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1999년 10월 1999-10-01   1498

영세자영업자 울리는 필리핀 드림 그 현장을 가다

IMF한파에 희망찾아 필리핀에 간 한인들

“맘, 기브 미 머니.”

……

“플리즈, 텐 페소.”

다섯 살 남짓 외눈박이 소년이 도요타 차창에 바짝 입을 댄다. 애절한 눈빛으로 아카시아 닮은 삼바기다(Sambaguida : 필리핀 국화)를 들이밀며 한국돈 300원을 간청했다. 10페소를 얻기 위해 도로 한복판에 뛰어든 어린 손. 흠뻑 비에 젖어 삶은 두부처럼 부풀어 있다. 어린아이, 임산부. 고막을 찢을 듯한 천둥번개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그들은 하나같이 맨발로 콘크리트 바닥을 밟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극적 연출을 위해 일부러 신발을 벗고 동냥에 나선다지만, 메트로마닐라의 상업적 중심지 마카티 시내에서 이런 풍경을 쉽게 접할 수 있다는 것은 가히 놀랄만하다. 정지신호를 받을 때마다 우르르 몰려드는 껌팔이, 망고장사꾼, 신문팔이, 앵벌이들. 점조직처럼 시내 곳곳에 그들이 많이 포진해 있다는 건 사실 비극이다. 10%의 부자와 90%의 빈민이 존재한다는 열대의 나라, 필리핀. IMF 이후 한국의 소액투자자들이 그곳으로 몰려들고 있다기에 취재에 나섰다. 청명한 초가을 하늘을 보고 김포를 날았건만, 마닐라는 연일 30도를 웃도는 후텁지근한 날씨와 태풍을 동반한 폭우가 계속될 뿐이었다.

동서로 길게 뻗은 하이웨이 주변. 길따라 즐비한 판잣집엔 인테리어 소품처럼 빨래가 걸려 있다. 시커먼 판자때기로 얼기설기 지은 집들이라 그런지 길게 늘어선 빨래들은 파란 하늘 만큼이나 맑고 깨끗해 보인다. 야자열매가 노랗게 달린 가로수. 그 옆을 지나는 청년 뒤로 공사가 한창이다. 1950년 한국전쟁 당시 군대를 파병할 정도로 경제력이 앞섰던 그들은 이제서야 개발붐을 맞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언뜻 생각할 때 이런 도시환경이라면 무얼하든 성공할 수 있을 것같은 착각이 든다. 겨울 날 걱정없고, 인건비가 싼 나라. 월 2,000페소(한국돈으로 6만 원쯤) 정도면 가정부를, 3,000페소 정도면 정원사를, 4,000페소 정도면 운전원을 고용할 수 있고 ‘Mam, Sir’ 소리 들어가며, 대접받고 살 수 있다. 기후가 맞지 않아 그렇지 이런 정도라면 한번쯤 필리핀행을 꿈꿔 볼만하다. 그래서 한국 삶에 그리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샐러리맨이나 소규모 자영업자들이 소액으로도 ‘이민’ 갈 수 있는 곳으로 필리핀을 꼽나보다.

쉽게 생각했다간 큰 코 다친다

필리핀한인회에 따르면 현재 필리핀에 거주하는 한인은 12,000명∼13,000명. 그중 75%가 메트로마닐라에 살고 있다. 우리나라 서울시격에 해당하는 메트로마닐라는 마카티, 케손, 파라냐케, (구)마닐라, 파사이, 만달리온 등 9개의 시와 8개의 행정구로 구성돼 있다. 필리핀에 사는 대개의 한인들은 선교사, 유학생, 지사 주재원 가족을 비롯 가비테공단에 투자중인 회사들과 비디오, 미용실, 식품점, 음식점 등 한국인 대상 소규모 자영업자들이다. 불과 2∼3년 전만해도 파라냐케의 경우 전체 통틀어 10가구 내외의 한인들이 살고 있었으나 지금은 셀 수 없을 만큼 늘었다고 한다. 이처럼 IMF 이후 최근까지 필리핀으로 한인들이 몰려드는 이유는 뭘까?

필리핀한인회 박현모 회장은 “영어권인데다 비자발급이 다른 나라보다 쉽고, 한국에서 가깝기 때문에 손쉬운 해외진출지역으로 꼽히는 것 같다”고 한다. 그러나 박 회장은 한인들이 ‘쉽게 생각’하고 진출한 만큼 고통이나 역경도 뒤따르게 마련이라고 충고한다. 심할 경우엔 3,000∼4,000만 원 갖고 들어왔다가 빈털터리되어 비행기값조차 구하지 못해 전전긍긍한다고. 따라서 주변의 말만 듣고 불확실한 정보로 진출했다가는 백전백패라는 것이다.

최근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사기’행각이 한인회의 골칫거리. 예컨대 이런 일이다. 첫 진출자가 제대로 자리잡지 못하고 빈궁해지면 친구, 친척 등 주변사람을 꼬셔 투자하게 하고, 그들이 들어왔다가 또 망하고, 그렇게 같은 방식의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또 주변 사람들을 들어오게 하는 경우. 기자가 방문한 날도 박 회장은 한 통의 피해사례를 접수받고 있었다.

“저는 달포 전에 필리핀에 왔습니다만 한인회의 도움을 받을 수 없을까 해서 전화를 드립니다. 친구가 필리핀에 괜찮은 업종이 하나 있는데 한 이삼 천만 투자하면 꽤 괜찮을 것같다고 그래요. 회사등록하는데 필요한 착수금으로 먼저돈을 좀 보내라고 해서 보냈고, 제가 들어오면 본격적으로 사업해보자 그러더니 정작 와보니까 친구는 간 곳 없고, 저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형편이 돼 버렸어요.”

박 회장은 이런 전화를 받으면 울화가 치민단다. 또 대개 이런 꼬임에 빠져 필리핀에 온 사람들을 상담해보면 백발백중 “빨리 많이” 돈을 벌 수 있다는 허위정보와 한국에서는 만나기 힘든 대통령, 국회의원들을 쉽게 만나 비즈니스할 수 있다는 유혹에 덜컥 걸려든 사람들이라고 한다. 더 안타까운 것은 그런 사람들이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을 정도가 됐을 때야 필리핀한인회를 찾아온다는 것이다. 그의 말을 듣고 좀더 구체적인 몇가지 사례를 찾아보기로 했다.

파라냐케에서의 ‘눈물의 칼국수’

햇빛이 너무 강렬해 눈물나던 오후, 파라냐케. 트라이시클 행렬이 시야를 가득 채운다. 필리핀 사람들의 주된 교통수단은 트라이시클과 지프니. 단거리엔 트라이시클, 장거리엔 지프니를 이용한다. 트라이시클 원스톱 이용료는 300원. 좀더 고급스런 걸 원한다면 버스나 택시를 타라. 그러나 버스도 에어콘시설이 있냐 없냐에 따라 차등된 가격을 받고, 외국인일 경우 택시는 바가지요금을 각오해야 한다. BF HOME 빌리지에서 만나려던 이현주 씨(가명, 34세, 주부)는 집에 없었다. 100여 평 되는 넓은 집에 아이 둘과 있으면서 에어콘을 켤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까운 KFC나 맥도널드에서 낮더위를 식힌다. 맥도널드 구석에 앉아 퀼트에 정신없던 그녀. 눈인사를 건네자 화들짝 놀란다.

그녀와 함께 30페소면 갈 거리를 100페소 주고 택시를 탔다. 예정대로 바가지요금은 외국인의 주머니를 가차없이 턴다. 그리고 찾아간 곳은 얼마전 BF HOME빌리지에 새로 문을 연 한인 경영 칼국수집이었다.

부산에서 피아노학원을 하던 그녀의 가족은 IMF가 터지기 직전 97년 8월 필리핀에 왔다. 간판업을 경영하던 남편과 6세 된 아들, 3세 된 딸의 손을 잡고. “저희보다 8개월 먼저 여기에 오신 분이 손짓하셨어요. 관공서에 나가는 소독기사업이 잘 된다고. 일단은 와서 그 사업을 좀 돕고, 차차 새로운 비즈니스를 찾으라더군요. 와서 자리잡을 때까지는 생활이 되게끔 해주겠다고요. 남편도 늙어서까지 간판업을 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에 서로 합의본 것이 더 늙기 전에 영구적인 직장을 찾자는 거였어요. 중고복사기가 잘 팔린다길래 있는 돈모아 복사기를 여러 대 사고, 피아노도 여러 대 싣고 꿈에 부풀어 비행기를 탔죠.”

정말 쉽게 생각하고 왔다. 매월 30만 원이면 큰 돈 벌지 못해도 그럭저럭 한국보다 나은 생활을 하게 될거라 예상했다. 그러나, 두달이 지나자 소개해준 이로부터 사업이 뜻대로 되지 않으니 독립해 알아서 살아보라는 명을 받았다. 월급도 없이 두달간 집세 안 내고 먹고 산 게 도움의 전부였던 것이다. 그런 와중 아이가 아파 맹장수술을 받았고, 의료보험도 없고 가진 돈도 없어 피아노를 팔아 7만페소를 지불해야 했다. 그때 남편은 당장에 직장을 구할 수도 없었다. 아무런 수입없이 막막하게 한 달 두 달 시간만 죽일 뿐이었다. 월 렌트비 2만페소, 각종 생활비와 세금…, 한국보다 갑절은 더 들었다. 다시 돌아가고 싶었지만, 이미 모든 재산을 처분했기에 한국에서도 필리핀에서처럼 밑바닥이 될 수밖에 없었다. 남편은 외국인이기에 취업이 쉽지 않았고, 취업이 된다 해도 필리피노 기준으로 저임을 받았다. 그걸로는 도저히 생활이 안돼 그녀는 요즘 피아노를 다시 시작했다. 한국 아이들 상대로 그 27명을 교습한다. 준비 없이 남의 말을 듣고 날아온 필리핀은 그리 만만치 않았다.

“렌트비 밀리는 것은 말할 것도 없구요. 전화, 전기 다 끊겨 본 적도 있어요. 그런데 그건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이가 덥다고 맥도널드 가자고 조르는데 돈 3,000원이 없어 못갈 때는 정말 피눈물이 났어요.”

그녀는 울고 있었다. 그동안 가슴 속에 깊이깊이 눌러왔던 설움이 복받친 게다. 연신 눈물을 훔치면서 아이에게 국수가락을 물리는 모습이 그렇게 처연해 보일 수 없었다. 이현주 씨는 국수집을 나와 트라이시클을 타고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좁다란 트라이시클 안에 아이 둘을 태우고 그녀는 검은 연기와 함께 사라졌다. 그녀가 아득히 멀어지자 파라냐케의 붉은 하늘이 눈 안으로 들어왔다. 열대의 석양은 서울의 그것보다 훨씬 붉고 아름다웠다.

“1,000페소만 꿔주면 귀국하겠소”

98년 6월 마카티 시내에는 필리핀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커다란 한국상점이 하나 들어섰다. 코리안프로덕트. 말그대로 한국의 소액투자자들이 몰려든 것. 준백화점 수준으로 시설을 완비하고 가격은 필리핀의 커다란 로컬시장 디비소리안 수준으로 한다는 전략이었다. 상품은 좋게, 가격은 싸게, 그래서 박리다매하자. 40개 업체가 한 건물에 빽빽히 들어앉았다. 속옷, 청바지 등의 의류, 화장품, 한국식품, 가방, 신발 등 다양한 품목을 두고 영업을 시작했다. 매일 꾕과리를 치며 호객행위도 했다. 그러나, 생각처럼 필리피노들의 발길을 잡을 수 없었다. 필리핀에서 10년 넘게 한국식당을 경영하고 있는 진고개 주인은 이렇게 분석한다.

“우선 생각의 차이가 컸겠죠. 이를테면 한국에선 한 아이템이 히트다, 그러면 죄다 그걸 똑같이 하잖아요. 그러나 필리핀 사람들에게 유행은 언제 왔다 언제 갔는지 모르게 사라지는 거예요. 한국 사람들 여기 오면 필리핀을 우리나라 60∼70년대 수준이라 업신여기며 옷가게 이쁘게 잘 차리면 성공한다고 생각하는데 절대 그렇지 않아요. 필리핀 사람들은 우리랑 선호도가 다르거든요. 그리고 코리안프로덕트는 처음부터 너무 싸구려 상품을 들여왔어요. 전략의 실패겠죠. 또 한가지, 우리나라 사람들은 누가 액세서리 해서 돈벌었다, 그럼 다들 그걸 해요. 그러니까 다들 도미노로 무너지는 거예요.”

사실 그도 코리안프로덕트에 투자했었다. 커피숍을 분양받았는데 하루 매상이 12만∼13만 원 수준이다, 계속 떨어지더니 9,000원, 1만 원대까지 하락하더라는 것. 그래서 자연스레 문을 닫게 됐다고. 그러면서 그는 최근 IMF 이후 한국에서 필리핀에 와 고생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고 한숨 쉰다.

“미국 이민은 아주 크게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필리핀은 소액으로도 쉽다, 그렇게 생각들 해요. 그러나 외국은 다 똑같이 어려운 거예요. 그런데 다들 준비없이 와요. 영어도 못하고, 필리핀 말인 ‘다갈로그’도 못하고, 이 나라에 대한 정보도 없이, 아무런 준비없이 그냥 왔다가 있는 돈 다 까먹고 쪽박 차고 되돌아가는 거예요. 저희 집 외상장부를 들추면 작은 호텔에묵으면서 대책없이 외상 깔고 있는 사람들 많아요. 여권까지 잡혀먹고, 오갈 데 없어진 사람들…. 어떤 사람은 제게 정말 한국으로 가고 싶은데 1,000페소가 없다, 그것만 꿔주면 돌아갈 수 있다, 그래서 돈 꿔준 사람들도 꽤 됩니다. 한국으로 갔는지는 미지수지만.”

진고개 식당은 최근 도로공사 때문에 필리핀 사람들이 자주 왔다갔다 해 필리핀 사람 대상으로 99페소짜리 한정식을 상품으로 내놨다. 한국돈 3,000원이니 싼 값에 이용하라는 뜻이었다. 그런데 의외로 필리핀 사람들보다 한국인들에게 인기가 높다. 그만큼 어렵게 지내는 한인들이 마카티에 많다는 증거라고 그는 해석하고 있다. 그는 또 필리핀으로 이민을 올 때는 여기서 뿌리내리겠다는 생각이 아니면 성공률보다 실패율이 훨씬 높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대개 한인들은 한 5년 고생해 돈벌어 한국 가 산다, 이런 식이기 때문에 대충 공부하고, 대충 살다, 필리핀 사람이 됐든 한인이 됐든 ‘당하고’ 떠난다는 것. 만일 지금 필리핀 이민을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에게 이런 충고를 하고 싶단다.

“필리핀에서 영원히 살 마음이 아니라면 고국을 떠나지 말라.”

신분상승의 핑크빛 꿈은 버려라

필리핀행을 결정하는 다수의 사람들은 한국에서 누릴 수 없는 부와 신분상승을 그린다. 물론 국제기구나 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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