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1999년 12월 1999-12-01   528

독재의 망령 부활시키고, 21세기 희망을 말할 것인가?

박정희 기념관 국고지원해서는 안되는 이유

정부가 내년에만 105억의 국고를 지원, 박정희기념관을 만들겠다고 나서자 역사학자들이 적극 반대에 나섰다. 그들이 맹렬하게 반대하는 근거와 역대대통령기록관을 세우자고 제안한 이유를 들어본다.

‘박정희의 여성편력은 사무라이 정신에서 영향을 받았다.’

이 말은 지난 10월 26일 방송됐던 MBC 에서 박정희의 부관을 지냈다는 원로 조류학자가 던진 말이다. 이 말은 물론 박정희의 문란했던 사생활을 변호하기 위해 했던 말이지만, 사실은 여기에 박정희와 그를 추모하는 사람들의 정신세계가 잘 드러나 있다. 우선 사무라이 정신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에 대해 부끄럽다는 생각이 전혀 없을 뿐 아니라 그것이 실상은 파시즘적 사고라는 점을 은폐하고 있는 것이다. 그 논리를 가지고 18년씩이나 이 땅을 지배했을 때, 절차와 과정의 정당성이 문제되지 않는 극단적 결과중심주의로 귀결된다. ‘하면 된다’, ‘중단없는 전진’이라는 구호는 그 대표적 상징이며, 아직도 이 땅에 뿌리깊은 군사문화로 남아 있다. 그리고 오늘날 한국사회의 부끄러운 자화상인 매춘산업의 번성은 그 뿌리를 박정희 시대의 ‘기생관광’의 장려와 ‘호스티스 문화’에서부터 비롯되었다.

박정희는 전형적인 파시스트였다. 파시즘에서는 오로지 힘이 판단의 기준으로서 강자와 약자의 구별이 가장 중요하며, 충성과 복종이 기본적 인간관계를 이룬다. 합리적 논리와 이성적 사고는 금물이다. 거기에는 인권의 가치도 민주적 절차도 필요없다. 장애인과 같은 사회적 약자나 소수파는 사회발전에 도움이 안 되는 집단에 불과하다. 이때 동원된 것은 안보와 경제성장이라는 이데올로기였으며 그를 위한 국민총동원체제가 바로 유신체제의 본질이다.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사회적 약자나 소수집단에 대한 차별의 일반화, 빈부차별, 지역차별, 학력차별, 성차별 등의 뿌리는 박정희에 있는 것이다.

뉴밀레니엄에도 떠도는 박정희망령

1,200명에 달하는 전국의 역사학자들이 박정희를 위해 기념관을 건립하는데 내년에만 105억에 달하는 막대한 국고 지원 반대를 위한 모임을 결성한 것도 바로 그러한 역사적 반동을 막기 위해서이다. 박정희는 우리가 기념해야 할 인물이 아니라 극복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민족반역에서 군사 쿠데타, 장기집권, 독재로 이어지는 개인적 삶은 물론, 18년에 걸친 장기집권 동안 인권과 민주주의의 유린, 개발독재라는 이름 아래 정경유착, 생명경시, 부실공사, 부정부패, 환경파괴, 지역감정, 권위주의, 성의 상품화 등이 그의 시대에서 유래하여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렇다면 박정희 기념관 국고지원 반대운동은 현단계 시민운동의 과제와도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시민운동이 전개되고 있는 이유가 바로 우리 사회 안에 아직도 박정희의 유령이 떠돌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정권은 바뀌었지만 성장제일주의에 사로잡힌 부실공사, 정경유착, 관치금융, 독점재벌, 노동탄압, 농민몰락, 환경경시, 가부장적 권위주의 등은 그대로 남아 있다. 그 이유는 박정희 시대에 형성된 기득권 층의 힘이 아직도 우리 사회의 강자로 군림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바로 박정희식 경제성장이 가져다 준 폐해를 고스란히 겪고 있는 것이며 시민운동은 바로 그에 대한 근본적 변화를 요구하는 노력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재임 시기에 경제성장이 이루어진 것을 부인하지 않지만 한 시대의 역사는 결코 양적인 측면만이 아니라, 그 질적인 내용과 후세에 미친 영향은 물론 인간의 존엄성과 민주화의 진전을 통하여 평가된다. 그동안 그가 남긴 부정적 유산을 극복하기 위하여 우리 사회가 지불해야 했던 비용은 실로 엄청났다는 점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된다. 물론 자신의 가치관에 따라 누구든지 박정희를 존경할 수 있으며 자신들의 돈을 모아 기념관을 건립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아직도 역사적 평가나 국민적 합의가 명확히 내려지지도 않은 현시점에서, 그의 치하에서 고통과 억압을 당한 당사자들이 남아 있고 그가 남긴 유산으로 사회적 모순이 곳곳에 남아 있는 이 시점에서 정부가 기념관 건립을 지원한다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 정 김 대통령이 지원을 하겠다면 자신의 개인재산을 내 놓으면 될 일이다. 왜 국민의 세금을 가지고 자신의 개인적 ‘화해’를 포장하기 위하여 마음대로 쓴다는 말인가?

이러한 제도를 가장 먼저 발전시킨 미국에도 기념관이 건립된 경우는 국민적 추앙을 받고 있는 소수에 불과하며 그나마 적어도 죽은 지 50년이 넘은 경우였다. 한편 1930년대 이후 모든 전직 대통령의 기록관이 각각의 연고지에 건립되어 있다. 이들 기록관은 해당 전직 대통령을 지지했던 사람들이 모금을 통해 건물을 짓고, 정부는 이를 기증받아 운영을 맡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전국역사학자모임이 대안으로서 모든 전직 대통령의 자료를 모아 “역대 대통령 기록관”을 건립하자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그 가운데 일정 부분을 박정희 관련 시설로 만들어 공과 과를 함께 보여 주면 될 것이다. 그래도 기념관을 건립하겠다면 적어도 50년은 지난 시점에 가서 당시의 국민여론에 따라 추진하면 될 것이다.

사실 올해 벌어진 야단스런 박정희 추모행사가 가능했던 데에는 김대중 대통령의 공로가 매우 컸다. 그동안 김대중 씨가 대통령이 되면 나라가 당장 무너지는 것처럼 떠들면서 온갖 용공조작을 자행해 왔던 세력들이 정권교체에 따라 일시적으로 숨을 죽이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김 대통령의 박정희와의 화해 발언과 기념관 건립지원은 이들에게 면죄부를 준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 결과 박정희의 기념사업에 탄력이 붙게 되었고 당당하게 ‘조국 근대화’의 주역으로 다시 나설 수 있었던 것이다. 이들에게 있어서 박정희 영웅 만들기는 단순히 죽은 박정희를 위한 진혼곡이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자신들의 복권을 꾀하는 것이었다. 그에 따라 일부 언론들은 ‘당당하게’ 박정희를 미화하는 일에 앞장 설 수 있었으나 반대로 정부나 국책기관에 근무하는 사람들의 경우에 반대운동에 참여하는 것이 어려운 이유가 되기도 하였다. 비록 수락여부를 밝힌 바는 없었지만 김대중 대통령이 박정희 기념사업회의 명예회장에 추대되어 있는 상황에서 말이다.

DJ의 이해할 수 없는 박정희와의 화해

반면에 모진 억압에도 불구하고 정권교체를 갈망해 왔던 민주화 운동세력들은 아직 과거의 청산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다시 한번 차디찬 배신을 맛봐야 했다. 박정희 기념관 건립 지원 이전에 김대중 대통령이 먼저 했어야 할 것은 당연히 민주화 운동이 우리 역사에서 이룩한 성과를 기념하고, 오랜 한을 풀어주는 일이었다. 다시는 박정희와 같은 독재자가 나타나서는 안 된다는 민주주의의 승리선언이 이루어졌어야만 한다. 결코 박정희와의 화해나 기념관 건립이 우선적인 과제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김대중 대통령의 정치적 정체성은 도대체 무엇인가? 그는 장면 기념사업회에 가서는 바로 박정희가 파괴했던 민주당 정권을 찬양하는 발언을 하였다. 또한 부산민주공원 개막식에서는 바로 박정희의 하야를 요구하고 치열한 싸움을 벌였던 부마항쟁을 높이 평가하였다. 그러면서 동시에 박정희의 기념관을 국민의 세금으로 세우겠다는 것은 아무리 정치가 표를 의식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행동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아울러 과거 박정희에 대한 반독재 투사였다는 점에 의하여 정치권에 진입했던 재야 출신 정치인들의 경우에도 내년 총선에서의 공천을 의식하여 대부분 이 문제에 대하여 침묵하고 있는 모습을 본다. 그렇다면 자신들의 정치적 정체성은 어디에서 찾아야 한다는 말인가? 오늘날 박정희를 긍정하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박정희 시대부터 그를 지지해왔던 보수세력도 있지만, IMF로 인한 경제난을 겪으면서, 그리고 박정희를 반대해 왔던 정치인들에 대한 실망감에서 박정희에 대한 향수를 갖게 된 사람들도 있고, 박정희에 대해서 어떠한 공식적 교육을 받아본 일도 없고 직접 경험해 보지도 못한 젊은 세대들이, 일부 파시스트 언론인이나 작가들의 선동에 가까운 글에 미혹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

그동안 역사학계는 객관적 평가를 위해 가능한한 대응을 유보해 왔으나 앞으로는 올바른 역사상을 수립하기 위한 모든 노력을 할 예정이다. 아직도 이 땅에 떠돌고 있는 박정희의 망령을 다시 무덤 속으로 돌려보내기 위해.

주진오 상명대 교수

정부지원금 0%, 회원의 회비로 운영됩니다

참여연대 후원/회원가입


참여연대 NOW

실시간 활동 SNS

텔레그램 채널에 가장 빠르게 게시되고,

더 많은 채널로 소통합니다. 지금 팔로우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