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1999년 08월 1999-08-01   1631

다시보고픈 실상사의 미남 스님

96년 여름, 당시 참여연대에서 일한 지 2년째 접어들었던 나는 연일 계속되는 부패추방거리캠페인이며, 끊임없이 밀려드는 일들 속에서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기다리던 휴가. 1주일이 넘는 날들을 혼자서 자유롭게 보낼 수 있다는 것, 자기 자신을 철저히 되돌아볼 수 있다는 게 너무나 행복하고 가슴 벅찼다.

전라도 남원에서 버스를 타고 한 시간쯤 가는 지리산 뱀사골 초입의 실상사. 대학 때 함께 불교학생회 활동을 했고, 졸업 이후 여전히 불교운동에 투신하고 있는 친구와 선배들 덕분에 나는 실상사에서 조용히 며칠을 보낼 수 있는 행운을 얻었다.

새벽 3시에 일어나서 매일 예불을 드리고, 보살님들과 수다를 떨며 매끼니 공양을 준비하는 게 그곳에서의 나의 일과였다. 또 나이드신 보살님들의 흰머리를 염색해드리거나 감자나 옥수수를 삶아서 간식으로 스님들 방에 갖다드리는 것이 나의 큰 기쁨이었다. 처음에는 조금 낯설어 하시던 보살님과 스님들도 이내 나를 붙임성이 있는 아이(?)라고 생각해 주셨는지 시간이 지나면서 나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시기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너무 즐거웠던 것은 평소 바쁘다는 핑계를 대고 읽지 못했던 책을 방해받지 않고 마음껏 읽은 것이다. 실상사 주변에 있는 시원한 나무 그늘에 앉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었던 김남주 선생님의 시집들, 법정 스님의 책들, 불교관련 서적들….

체구가 자그마하고 수줍음 많은 소년 같은 이미지의 중묵 스님은 참여연대 활동에 대하여 많은 관심을 보이셨고, 지역 주민과 함께 하는 사부대중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실상사가 앞으로 계획하고 있는 일들에 대해서도 많이 이야기해주셨다. 뒤에 누군가 중묵 스님이 대학시절 통일운동을 죽 하시다가 몇 년 전 출가하신 분이라고 말해주었다. 보름날 저녁, 몇몇 스님들은 보름이 되면 마음이 싱숭생숭해진다고 하시며 저녁공양을 일찍 끝내고 신도들, 보살님들과 함께 차를 타고 달구경 가셨다. 나도 다음날 실상사를 떠나야 한다는 서운한 맘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휘영청 떠 있는 보름달만 바라보며 절마당을 서성이고 있었다. 이런 나를 보고 중묵 스님과 오성 스님이 “함께 달구경 가자”며 실상사 바로 뒤에 있는 작은 동산으로 안내했다. 보름달 아래서 나는 나의 18번 “전태일 민중의 나라”를 몇번이나 목청껏 불렀다.

오성 스님은 중묵 스님에 비해 성격이 아주 활달하고 짓궂은 장난꾸러기 소년 같은 분이셨다. 고백하건대 나는 오성 스님을 처음 봤을때 용모가 매우 수려해 몇번이나 남몰래 오성 스님을 훔쳐보았다. 혹 오성 스님과 마주치거나 어쩌다 스님이 나에게 말을 걸어올 때면 무척이나 가슴이 두근거리던 기억을 떠올리면 지금도 빙그레 웃음이 머금어진다.

올 여름에 나는 친구와 단둘이서 지리산 종주를 하고 실상사에 들를 생각이다. 그해 여름, 실상사를 떠나오면서 중묵 스님께 혹 지리산에 오면 꼭 실상사에 다시 들르겠다고 약속을 했었다. 실상사 들어가는 입구에서 작열하던 여름날의 뜨거운 해가 서쪽으로 서서히 기우는 광경을 바라보며 자전거를 맘껏 타 보리라 즐겁게 다짐해본다.

이수효 참여연대 아파트공동체 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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