 작은 체구에 마디굵은 손가락. 그는 고문기술자 이근안에게 붙잡혀 간첩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옥살이했던 조작간첩 함주명 씨(69세)다.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견디기 어려운 최후의 악랄한 고문. 그에 못이겨 손가락을 몇번 까딱까딱 움직였던 게 모두 진실로 타이핑되어 그를 옭죄는 사슬이 됐다. 너무나 끔찍해 차마 입에 담기조차 껄끄러운 가혹행위들. 그는 스스로 거짓자백을 하고 차라리 간첩신세가 돼버린다. 그렇게 16년, 건장하던 초로의 신사는 어느덧 칠십을 바라보는 노인이 돼버렸다.

을씨년스런 어느 늦가을의 오후, 길음동 주변 중국집에서 그를 만났다. 3척 담장 아래 갇혀 지냈던 지난 세월을 되돌리려니 목이 메였던지 그는 독한 배갈 한 잔을 단숨에 털어 넣었다.

퉁퉁 부은 어깨를 볼펜심으로 쿡쿡

1983년 2월 18일 오전 9시, 협진공영(주) 이사로 재직하던 함주명 씨는 종로 기독교회관 시청각실과의 거래를 마치고 나오다가 불곰처럼 생긴 험악한 사내에게 질문을 받는다.

“함주명 씨세요?”

“예, 그렇습니다만….”

길 건너 세워진 차에 태운 후 느닷없이 옷을 벗으라더니 그걸로 그를 뒤짚어씌웠다. 아무런 영문도 모른 채 그는 어디론가 실려가고 있었던 거다.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 그때부터 63일 불법구금중 43일간의 고문이 시작된다.

“80년 5월 광주사태를 배후조종하기 위해 남파된 간첩 이창용(본명 홍종수)의 제보에 따르면 당신은 우순학이란 여자의 남편으로 군사정전위원회 북한측 담판요원으로 활동했다. 따라서 그녀는 당신 때문에 혁명가 가족대우를 받고 있는 것으로 안다. 그녀의 남편인 당신은 지금 남파돼 북한을 위해 일하고 있는 것 아니냐?”

얼토당토 않은 주장을 하며 그를 암약간첩으로 몰아가기 시작했다. ‘우순학’은 그가 한때 머물던 하숙집의 주인 딸이라고 주장해도 먹혀들지 않았다.

“한 일주일동안 잠을 안재우더군요. 사람이 일주일동안 잠을 안자면요, 몽롱한 정신상태가 지속돼 마치 꿈처럼 모든 감각이 뒤떨어지고 먹먹해져요. 그런 후에 온몸을 개패듯이 패요. 인간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잔인하게. 거의 실신상태가 될 때까지…. 이런데도 시인안해? 그러면서 퉁퉁 부어 옴쭉달싹 할 수 없게 된 양 어깨를 볼펜심으로 쿡쿡 찌르는 거예요. 그래도 부인하면 사람 하나 딱 누울만한 칠성판에 뉘어놓고 사지를 찢어 다섯 군데로 묶는 장치가 있어요. 그렇게 꼼짝할 수 없게 되면 이근안이 내 가슴 위로 올라타. 그리고 수건을 입에 덮어씌운 다음 샤워꼭지를 들이대면서, 시인해! 시인해! 공기는 안 들어오고, 물만 들어오는 거지. 그래도 시인 안하면 새끼발가락에 플러스 마이너스로 전류를 흘려보내요. 온몸에 전류가 흐르면 완전히 죽어나가게끔 돼요. 그때 희미하게 무슨 소리가 들리면, 죽지 않으려고 손가락을 까딱까딱하는 거예요. 그럼 ‘그만, 풀어줘’. 그런 후 약간 정신을 차리면 조서 쓴 걸 보여줘요. 보면 다 엉터리로 조작돼 있지. 그럼 난 그렇게 간첩질하지 않았다고(원래 그런 적이 없으니까) 주장하면 또 고문이 시작되는 거예요. 이 새끼, 아직 정신 못차렸다면서. 안 당해본 사람은 몰라요. 이근안이 왜 고문기술자인줄 아세요? 딱 죽기 직전까지 고문하기 때문이에요. 죽지않을 만큼 사람을 괴롭혀서 뭐든 시인하게끔 하는 지옥의 사자. … 요즘도 내가 잠자다 깜짝깜짝 깬다면 믿겠어요?”

그는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훔쳤다. 그리곤 말문을 잇지 못했다. 한참동안 연거푸 한숨을 몰아쉬고는 그의 학창시절로 시계를 거꾸로 돌렸다.

1950년 당시 그는 개성에서 부유한 가정의 막내 아들로 태어나 개성상고를 다니고 있었다. 큰 형은 개성여고 배석장교로, 둘째 형은 육사에 합격하여 입학만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6·25동란이 나자 형들과 가족은 먼저 피난을 가게 됐고 그만 혼자 개성에 떨어져 남게 되었다. 8월쯤 학교 소집이 있어 가보니 인민군이 학교를 포위하고 평양근처 승호리에 학생들을 강제징집, 훈련을 받게 했다. 고된 훈련 끝에 그는 전방에 배치됐고, 총탄이 빚발치는 엄혹한 전장에서 폭격을 맞아 좌측 눈에 부상을 입었다. 그후 중국 길림성에 있는 병원으로 실려가 수술을 받았지만 끝내 실명하고 만다. 인민군측은 그에게 퇴원후 뭘 하고 싶냐고 물었다. 못다한 공부를 더 하고 싶다고 말하자, 그들은 김일성대학 예과(본대학 입학전에 다니는 과정) 무역경제학부에 그를 입학시켜줬다. 그렇게 2학년을 다니던 해 휴전협정이 일어났다. 그는 부모형제는 모두 이남에, 자기 혼자 이북에 남아 있다는 사실이 서럽고도 쓸쓸해 어떻게든 이남에 가서 가족들과 함께 살고싶다는 생각을 했다. 후일, 어머니가 혼자 개성에 남게 된 그를 찾아 포하를 뚫고 개성까지 왔다가 전쟁터로 끌려간 그를 찾지 못하고 되돌아갔다는 소식을 듣고나니 더욱 더 그의 마음은 이남으로 쏠리기만 했다.

남파간첩 홍종수와 함주명, 그리고 이근안

그후 그는 북한에서 3개월간 남파를 위한 공작원교육을 받는다. 그리곤 “남하하면 일단 대학에 입학, 동조세력을 규합해 6·25와 같은 결정적 시기에 봉기하라”는 지령을 받았다. 그렇게 군사분계선을 넘은 함주명 씨는 54년 4월 14일 넘어오자마자 미군정 치하 미군부대에 자수한다. 지금같았으면 대대적 환영이라도 받았을텐데, 그때는 전시라 자수인정도 받지 못하고 미군부대에서 1개월간 이북 정보를 제공하며 지내다 원주경찰서로 넘겨진다. 원주경찰서에서도 몇차례의 고문을 받은 후 그는 춘천지방법원 원주지원에서 간첩 및 국가보안법 위반죄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풀려난다. 그제서야 함주명 씨는 그렇게도 그리던 가족의 품에 안길 수 있게 됐다. 그로부터 36년. 그는 아무런 탈 없이 가족들과 잘 살았다. 또 78년에는 중앙정보부가 요시찰대상에서 그를 삭제한다는 통보까지 받았다.

그러나 1983년 2월 이근안은 느닷없이 그를 잡아들였다. 그리곤 그가 80년 5월 광주사태의 시위 배후조종 남파간첩 이창용(본명 홍종수)이 제보한 암약간첩이라는 꿰맞추기 수사를 진행해 나간다. 끊임없이 인간성을 파괴하는 고문 속에서 그는 ‘우영일’이라는 고정간첩이 됐고, 31-2-1-8-23이라는 노동당 당증번호도 받았으며, 수사관들의 ‘협의’ 속에 무인포스트를 통해 북괴공작원과 회신해온 것으로 되었다. 이 뿐 아니라 그는 각지의 군사기밀을 탐지하여 간첩행위한 것으로도 되었다.

“이근안이 어드렇케 물었는지 알아요? 제 선친묘가 강화에 있는데, 강화에 갔다 왔으면 강화 해병대 기지 군사기밀을 탐지하여 간첩하고, 수원에 간 걸 수원미군부대 탐지하여 간첩하고, 그런 식으로 조서를 썼어요. 구체적 내용은 하나도 없이. 그런데도 그것은 모두 본인 자백에 의한 진술로 법정의 증거로 채택됐습니다.”

그는 영어의 몸이 되어 1심에서 사형구형에 무기징역, 2심, 3심에 항소했으나 원심대로 확정됐을 뿐이다. 따라서 16년의 긴 세월을 철창에 갇힌 새처럼 자유를 박탈당한 채 묶여 있어야만 했다. 수감된 5년동안은 죽고 싶은 생각뿐이었단다. 자신이 억울한 것은 차치하더라도 부인과 아이들이 ‘간첩의 가족’이라는 낙인을 달고 평생 살 것을 생각하면 눈 앞이 캄캄해졌다고. 그러던 어느날 ‘이렇게 죽으면 억울한 누명은 누가 벗겨주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반드시 살아나가 간첩의 누명을 벗겠다는 의지가 불끈 솟았단다. 그는 그렇게 감옥 안에 있는 식품공장에 다니며 조금씩 삶의 의욕을 찾아갔으며 건강도 유지하게 된다. 그러던 98년 8월 15일 그는 가석방됐다.

책임자 처벌과 명예회복돼야

MBC는 98년 9월 3일 을 통해 고문기술자 이근안이 아무런 물증없이 이창용(본명 홍종수)의 진술만을 근거로 함주명을 간첩혐의로 잡아들였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그리고 월간 『말』은 98년 11월호에서 “광주사태 선동간첩 이창용은 조작됐다”는 내용의 기사를 통해 80년 5월 ‘북에서 남파돼 광주사태를 선동했다’는 남파간첩 이창용(본명 홍종수)은 그의 주민등록번호 301210-1000318, 그가 다녔다는 덕정초등학교 동창생과 본적지 고암리 출신의 남양 홍씨가문 사람들, 법무부 산하 공안사범 보호관찰대상자를 아무리 뒤지고 추적해도 ‘현재 어디 있는 누구’라고 명약관화하게 밝히기 어려운, 조작됐을 가능성이 높은 인물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렇다면 가상인물 홍종수의 제보에 의해 이근안이 검거했다는 간첩들은 모두 조작된 작품일 가능성이 있는 것은 아닐까? 실제 함주명 씨는 다른 간첩사건들이 대서특필 되는 것과 달리 유독 홍종수의 제보에 의한 간첩사건은 전혀 언론에 보도되지 않았다고 말한다.

“누가 보더라도 조작이 뻔하니까 언론에도 알리지 못한 거죠. 떳떳하지 못하니까.”

그렇게 함주명의 50대 장년기를 앗아간 이근안은 지난 10월 28일 성남시청에 자수했다. 늙수그레한 그의 얼굴이 TV에 비치자 그를 비롯한 민가협 회원들은 서울지검으로 달려가 피켓시위를 벌였다. 공소시효 운운하지 말고 이근안과 그의 배후를 철저히 수사하라고 요구했던 것. 함주명 씨는 그렇게 16년만에 처음으로 이근안과 대면했다.

“딱 보는데 치가 떨리더라구요. 한번 주먹으로 때리고픈 심정으로 대들었지만 그를 둘러싼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멀리서 욕밖에 못했어요. 지금이라도 내가 이근안을 만난다면 쇠파이프를 들고 후려쳐 때려주고 싶지만…. 기왕지사 잡힌 것, 모든 걸 다 털어놓고 양심선언해 다시는 이 땅에 반인륜적인 고문행태가 빚어지지 않도록 했으면 해요.”

말은 ‘기왕지사’라고 하지만 도저히 이근안과의 화해, 용서 따위를 생각할 수 없다고 고백했다. 다만 이근안이 과거의 죄를 뉘우치고 용서를 빌고, 자신 뿐 아니라 고문희생자의 명예가 회복될 수 있도록 한다면 그걸로 70평생 맘편히 마무리할 수 있을 것같다고 말했다.

그는 지금도 고문후유증으로 악몽과 불면증, 각기병에 시달리고 있지만 그를 포함한 배후 책임자 처벌, 고문희생자 명예회복과 피해보상이 이뤄진다면 더 이상의 바람은 없다고 했다. 다만 그동안 아무런 대가없이 자신과 아이들을 위해 희생한 부인 이춘자 씨(52세)에게 미안하고 고마울 따름이라고 전했다.

이근안 고발한 13인의 변호사 인터뷰

– 고발인 대표 강금실 변호사

"고문피해자 명예회복과 피해보상 이뤄져야"

지난 11월 10일 민변소속 13인의 변호사(고발인 대표 강금실)가 이근안의 반인도적 고문행위와 허위증언, 반인륜적 범죄 사실을 낱낱이 밝히면서 서울지방검찰청에 고발장을 접수했다. 그들은 “역사적인 진실규명 차원에서 각종 고문사건의 진상을 밝혀 공개하겠다”고 밝혔던 서울지검의 입장을 재확인하며 그에 따라 이근안을 불법감금 독직폭행죄와 위증죄로 다스리라고 요청했다. 다음은 고발인대표 강금실 변호사와의 일문일답이다.

함주명 씨 사건으로 고발장을 접수한 이유는 뭔가.

“이 사건은 언론에 알려진 대로 이근안의 고문수사에 의한 대표적 조작간첩사건이다. 따라서 재심을 통해 억울한 누명을 벗긴다는 차원에서 접근했다. 그러나 이는 1단계 고발장일 뿐이고 앞으로 고문피해자신고센터를 만들어 피해사례를 접수받을 예정이다.”

공소시효가 7년인 현행법상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생각인가.

“이는 기본적으로 검찰의 의지와 관련이 있다고 본다. 칠레의 피노체트가 반인륜적 범죄를 저지르고 도망다니다 영국에서 잡혀 스페인으로 인도돼 국제재판을 받고 있다. 그런 국제관습법의 관례상 한국의 이근안도 처벌받아 마땅하다. 검찰이 공소시효를 운운한다면 그것은 반인륜적 범죄를 수사할 의지가 없는 것이다.”

함주명 씨를 비롯 많은 고문피해자가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겪고 있다. 그들에게 피해보상이 필요한 것은 아닌가.

“민법상 소멸시효가 지난 것은 특별법을 제정해 손해배상할 수 있다. 따라서 이들의 명예회복은 물론 그동안의 정신적 물질적 피해에 대한 보상이 있어야 한다. 고문은 불법행위이므로.”

이근안 사건에 대한 인권운동가의 충고

– 박래군 인권운동사랑방 사무국장

"공소시효이전에 인권을 말하라"

수배 11년만에 검찰에 홀연히 나타난 5공 정권시의 대표적 고문경관 이근안(61). 10년 가까이 집안에 숨어 있었음에도 경찰은 그를 잡지 않았다. 검찰의 이례적인 적극적 수사로 인해 그간 국민들 사이에 제기됐던 의혹은 사실로 드러나고 있다. 이번 사건을 지켜보면서 나는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우선 우리 사회에서 고문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먼저, 이씨 사건은 공소시효와 상관없이 철저하게 진실을 밝혀야 한다. 철저한 진상규명에는 단지 이씨의 고문행위만이 아니라 당시 이씨에게 고문을 지시했거나 고문사실을 은폐했던 관련자들을 밝혀내는 일도 반드시 포함돼야 한다. 이씨의 경우 소속은 경기도경 공안분실이었지만, 중요한 공안사건에서 고문을 담당했던 만큼 당시 관계기관대책회의에 참가했던 정부 부서의 관계자들의 이름과 행적 또한 낱낱이 밝혀야 한다. 다음으로 이씨 관련 사건만이 아니라 과거의 모든 고문 사건에 대한 신고센터를 마련하고, 신고된 사례들에 대한 진상조사가 이뤄져야 한다. 이 과정을 통해 국가 차원의 사과가 있어야 한다. 이는 지난해 미국 클린턴 대통령이 50년대의 핵 생체실험을 국민 앞에 사죄하고, 로마 가톨릭 교황청이 나치시대의 교회의 잘못을 사죄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이런 국가적 반성을 통해 과거와 단절하고, 앞으로는 어떤 고문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표명하는 일이 인권사회로 나아가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또, 육체적 정신적인 고문후유증에 고통받는 피해자들과 그 가족들에게 원상회복을 위한 국가 배상이 이뤄져야 한다. 배상에는 후유증 치료를 위한 치료와 정신적, 물질적 배상이 동시에 이뤄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원칙적으로 고문 가해자와 그를 사주한 세력들은 고문방지조약에 의해 공소시효의 적용없이 지금이라도 처벌할 수 있어야 하며, 만에 하나 이씨 등의 고문에 의한 공적으로 진급, 현정부에서도 공직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모두 추방해야 할 것이다.

지난 95년 함주명 씨 등 고문 피해자 66명이 과거 고문 피해를 들어 고발했지만, 검찰은 이를 불기소했고, 이어 헌법재판소마저 이들의 헌법소원에 대해 공소시효가 지났다는 이유로 각하하고 말았다. 고문방지조약의 원칙보다 하위법에서 규정한 공소시효의 원칙을 우선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문의 근절을 위해서는 고문 사건에 대한 공소시효를 적용하지 않도록 하는 법적 장치가 마련되는 것이 급선무라는 지적이 인권단체들간에 광범위하게 공감대를 얻고 있다.

고문은 한번의 행위로 끝나지 않는다. 그동안 고문피해자들은 잊혀진 채 절망 가운데 죽어가고 있다. 고문피해자에 대한 관심, 그들의 인간성을 파괴한 과거를 그대로 묻어두고는 우리 사회에 정의가 세워질 수 없다. 우리 사회에서 고문이 근절될 수 있도록 이근안 씨 사건을 계기로 대안을 마련하는 일은 바로 21세기를 희망을 세기로 만드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고문피해자 요양시설필요하다

대개의 고문피해자들은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당하고 있다. 86년 신길동 학생시위사건으로 연행돼 고문당한 강환웅 씨는 정신분열증으로 89년 5월 18일까지 3차례 중대부속병원에 입원했고, 84년 연세대 정외과를 졸업한 김복영 씨도 우울증, 정신분열증, 기억상실증으로 9차례 병원에 입원했다. 화성연쇄살인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된 김순경 씨는 경찰로 끌려가 고문당한 뒤 유서를 쓰고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으며, 성균관대 국문과 학생이던 최동 씨는 고문후 분신, 끝내 자살하고 말았다. 이밖에 이을호, 문국진 씨 등은 이미 세간에 잘 알려진 고문피해자들이다. 이들은 모두 시대와 역사가 만든 장애인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는 그에 대한 책임을 전혀 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외국의 경우는 많은 고문피해자 요양시설을 두고, 그들에게 평화와 안식을 제공한다.

특히 1973년 엠네스티는 전세계적으로 의료인들에게 고문반대투쟁을 도와달라고 호소했다. 또한 이 문제는 엠네스티가 파리에서 주관한 ‘고문폐지를 위한 회의’에서도 함께 논의됐고, 1984년 그 회의의 성과중 하나로 덴마크 코펜하겐에 고문피해자를 위한 의료센터 RCT를 만들게 됐다. 그 밖에 SOS-TORTURE, The Medical Foundation for the Care of Victims of Torture 등이 있다.

마감속보

마감을 하루앞둔 날 아침, 함주명 씨는 핸드폰으로 기자에게 전화했다. 다소 흥분된 목소리로 이근안과 대질 심문했는데 처음에는 버티다가 나중엔 모든 사실을 자백했다는 거였다. 그는 이제 곧 재심을 통해 지난 날의 누명을 벗게 됐다며 즐거워했다. 그러나 마음 한켠 이근안을 직접 보니, 반인륜범죄를 저지른 한 인간의 말로가 그렇게 추하고 비참할 수 었더라며 씁쓸해했다.

장윤선(참여사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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