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1999년 10월 1999-10-01   1048

한일 젊은이들의 작은 연대

99년 8월 17일. 필자는 일본 오사카에서 『아사히신문』 사회면 기사를 유심히 살펴보고 있었다. 재일 조선인의 현실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두 꼭지의 기사 때문이었다. 31년간의 옥살이를 끝내고 출옥을 눈앞에 둔 권희로 씨의 소식과 재일 조선인들의 민족교육이 위기를 맞았다는 내용이었다. 한편 같은 날 한국의 신문들은 8·15 특별사면의 뒷얘기에 덧붙여 권희로 씨가 석방될 가능성이 있다는 뉴스를 단신으로 처리하고 있었다.

권희로 씨의 석방문제가 본격적으로 거론되던 지난 8월 중순. 일본 오사카에서는 한국과 일본의 젊은이들이 의미있는 만남을 갖고 있었다. ′99 한일대학생 공동워크숍이 그것. 양국의 젊은이들이 과거사를 되돌아보며 미래의 희망을 모색한다는 사실에 필자는 뜨거운 전율을 느꼈다. ‘진실’과 ‘공존’, 그리고 ‘평화’를 위한 한마당. 이것은 오사카에 모인 젊은이들이 가슴에 새긴 화두였다.

한일대학생 공동워크숍의 시작은 9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해 여름 일본 홋카이도 슈마리나이에서 역사적인 조선인 강제연행 희생자 유골발굴 작업이 진행됐던 것. 유골발굴은 희생자의 신원확인이 가능하도록 철저한 측량과 기록을 통해 이뤄졌다. 한일 양국의 젊은이들은 진흙탕 속을 파헤치는 악전고투 끝에 마침내 네구의 유골을 찾아내게 된다.

반세기 동안이나 방치됐던 뼈마디를 발견하는 순간, 참가자들은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참혹한 강제노동에 시달리다가 불귀의 몸이 된 영령들을 기리는 추도식도 가졌다. 한국식 유교 참배, 무교식 씻김굿, 일본 불교식 독경, 그리고 강제징용자들과 아픔을 공유한 홋카이도 아이누 민족 대표들의 위령의식이 이어졌다. 현지에서 발굴 과정을 직접 취재한 홋카이도 TV는 <할아버지를 파다>라는 40분짜리 다큐멘터리를 방송하기도 했다.

98년 여름에는 한국에서 두 번째 워크숍이 열렸다. 1년만에 다시 만난 젊은이들은 강제연행 희생자 유족조사, 강제연행 체험자 조사, 일본군 ‘위안부’ 연구 등을 통해 슈마리나이에서의 아픔을 되새겼다. 참가자들은 한반도의 곳곳을 찾아다니며 생생한 역사의 현장을 확인했다. 한편 양국 젊은이들이 홋카이도에서 찾아낸 유골은 매장기록부 조사와 사인 분석 등을 통해 유족들에게 전해졌다.

공출미를 걷으러 온 일본 순사를 마을 밖으로 쫓아내고 도망을 쳤다는 오빠. 돌아오지 않는 부자를 기다리다 지쳐 사망신고까지 했다는 조카. 한국과 일본의 청년들이 찾아간 곳에서는 어김없이 한맺인 절규가 들려왔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며 차츰 참가자들은 ‘유족찾기’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된다. 과거사를 반추한다는 것은 단순한 ‘진실게임’이 아니라, 미래를 위한 새로운 도약이라는 것을.홋카이도와 서울에서 우정을 다진 그들이 99년 8월 일본 오사카에서 진일보한 고민을 시작했다. 이번 워크숍에서는 민족교육, 전후보상, 인권, 분단, 지역운동, 강제연행 등에 관한 체계적인 현장조사가 이뤄졌다. 참가자들은 재일동포의 현재와 미래에 대해 진지한 토론을 벌였고, 오사카 근방에 남아 있는 유적지를 돌아보며 과거사의 상처를 되새겼다.

1945년 본토 결전을 준비하면서 만들었다는 다치소 터널. 이곳에도 강제노동에 시달리다가 유명을 달리한 조선의 젊은이가 있었다. “재일동포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남과 북의 초이념적 협력이 절실하다”고 열변을 토한 박종명 선생. 오사카와 교토, 그리고 나라의 유적지와 재일 조선인의 삶을 설명하다가 끝내 눈물을 쏟은 양국 젊은이들. 그들은 비록 말이 통하지 않았지만, 현장을 둘러본 느낌만으로도 서로를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

3년여에 걸친 한·일 대학생들의 ‘하나되기’ 운동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라고 한다. 내년 2월엔 일본 홋카이도에서 유골발굴 작업이 재개되며, 여름엔 중국 연변에서 ‘아시아 젊은이의 연대와 한반도의 통일을 위한 한마당’이 벌어질 예정이다. 한국의 매스컴이 철저히 외면하는 가운데 고된 발걸음을 내딛는 젊은이들의 ‘작은 연대’가 아름답게만 느껴진다. 필자는 그들의 진지함과 열정에서 묻어나는 희망의 향기에 흠뻑 취한 채 서울행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다.

육성철『일요신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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