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1999년 08월 1999-08-01   2821

『어제의 세계』 슈테판 츠바이크 저 20세기의 광기와 희망

우연히 세기말과 세기초를 살게 된 우리는 자기가 속했던 한 세기를 통째로 돌아볼 수 있다는 점에서 하나의 보너스를 받은 느낌이다. 물론 그 보너스는 수령하지 않아도 그만이지만(지금도 텔레비전의 대중가요는 외치고 있다, 돌아보지마!) 분명한 것은 이 보너스를 충분히 음미하는 사람들이 많을수록 이 세상이 그럭저럭 버틸 힘을 가질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20세기를 결정적으로 방향짓고, 20세기를 산 인간들의 운명에 깊은 그림자를 드리운 가장 큰 사건이 양차 세계대전임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나치스트들에 의해 저질러진 유대인 학살은 20세기의 광기와 증오, 비이성의 마르지 않는 원천이 되어 지금도 전세계를 배회하고 있다.

유태인으로, 평화주의자로, 뛰어난 작가로, 유럽의 통합을 꿈꾸었던 유럽주의자로 양차 대전을 온 몸으로 겪은 한 예술가가 있다. 1881년, 오스트리아 빈의 부유한 은행가 집안에서 태어나 60세의 나이로 브라질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한 슈테판 츠바이크가 바로 그다. 그가 자살을 앞두고 쓴 그 자신의 자서전이자 당시 유럽에 대한 증언인 『어제의 세계』가 1990년 프랑스에 번역, 출판되었을 때 그 반향은 대단한 것이었다. 지금의 유럽이 삐걱대면서, 그러나 강렬한 의지로 지향하고 있는 ‘하나의 유럽’이라는 이상을 분명하고도 유려한 필치로 그린 한 작가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4년 전 우리나라에 소개된 이 책은 담고 있는 문학적 가치에 비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진 못했다. 가벼운 읽을 거리를 찾는 독자에겐 너무 무겁고 지나치게 문학적이었을 이 책은 정확하고도 경쾌한 비유, 비길 바 없이 섬세한 인간 내면에 대한 천착, 당시 유럽 풍속에 대한 정감 어린 묘사 등이 훌륭한 번역을 만나 고스란히 전해온다.

제목의 『어제의 세계』란 아직 유럽이 폭력과 광기, 전체주의에 휩싸이기 전의 세계를 말한다. 누구나 이성의 힘을 믿었고 과학의 진보가 그 무엇도 아닌 평화와 생활의 향상에만 쓰일 것이라는 확고한 신념이 퍼져 있던 세계, 개인의 자유와 평등권익 확산을 저지하는 힘이 있으리라고는 도무지 상상할 수 없던 세계, 반유대주의자일지라도 얼마든지 유대인의 친구가 되던 관용과 포용의 세계가 바로 츠바이크가 실제로 살았던 ‘어제의 세계’였다. 그러한 세계의 온화한 대기가 전 유럽에 퍼져 결국 국경이나 여권이 없는 하나의 유럽을 소망했던 것이 츠바이크를 비롯한 유럽 지성이 추구하던 바였다. 더욱이 츠바이크는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살았다. 역사상 가장 화려한 예술의 꽃을 피웠던 도시, 정치나 군대, 기업가 따위가 다소곳이 예술의 발 아래 무릎꿇고 있던 이 도시에 가장 추하고 폭력적인 발길이 극장들을 짓밟으리라는 예감은 어디에도 없었다.

츠바이크는 꺾은 십자가 문양이 등장하기 전부터 히틀러의 광기가 극에 달할 때까지 절대적 평화주의자의 단호한 눈으로 그 모든 사건들을 당혹해하며 지켜본다. ‘어제의 세계’가 차츰 유린당하고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들이 백주에 벌어지는 상황에 그는 깊이 절망한다. 평화가 폭력으로, 이성이 광기로, 개인의 자유가 집단의 아우성으로 바뀌는 ‘오늘의 세계’가 마침내 도래한 것이다. 그 자신도 그때까지 쓴 수많은 작품들이 (그는 당시 최고의 인기작가였으며 그의 작품은 세계 각국 언어로 번역되어 있었다) 나치에 의해 불태워지고 망명객이 된다. 높은 명성 덕분에 그는 각국의 지성들과 교류하며 유럽의 앞날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논설을 통해 나치에 대항하지만 그는 천성적으로 행동가는 아니었다. 영국에 머물던 츠바이크는 영국이 참전을 선포하자 졸지에 적국민이 되어 브라질로 떠나는데, 일본의 진주만 기습 등 불리한 전황을 비관하여 1942년 아내와 함께 자살하고 만다. 자살 동기에는 더 이상 좋은 문장을 쓰기 어렵다는 예술가로서의 실망감도 상당 부분 작용했다고 한다.

이 책은 500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이다. 그러므로 줄거리를 소개하는 따위는 불필요할 뿐더러 한 문장을 쓰는데 보통 수십 번씩 고치곤 했다는 츠바이크의 노고에 대한 예의도 아니다. 다만 이 책이 선사하는 몇 개의 가외의 즐거움을 소개하기로 한다.

첫째는 드물지 않게 들어 있는 사진들이다. 대개 인물사진인데 당시 츠바이크와 교류하던 유럽의 예술가들이 대분분이다. 유럽 최고의 지성으로 반나치 운동의 정신적 대부였던 로맹 롤랑이나 최고의 시인인 발레리, 릴케, 타고르, 조각가 로댕, 소설가 제임스 조이스, 막심 고리키 등. 사진과 더불어 츠바이크는 최고의 전기작가답게 그들과의 만남에서 가진 느낌과 감동을 묘사해 놓았는데 사진 속 거장들의 눈빛은 세월을 뛰어넘어 각별하게 다가온다.

두번째는 빛나는 유머다. 당시의 풍속이나 사회현상의 묘사에서 넉넉한 지성에 의해 발휘되는 고급스런 유머는 때로 책장을 넘기기 어려울 만큼 눈부시다. 예를 들면, 참전을 독려하기 위해 의사들이 정부의 지원을 받아 의족광고(전투에서 다리를 잃은 사람이 많았으므로)에 열을 올리며 그 편리성과 효능을 강조하는 것을 보면서 “사람들은 건강한 다리를 의족으로 바꿀 수 있도록 거의 성한 다리 하나를 절단하고 싶을 지경이었다” 라고 말하는 식이다.

세번째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들을 츠바이크 개인이 우연하게 접하게 됨으로써 얻는 실감이다. 오늘날의 이스라엘을 있게 한 시오니즘의 창시자 테오도로 헤르츨 이야기나 유럽 국가간 협력의 마지막 희망이던 전설적인 독일 외무장관 반터 라테나우의 암살, 1차 대전 후의 천문학적 인플레 현상에 대한 묘사 등이 몹시 흥미롭다.

그는 평화와 휴머니즘, 그리고 무엇보다 개인의 자유와 정신적 작업에 충실했던 예술가였다. 츠바이크가 살았던 그 고통스런 오늘이 이제 우리에게는 ‘어제의 세계’가 되었다. 그러나 그 세계는 진정 지나간 어제일 뿐인가. 세계 이성은 아직 아우슈비츠의 어두운 수용소를 떠돌고 있다. 그것은 여전한 힘으로 인류의 이마에 찍힌 낙인과도 같이 세기말의 우울을 증폭시키고 있다. 츠바이크의 유언대로 어두운 밤 뒤에 마침내 아침노을은 떠오를 것인가. 언제나 그랬듯이 추락과 상승, 몰락과 비약을 결정하는 것은 영원한 역사의 비밀이며 그 결정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선택에 달려 있을 것이다.

새책 소개

아름다운 저항 -방현석의 노동운동사 산책

새벽출정 등을 통해 노동운동을 문학적으로 가장 뛰어나게 형상화해온 작가 방현석의 노동운동사 산책. 책장을 넘기다보면 80년의 사북, 79년 YH여공들이 무참히 짓밟히는 마포의 신민당사, 원풍모방, 구로 연대파업의 현장, 그리고 골리앗 크레인 위에 가 있는 듯 피가 뜨거워질 것이다. 관련자들의 인터뷰 당시 현장에 대한 뛰어난 묘사를 통해 ‘사람답게 살기 위해’ 아파하며 눈물흘리며 싸워온 아름다운 ‘인간의 시간’ 과 그 빛나는 풍경을 목격할 수 있다.

방현석 /일하는 사람들의 작은책/9,000원

희망의 밭을 일구는 사람들-귀농 현장 보고서

IMF 체제가 남긴 세태 중 하나가 귀농현상이다. 누구나 부와 낭만적인 전원생활을 꿈꾸며 귀농을 감행하지만 철저한 준비 부족으로 낭패를 겪는 일이 허다하다. 이 책은 전국귀농운동본부 출판기획실장으로 있는 저자가 귀농을 진지한 삶의 대안으로 받아들이고 시골에 내려가 행복하게 살고 있는 열다섯 가족의 생활을 1년여 동안 취재한 것이다. 귀농자들의 유기농법, 주말농장, 식당, 카페운영 이야기 등 총 4부로 구성된 이 책은 말미에 농지구입, 영농자금대출 및 이용 등 귀농에 대한 필수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안철환/마가을/ 8,500원

감염된 언어

프랑스 파리 사회과학고등연구원에서 언어학 박사 과정을 수료한 저자가 펴낸 우리나라의 언어와 문학에 대한 고찰서. ‘국어의 변두리를 담은 몇 개의 풍경화’를 부제로 한 이 책은 소위 ‘언어순결주의’에 대한 거침없는 비판을 가하고 있다. 저자는 인류문화의 역사는 감염의 역사이며, 그 역사를 실어나르는 언어의 역사도 감염의 역사라고 주장하면서 영어공용화의 문제, 한자사용의 문제 등을 예리하게 파헤친다. 전직 기자이며 소설가인 저자는 정확하고 아름다운 한국어로 글을 쓰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고종석/개마고원/ 7,500원

한국의 생태사상

‘선인들의 공부법’의 저자가 쓴 ‘한국의 생태사상’은 자본주의의 폐해와 그것으로 인해 위협받는 오늘의 생태를 진단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나 그 위태로운 생태치유를 위한 집도(執刀)를 ‘선인들의 공부법’에서의 고인들로부터 찾는다는 사실이 독특하다. 이규보, 서경덕, 신흠, 홍대용, 박대용의 원전을 충분히 소화하며 선인들의 사상적 전통 속에 녹아 있는 인(人)과 물(物)의 조화와 공생에 대한 깊은 깨달음과 생태적 관점을 추출해낸 노력에 감탄하면서 책장을 넘기게 된다.

박희병/돌베개/15,000원

최용탁 농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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