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1999년 09월 1999-09-01   1638

흙과 나무로 이룬 주민공동체

무주군 진도리 마을회관

우리 사회에서 생활경제를 표현하는 것으로 흔히 ‘농촌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는 말을 쓰곤 한다. 그러나 산업의 근간인 농업의 중요성을 함축하고 있는 이 경구는 먹고 사는 문제, 경제논리에만 국한된 말은 아니다. 농촌이 농촌답게 살아 있으려면 경제적 접근에 앞서 이를 뒷받침하는 생활문화와 환경이 도모돼야 한다는 것을 드러내주는 것이기도 하다.

지방자치제가 시행된 이후 자치단체들은 도시 농촌 할 것 없이 지역주민을 위한 문화시설이나 복지시설을 많이 세우고 있다. 그러나 실제 주민편익의 관점에서 제대로 지어진 건축물인가는 재고할 만하다. 특히 농촌지역의 시설은 여전히 형식과 내용이 괴리된 모습을 양산해내고 있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주민의 편의와 복지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지어지는 생활공간마저 삶의 방식과는 무관하게 무조건 현대화의 허울로만 치장되고 있어 씁쓸하기만 하다. 요즘 농촌의 풍광을 볼라치면, 장소만 농촌이지 도시의 그것과 다를 바 없어 형식(건축 공간 구조)과 내용(일상생활 방식)이 균형을 잃고 겉과 속이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반문하게 된다. 또 최근 일부 농촌에서는 콘크리트 상자 모습에서 탈피, 목조건축에 기와지붕을 얹은 정자가 새로 지어지는 곳이 있다고 한다. 이런 모습은 민족문화와 전통을 통치 이데올로기의 수단으로 동원했던 군사정권 시절 콘크리트로 고건축을 흉내내서 지었던 전통건축의 복제보다야 운치있어 보이지만, 주변 장소의 환경과 무관하게 일정한 모델로 공장에서 생산한 제품처럼 획일적으로 짓는 것은, 이 역시 자치단체의 전시 행정적 업적 쌓기가 아닌가 생각된다.

흙과 나무로 만들어진 마을회관

우리 농촌의 요즘 풍경을 주도하는 이런 ‘억지춘향’들이 하나 둘 늘고 있는 가운데 두메산골, 한 외딴 마을에 지은 마을회관(면 소재지도 아닌 작은 동네이니 ‘리사무소 겸 마을회관’인 셈이다)이 건축인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인적도 드문 두메산골에 지어진 마을회관이 이처럼 주목받는 것은 이 건축물이 우선 농촌다움의 친화력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이 마을회관은 농촌이란 장소성과 생활문화를 건축적으로 해결하는데 있어 겉모양보다 일상의 현장성이 녹아들어 있다. 우리네 선조들이 살았던 집이 지니고 있는 삶의 지혜를 기와지붕 같은 막연한 모양에서 찾는 것 대신 리얼리티가 살아 있는 집짓기의 소재, 즉 흙과 나무를 이 시대의 문화에 맞게 친화적인 건축형식으로 재구성해 주민을 위한 공간으로 꾸며놓은 것이다.

산을 등지고 자리잡은 오밀조밀한 시골 집들. 그들의 앞산자락을 따라서는 폭좁은 냇물이 흐르고 주변으로는 들판이 펼쳐져 있어 배산임수의 전형적 시골마을 풍경을 갖고 있는 전라북도 무주군 안성면 진도리에 건축가 정기용(기용건축)의 설계로 지어진 이 마을회관은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을 초라한 두메산골에 사는 농촌 주민을 위한 공동체의 마당이다. 그래서 이곳이 더 큰 의미를 부과하는 지도 모른다. 반딧불이 축제를 이룰 만큼 청정한 환경을 간직하고 있는 무주의 두메산골 풍경은 계산 빠른 인간의 생각을 아예 원천거부하는 순수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이런 마을에 어디에나 있을 일상적인 집을 짓는 일은 그 자체가 환경파괴 행위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엄습해온다. 건축가 정기용이 이런 동네에 마을회관을 지으면서 토속적인 성질, 시골의 자연환경과 가장 밀접해 있는 흙과 나무를 건축의 주요 텍스처로 설정한 것은 그래서 이치에 맞는 선택으로 보인다.

마을로 진입하는 도로가 완만하게 굽어 돌아오는 길목 초입에 놓인 이 마을회관은 길을 지나는 행인이나 마을 주민들에게 반갑게 맞이하듯 지형에 맞춰 자연스런 배치를 보이고 있다. 흙과 나무가 지닌 토속적 성질에 어울리는 공간구조와 형태 역시 자연스럽다. 실제 면적이 50평도 채 되지 않는 2층 구조로 된 이 건축은 두메산골, 농촌의 지역성을 담아 둥글둥글한 지붕을 얹어 누마루, 정자, 사랑방 등을 둔 옛집의 공간 형태에 흙집 구조를 취하고 있다. 벽에 흙만 바르고 흙집 흉내를 낸 서울 근교 유원지의 카페나 음식점 같은 그런 흙집이 아니다. 나무 골격이 건물의 구조적인 힘을 지탱하는 기본 뼈대이지만 흙벽도 이 건물의 구조적인 안정성을 함께 감당하고 있다. 단순히 벽돌이나 블록으로 공백을 채우는 칸막이 벽이 아니라 콘크리트처럼 흙을 짓이겨 다져 구조체로 만들어 건물의 안전을 도모한 것이다. 이런 흙벽의 처리방식은 앞으로 우리 흙건축의 쓰임새를 가늠하는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주민공동체 위한 편의시설로서의 가치

건축가 정기용은 이런 흙집을 짓기까지 10년이 넘게 한국의 흙집은 물론 지금도 보편적으로 쓰이고 있는 아랍지역의 흙집 등을 구체적으로 연구하고 실험하며 우리 시대에서 흙집의 가능성을 실천적으로 찾아 나서고 있다. 벌써 무주에서만도 또 다른 면사무소 몇 곳과 역사적 장소의 시설 등 이미 그 실천적 작업을 구체화하고 있다.

이 마을회관은 조영(造營)방식을 통해 발견되는 옛 건축의 지혜 못지않게 쓰임새 역시 우리 삶의 공간을 실천적으로 담고 있다. 대부분의 시골 마을이 그렇듯 이곳 역시 까맣게 그을린 얼굴에 주름이 깊게 패인 나이 지긋한 노인들이 많이 산다. 실제로 이 마을회관은 ‘리사무소’지만 동네의 나이 지긋한 분들이 여가시간을 보낼 수 있는 노인정이자 아이들이 책을 보거나 공부도 하는 공부방, 독서실 등의 기능을 다양하게 담는 종합복지회관인 셈이다. 농촌에서 그것도 사시사철 일만 하는 농민들에게 휴식과 복지라는 말이 어울릴 성싶지는 않지만 들판으로 들며 나며 지나치다 잠시 들러 2층 누마루에 앉자 곰방대를 빨며 도회지로 나간 자식들 이야기며 농사 이야기를 주거니 받거니 하는 마을 사랑방으로도 제격이다. 나른한 오후 잠시 낮잠을 즐기기에도 안성맞춤이다. 우리네 어른들이 마을 어귀 정자나무 아래서 일터의 피로를 달래고 잠시 휴식을 취하던 그 정취가 그대로 되살아 있다. 이 누마루는 앞뒤로 시야가 트여 있어 마을의 모습과 뒷산의 풍치, 튼실하게 곡식이 영그는 들판의 ‘작업장’을 한눈에 조망하는 마을전망대 구실도 한다. 이런 장소야말로 선조들의 삶의 지혜가 녹아 있는 공간이 거듭 신생한 것이라고 봐도 틀리지 않는다. 나무 격자의 얼개로 엮여 비어 있고 지붕만 씌워진 앞쪽의 작은 공간은 마을 사람들이 정성껏 가꾼 농작물을 내다 놓고 길손들에게 파는 토산물 판매대로도 이용할 수 있게 했다. 건물 구석구석이 마을 주민들의 공동체적 삶을 위한 쓰임새를 적절하게 수용할 수 있도록 기능적으로 합리적인 구성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건축이 사회의 문화적 환경과 더불어 대중의 공동체적 삶과 어우러지며 공유될 수 있는 것은 바로 일상의 현장성이 그 건축에 녹아 있어야 함을 이 마을회관은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시대를 초월해 대중과 함께 하는 건축물은 그 존재 이유가 사회와 공유될 수 있는 공동의 가치를 담는데 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찮게 여기는 두메산골의 작은 마을회관일망정 주민과 공유하는 공간을 이루는 건축은 웅장하고 화려한, 값비싼 건물보다 더 가치있는 것일 터이다. 건축가 정기용은 이런 작업을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펼칠 참이다. 요즘 그는 면사무소 건물에 새로운 건축적 프로그램을 적용시키는 안을 짜는 데에 몰두해 있다. 그 배경에는 앞으로 지방자치제의 행정 최소 단위에서 면 단위가 사라질 수도 있다는 행정변화에 따른 건축적 대응전략을 포석으로 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즉 앞으로 면사무소의 기능이 지금처럼 정책, 집행, 감독, 관리 등의 행정 업무가 소멸될 것을 대비해 기존 사무소 건물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에 대한 제안과 새롭게 지어지는 농촌의 면사무소나 도시의 동사무소에서 주민 커뮤니티와 편의를 위한 시설로 전환하는 데 있어 간과해서는 안 될 사회와 건축과의 관계맺기와 공유의 문제를 건축적으로 풀어내는 것이 중요한 관심거리다. 두메산골 무주의 마을회관은 바로 그 첫 시도인 셈이다.

이주연 건축비평가·월간 『건축인POAR』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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