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1년 04월 2011-04-01   3047

아주 특별한 만남-문새미, 박흥석 회원



내 인생의 봄, 희망에서 찾다

“우리는 역사적 사명을 띠고 촛불집회에서 만났습니다”
문새미
박흥석 회원


이경휴
수필가, 『참여사회』 객원기자

봄이 성큼 왔다. 병아리색깔로 시작되는 봄꽃들의 신호탄이 울리기 시작한다. 꽃이라기보다는 나무가 꾸는 꿈처럼 보이는 산수유가 얼굴을 내밀고, ‘싸리골 올동박이 다 떨어진다.’는 <정선아리랑>의 생강나무 꽃이 산야를 물들인다. 이어 회색빛 도심 곳곳에선 샛노랗게 개나리가 피어나며 봄은 노란색으로 덧칠된다. 혹독하게 추웠던 지난겨울이 이제는 꿈처럼 스쳐가니, 고행도 벗어나면 그리움이던가. 4월의 바람 속에는 꽃내가 묻어난다.

  이 시절에 한창 꽃이 피고 있는 커플을 만났다. 3년 전, 대한민국을 뒤흔들었던 광우병 파동의 회오리 속에 만나 사랑을 담금질해 온 사람들. 문새미, 박흥석(30세) 동갑내기 촛불연인이다.

  일요일 오후, ‘카페통인’은 적적하고 썰렁했다. 그들이 들어서자 ‘통인’에는 순간 전원 스위치가 켜지는 듯했다. 배경음악으로 흐르던 ‘청계천 8가’에는 뿌연 헤드라이트의 불빛이 들어오며 술렁이기 시작했다.

  긴 머리에 하얀 원피스 차림의 그녀는 유난히 웃음이 많고 소리 또한 높고 맑았다. 그 웃음소리 따라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는 사랑이 가득했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서로 닮는다고 하더니 두 사람을 보니 흡사 남매 같았다. 둘 사이의 구체적인 전척사항은 엠바고(Embargo) 보도자제라고 한다.

  마냥 달뜬 표정으로 앉아있는 그녀와 달리 그는 다소 긴장하듯 꼿꼿하다. 청색 줄무늬 Y셔츠가 더욱 단정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공무원 인상이 절로 풍겨나는 청년이다. 인천광역시 B구에 근무한다. 공무원이라는 직업을 밝히기에는 참여사회 지면이 부담스럽지 않을지 지레 염려 되었다. 하지만 기우였다. 그는 활짝 웃으며 흔쾌히 명함을 건네주었다.

의상디자이너, 법학도, 그리고 광우병

그들의 역사는 2008년 서울 광장에서 시작되었다. ‘쇠고기 수입 재개 협상’을 요구하는 시민들의 촛불집회가 한창이었던 5월 말, ‘따로 국밥’이었던 그들은 물대포를 맞으며 ‘한통속’이 되어버렸다. 진로 문제를 놓고 치열하게 방황하던 그녀와 사법시험을 일단 접고 삶의 에너지를 재충전하려던 그에게 찾아온 한 줄기의 빛은 촛불집회였다. 의상디자인을 전공한 ‘이대(梨大) 나온 여자’가 화려하다는 이미지를 모두 벗어던지고, 사회적 기업인 한 공방을 가슴에 두고 고민하던 때였다.

  “흥석 씨가 공부한 법학은 어떤 의미로든 사회에 환원을 할 수 있는 학문이지만 제 전공은 사회와의 접점을 찾기가 어려웠어요. 일류 디자이너가 되기 위해선 강남에서 옷을 사 입고 시장조사를 해야 하고, 유학도 가야하고…. 이게 과연 내가 추구하는 삶인가? 사치스러운 일이라는 생각에 회의가 들었어요. 그러던 차에 전공도 살리고 대학 때 공부방 교사로 일했던 경험도 있고 해서 사회적 기업에 관심을 가졌고, 자연스럽게 사회적 이슈에 예민해지더라고요. 혼자 촛불집회에 나갔다 그곳에서 이 친구를 만났죠. 동병상련이랄까, 첫 눈에 믿음이 가더라고요. 때문에 서울광장은 특별한 의미가 있는 곳이 되었어요. 우리나라 노래 ‘다시 광화문에서’가 우리 둘만의 휴대전화 컬러링이고 다른 사람의 전화가 올 때는 ‘청계천 8가’ 예요.”

  창공을 향해 힘차게 날아오르는 파랑새 한 마리를 좇아 그가 입을 열었다.

  “고1 때 IMF를 겪으면서 아버지의 좌절을 보았어요. 아버지박흥석 회원는 아침 5시부터 저녁 늦게까지 열심히 일을 하시는데 가정형편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어요. 당시 나는 그 상황이 아버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인 문제라고 생각했고, 그 원인을 짚어보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신문읽기였어요. 그런데 시골이다 보니 보급되는 신문이라고는 중앙의 보수적인 두 종류의 신문만 들어왔어요. 그래도 첫 지면부터 꼼꼼히 읽기 시작 했어요.”

  회상하는 눈빛은 여전히 형형했고 당차고 패기만만했던 포부도 단박에 느껴졌다. 이어 잠시 침묵이 흘렀고 차분한 어조로 이야기를 다시 계속되었다.

  “신문읽으면서 어렴풋이나마 세상이 어떤 힘에 의해 돌아가는지 보이기도 했어요. 당시 고등학생으로서는 드물게 국정원 공무원이 되겠다는 구체적인 생각도 했죠.”

  한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선 그 사람의 어린 시절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강원도 영월 태생으로 한 학년의 학생 수가 30명을 넘지 않는 벽지 출신으로, 대부분의 부모님들은 농사를 지으며 선량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이들에게도 외환위기의 파고는 넘기 힘든 큰 물살이었고 그로 인해 피해를 입는 가정들도 늘어났다. 그들은 적절한 법률서비스도 받을 수 없었고 법에 대한 무지로 고스란히 당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가 법학을 진로로 택한 건 자연스런 일이었다. 그의 목표는 사법시험이었다.

희망이라는 이름의 촛불

아이러니하게도 사법시험 실패가 전환의 계기가 되었다. 책에 파묻혔던 시간 속에서 그는 자신이 정체되어 간다는 위기감을 느꼈다. 세상과 함께 변하지 못하는 자신을 바라보며 고시의 엘리트주의를 반성했고, 꼭 공직자나 공권력을 가지고 세상을 바꾸겠다는 오만을 스스로 질타했다.

  지식으로 무장된 머리를 버리고 몸을 낮춰 지역사회로 나왔다. 한 선거캠프의 자원봉사자로 들어가 바닥 청소부터 시작하며 사람들과 몸을 맞대었다. 부족한 일손을 탓하지 않고 전심전력으로 몇 사람의 몫을 너끈히 해내며 선거를 치러냈고, 덕분에 지역자치단체장의 수행비서로 민심을 훑고 다니는 게 그의 역할이다.

  88만원 세대의 비애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이력이지만 연인 앞에서는 당당했고, 그녀 또한 88만원 세대의 애환을 누구보다 더 실감하는지라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사랑스런 그들을 보며 문득 아랍Arab의 시 한 구절이 떠올랐다. ‘반대편에서 화살이 날아오는 것을 본다 해도 나 그대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구나. 그대 뒤에서 사느니 그대 앞에서 죽는 게 더 달콤하리.’

  다시 촛불집회의 이야기로 되돌아왔다. 5월 초면 여고생들이 촛불을 들고 나온 지 만 3년이 되는 때이다. 뒤이어 아이들의 건강권을 요구하며 유모차를 끌고 젊은 엄마들이 나왔고, 소통 부재인 정부를 향해 다양한 목소리들이 쏟아져 나왔던 시기를 추억한다. 그러나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비폭력·침묵·평화 시위를 넘어 문화행사로 발전한 촛불은 우리의 일상 속으로 깊숙이 파고들어 평화의 불씨를 키우고 있다.

  촛불의 의미에 대해 각각 질문했다. 단답형으로 총알답변이 나왔다.
 
  “식상한 답변이지만 희망이죠,”

  “족쇄요, 숙명이죠.”

  힐끗 눈치를 보며 그녀는 웃음과 함께 대답했다. 그러자 그가 다시 정리했다.

  “우리는 역사적 사명을 띠고 촛불집회에서 만났습니다.”

  각각 따로 집회에 나왔다, 처음 물대포를 쏘던 날 같이 물을 맞으며 수중 커플이 되었다.

  이듬해인 2009년, 그들 앞에는 더욱 운명적인 사건이 찾아왔다. 대한문 앞에서 거행된 노무현 대통령 추모제에 함께 참석했다가 그가 연행된 것이다.

  그것은 먼저 연행되는 그녀를 그가 품어서 빼돌리고 자발적인(?) 연행으로 마무리했다. 확실하게 큐피드의 화살을 그녀의 가슴에 적중시킨 셈이었다. 형법상 일반교통방해죄 혐의로 1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고, 2심 재판에서 변호사 없이 자신을 변호한 그는, 무죄 판결을 이끌어 냄으로써 스스로 밝힌 ‘사필귀정’이란 구절의 의미를 완성했다.

거버넌스 위한 소통·참여확대

참여연대 회원 가입은 2010년 7월로 되어있다. 가입 동기를 묻자 두 사람 표정이 묘하게 흔들렸다. 이미 그들의 약지에는 커플링이 빛나고 있었지만 그녀는 쑥스러워 하며 입을 열었다.

  “데이트를 하다 참여연대 부근까지 왔어요. 작고 아담한 카페도 많고 한명숙 전 총리의 남편이 운영하는 길담서원도 있더라고요. 정겨운 동네라고 느꼈는데 참여연대 앞에 오니 “누구나 편하게 들어오세요.”라는 글귀가 걸음을 멈추게 했어요. 그래서 편한 마음으로 손을 잡고 들어왔죠.”

  후일담으로 그녀와 달리 그는 망설였다고 한다. 그녀가 참여연대라는 하드웨어만을 알고 있었다면 그는 소프트웨어까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 뭐라 뭐라 해도 회원=회비라는 등식이 부담스러웠다고 했다. 언젠가는 가입해야지 하며 차일피일 미루어왔는데 여자 친구 덕에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고 오히려 그녀에게 공功을 돌렸다.

  참여연대의 첫 인상과 개선점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해달라고 주문하자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했다. ‘주례사’ 같은 칭찬 일색은 사양한다며 다시 ‘멍석’을 깔아주었다.

  “사무실에 들어가니 여느 시민단체 분위기와는 달랐어요. 모두 열심히 일을 하는 탓인지 쭈뼛쭈뼛 들어서는 우리에게 눈길 한번 안 주더라고요. 꼭 관공서에 들어가는 인상이랄까… 다행히 처음 마주친 모 간사님이 친절하게 우리를 맞아주셔서 마음 편해졌어요. 참여연대의 전반적인 설명을 들으며 자원활동을 결정했고 저는 시민참여팀, 흥석 씨는 사법감시팀으로 배정받았어요. 그리고 저는 이번에 회원모니터단으로 선정되기도 했어요.”
문새미 회원
  흡사 상을 받은 듯한 달뜬 표정이 잠시 스치더니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의류디자인을 전공하다 보니 마케팅이 참 중요하더라고요. 참여연대도 마케팅에 신경을 좀 쓰면 어떨까요? 홈피에 들어가면 복잡하게 읽을거리가 늘어져있는 느낌이에요. 내용도 어렵고 마음먹고 읽어도 이해되지 않으면 내가 이런 글도 못 읽으면서 회원자격이 있을까 하는 자괴감도 들더라고요. 그런데 어려운 건 사실이에요.”

  뒤미처 그가 보충설명을 했다.

   “홈피는 아마 재정문제와 연결되는 거 아닌가요? 보안이나 디자인 등의 문제를 고려하면 외주를 주어야하는데 그게 쉬운 일이 아니겠죠. 그런데 참여연대의 강점은 많은 회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기회를 주면 어떨까요? 일종의 재능기부를 받는 거죠. 그런데….”

  “한마디로 문턱이 높다는 인상이 문제죠. 대중성보다는 전문성이 강한 느낌을 주는 단체같고요. 권력 감시기구로서 훌륭한 역할을 하지만 회원 수가 몇년째 일만 명 선에서 정체되어 있다는 건 내부적으로 고민할 사안이라 생각해요.

  다른 시민단체들과 연대하는 운영의 묘도 좀 부렸으면 좋겠고. 다양한 계층을 아우르고 서울 중심의 현안에서 벗어나 대시민적인 정책이 필요할 것 같아요. 그럼 오죽 일이 많아지겠어요? 그렇지만 참여연대와 같이 정부를 감시 및 견제하기도 하고 정책에 참여하는 등, 중앙정부 차원에서 거버넌스governance:민관협치에 참여할 수 있는 단체가 지금 우리나라에 많은게 아니니, 그만큼 기대가 크고 더 소중하지요.”

  마지막 질문은 달콤한 걸로 택했다. 어떻게 결혼 준비를 하고 있느냐고. 특별한 만남이라 시작 또한 예사롭지 않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두 사람의 표정은 순간 커다랗고 노란 전구처럼 환해졌다. 따뜻한 빛과 열을 사방에 뿌리면서 스스로 빛을 내는 골목길의 전등처럼.

  “특별할 건 없고, 웨딩드레스는 제가 직접 만들고 있어요. 그리고 웨딩촬영도 광화문 중심으로 하고, 물대포 맞았던 곳에서 진한 포즈도 취할 생각이에요.”

  아, 인생의 봄날은 이렇게 시작되는 게 아닐까. 곧이어 피어나는 라일락 향기보다 더 진한 향내를 품으며 살아가지 싶다. 비록 어렵고 힘든 길이 찾아오더라도 사랑이 손짓하니 어딘들 못 가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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