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1997년 01-02월 1997-01-01   1311

이 사람을 아시나요-주민증 받으면 팔도 누빌끼야요

이북 ‘오마니’의 작은 꿈 이야기

이영순 씨.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하 북한) 국적의 중국 여권 소지자. 강원도 화천군 상서면 상향리에서 태어났고 우리말을 쓰지만, 얼마 전까지 외국인 신분으로 살아야 했다. 무슨 사연이 있길래…. 그녀를 찾아가던 날은 코 끝이 아린 정말 추운 겨울날이었다.

“뭘, 이리 누추한 곳까지 찾아오십미까?” 쌀쌀한 날씨에 찾아준 것이 고맙다는 인사의 반대로 그녀는 우릴 이렇게 맞았다.

올해 나이 쉰여덟. 그녀는 6·25 난리통에 부모 잃고 거지들과 휩쓸려 황해도 사리원까지 갔다. 그 곳에서 한 아주머니 소개로 봉사고아원에 보내졌고, 14살이 되던 1953년 함북 청진 제강소에서 일했다. “고아원에서 선생님이 너는 공부도 남만 못하니까 일하라 그래요. 어찌 내가 일할 수 있겠습미까 했더니만, 게 가서 일하면 밥을 많이 먹을 수 있다 하지 않아요? 그럼 나 일하겠다 했죠. 그래서 간 곳이 청진이고, 게서 쇳물 녹여 강철 만드는 일 했댔어요.” 굶주림에 쇠잔한 그녀가 선택한 길은 전쟁복구사업. 어릴 적에도 덩치는 제법 커, 다른 아이들이 못하는 일도 거뜬이 했다. 그래서 그녀는 청진제강소에서도 인정받는 ‘어린 노동자’로 살았다.

그렇게 세월은 흘렀지만 주린 배는 쉽사리 채울 수 없었다. 그러던 중, 청진 시장에서 만난 중국 길림성 용정현의 림씨 할아버지는 그녀를 중국에 데려다주었다. 그 곳에서 잘 살려면 중국국적을 가진 조선족과 혼인하는 게 좋다는 언질을 주면서…. 그래서 이영순 씨는 8살 연상인 중국 조선족 황씨를 소개받아 혼인한다. 황씨와 결혼한 그녀는 남도툰(남한 사람들이 모여 논농사 지어먹는 산골)에서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낳고, 넉넉한 살림은 아니지만 단란하게 살았다.

불법체류자, 분단이 준 인간적 설움

1966년, 중국대륙을 뒤흔든 문화혁명이 일어나자 그녀에겐 또한번 시련의 시기가 닥쳤다. “중국말 못하는 내게 모택동 어록을 외우라 명령했어요. 그런데 도저히…, 게다 중국 사람도 아니고 북한 사람이니까, 잡아간다 그래요. 그러더니 검투소(감옥소)에 절 잡아가뒀죠.” 그녀도 기막히던지 긴 한숨을 내뿜었다. 하마트면 그녀도 거기서 인생을 마감할지 몰랐다. 그러나 한 여자의 억울한 누명 때문에 그녀도 함께 풀려났다. 검투소 생활 6개월. 그 후에야 그녀는 다시 집을 찾을 수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버선발로 뛰어, 집 대문을 열었는데 집 안에는 만삭이 된 모르는 여자가 빨래를 널고 있었다. 그녀가 없는 사이 남편 황씨는 새 부인을 얻어 살림을 차리고 애 둘은 안씨네 집으로 입양시켰다.

“검투소에서 나온 나는 다시 북한으로 가야만 했어요. 요새 말로 치면 불법체류자니까. 안 갈 방법은 중국 국적자와 혼인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녀는 두 번째 결혼을 한다. 첫째 부인과 이혼하고 둘째 부인과 사별하면서 딸만 다섯을 둔 홀아비 조선족이었다. 길림성 안도현 재정국에 근무하는 공무원 서정심 씨, 그가 이영순 씨의 두 번째 남편이 된다.

1988년 서울에서 올림픽이 한창일 때 서씨는 이영순 씨에게 남한에 가자고 불현듯 제의했다. 꿈으로도 가지 못할 곳이라고 생각했던 남한에 남편이 가자고 했을 때 그녀는 뛸 듯이 기뻤다. 서씨가 남한의 친척을 찾아 서울로 연락했고, 92년 4월 서씨의 6촌누이로부터 초청장이 날아든다. 그녀는 초청장과 국방허가증을 첨부해 안도현 공안국 외사과에 여권을 신청했다. 그러나 남편에겐 중국 여권이, 그녀에겐 북한 여권이 발급됐다. 당시 그녀는 1977년 중국 주재 북한 대사관으로부터 해외공민증을 발급받은 이래 1987년 3월 1일자로 중국 정부에게서 5년간 유효한 외국인 거류허가증을 발급받았고, 다시 92년 2월에는 97년 3월까지 5년간의 거류허가증의 효력기간을 연장받았던 터였다. “막다른 골목에 와 있다, 싶었지요 뭐. 그런데 녕감이 수소문해 여권을 만들어줬어요.” 이영순 씨와 남편 서씨는 92년 9월 ‘1달 관광비자’로 인천항에 당도했다.

얼마만에 밟는 땅인가. 이리저리 부비고픈 한반도, 말이 통하고 거리의 간판을 읽을 수 있는 이 곳은 정녕 내 땅인가 싶은 게 그동안 타향에서 맺힌 설움이 울컥 치밀었다. 얼어붙은 중국 땅, 말 글 몰라 당한 설움이 얼마더냐, 그녀는 11살 철모르는 계집아이로 다시 돌아가 지난 시절의 괴로움과 분노, 정을 모두 토해내고 싶었다. 전쟁통에 엉겁결 떠났다가 다시는 못 올 줄 알았던 고향 남쪽을 찾으니 그동안 꼬깃꼬깃 감춰뒀던 한이, 한줄기 눈물이 되어 뺨을 타고 흘렀다. 그렇게 꼭 46년만에 그녀는 조국을 다시 찾았다.

제2의 인생, “열심히 살겠습니다”

새로 찾은 고국에서 내외는 각각 일터를 찾아 열심히 일했다. 아현동의 막국수집, 등촌동 의사집의 가정부, 용인의 골프장 등 가리지 않고 일했다. 비교적 안정적인 직장을 잡은 것은 93년 5월. 수원의 한 여관에서 청소며 빨래며 닥치는 대로 일해주는 잡역일을 보게 됐다. 그때는 남편과 떨어져 일했는데 어느날 남편은 함께 있을 수 없냐며 애원했다. 이영순 씨는 그때 주인에게 남편도 함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어렵사리 함께 있게 됐지만, 오히려 그 기회는 반전된다.

“여관에 술집 여자와 자러왔던 젊은 청년이 남편을 때렸답니다. 사람들 말이, 아줌마, 아저씨 돌아가셨어요, 해요. 그래 왜냐 물으니, 그 젊은 청년이 도망간 여자를 찾으라며 우리 녕감을 막 때렸다는 거예요. 그 끝에 남편이 죽고….” 남편의 비명횡사, 그녀는 결국 북한 국적자로 남한에서 외톨이가 됐다. 가리지 않고 일해 돈 많이 벌어 조국에서 폼나게 한 번 살아보자는 약속을 이루지 못하고 남편은 그렇게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장례를 치른 후 그녀는 고민에 빠진다. 그동안 알뜰살뜰 모아둔 돈을 합치면 중국에선 큰 돈으로 잘 살 수 있었다. 그러나 남한에 묻힌 남편을 두고 혼자 중국으로 다시 가서 살 순 없었다. 하지만 불법체류자로, 그것도 북한 국적의 신분으로 언제까지 편안히 살 수 있을까?

주변의 귀띔으로 그녀는 남대문경찰서에 귀순신청을 낸다. 그러나 그녀에게 돌아온 건 외국인보호소 수감뿐. 역대 정부가 귀순자에게 대접했던 것과는 상이하게 그녀는 정부로부터 홀대를 받았다. 그래도 그녀는, “그래, 이렇게 죽어도 할 수 없다, 아무도 모르는 남의 땅에서 죽느니 차라리 남편 곁에 묻힐 묘소도 있는 이 곳이 백번 낫다, 못찾을 줄 알았던 내 조국을 찾은 것만도 감사하다” 그러면서, 하루 하루 버텼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날, 그녀에게 한줄기 광명이 비친다. “보호소에 갇혀 있는데 박원순 변호사님이 찾아오셨어요. 오셔서 하신 말씀은 꼭 살려줄 테니 마음 단단히 잡숫고 계시라 해요. 안 아픈 게 제일이니 아프지 말고 계시라, 하시면서. 어찌나 고마운지 선생님 오신 후에 힘을 내 이의신청서 내는 공부하면서 지냈어요.”

그렇게 15번 재판정에 서고, 1년 6개월간 법정에서 투쟁한 끝에 그녀는 가까스로 ‘북한 주민도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법원의 판결을 받아냈다. “그 여자 독하다 소리 많이 들었어요. 그래도 어쩌겠어요. 이것 아니면 죽는 거나 다름없는데. 그리고 박원순 선생님처럼 제게 용기주는 분들이 많았어요. 결코 포기할 수 없었죠.” 대법원의 확정판결 이후 그녀는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제2의 인생을 다시금 출발할 수 있게 됐다.

“새로운 인생에 대한 기대? 글쎄…. 열심히 살께요. 나이가 한 사십만 됐어도…, 열심히 살겠습니다.” 그녀는 지금 월세 15만 원짜리 작은 방에서 홀로 살고 있다. 하는 일은 중국노동자센터에서 청소도 하고 밥도 해주며, 회원비 받고 회원증을 준다. 또 중국말 통역도 한다(글은 모르지만 말을 대략 할 수 있다고…). 하루일과 중 가장 기다려지는 것은 텔레비전 시작 시간이다. 거의 홀로 지내는 그녀에게 색다른 세상과 사람, 움직이는 행동을 보여주는 것은 오직 텔레비전뿐이기 때문이다. “요샌 ‘림꺽정’ 보느라…, 하하하, 그걸 재미루 살지요.” 소박한 웃음이 넉넉한 중년의 어머니와 다르지 않다. 그래서 중국노동자센터 상근자들은 그녀를 ‘오마니’라 부르나 보다. 하지만 그녀가 거쳐온 46년의 생은 자갈밭 구르는 마차처럼 울퉁불퉁 질곡이 많았다. 얼굴에 움푹 패인 주름살은 그녀가 살아온 거친 삶의 모형을 본떴지만 길고 가는 손가락은 여염집 부인들과 다를 바 없다. 이영순 씨의 앞으로의 계획과 희망은 뭘까?

“일단 주민증을 받아야 해요. 주민증 받으면, 제일 먼저 박원순 변호사님과 다른 분들 찾아뵙고 인사할 겁니다. 얼마나 고마운 분들인지 몰라요.” 그녀는 연신 눈시울까지 붉으레 물들이며 감사의 뜻을 전했다.

“또, 남한 곳곳을 다 누비고 싶어요. 부산도 가구 싶구, 내 고향 강원도도 다시 갈 꺼구요. 조선 팔도를 맘껏 다니고 싶어요.” 소풍 전 날 어린 아이처럼 눈이 초롱초롱해져 그녀는 쉴새없이 자기 계획을 늘어놓았다. “다닐려면 돈 벌어야 해요. 제가 다른 것 몰라도 중국 음식 좀 할 줄 알아요. 중국 할아버지들이 드시는 ‘구어즈’라는 요리가 있어요. 이거랑 만두, 또 양육철이라구, 양고기 구워서 파는 요리 있는데, 그런 것 파는 장사 하고 싶어요. 잘 될 것 같아요.”

어찌보면 죽었다 다시 태어난 제2의 인생, 진정코 이영순 씨가 바라는 대로 이뤄졌으면 좋겠다. 지난 40여 년간 그녀가 겪었던 악몽은 영원히 그녀 주변에서 사라져주길 기원할 뿐이다. 그게 올해를 맞는 첫 소원이다.

장윤선(참여사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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