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2년 12월 2012-12-07   3240

[통인] 대한민국, 가장 왼쪽에 있는 남자_박경석 노들장애인야학교장

박경석 노들장애인야학교장

 

대한민국, 가장 왼쪽에 있는 남자 

박경석 노들장애인야학 교장 

황지희 현대도시여성

사진 Nina Ahn

 

사는 게 매일 즐거웠다. 세상엔 관심이 전혀 없었다. 해병대 시절엔 휴가를 나왔다가 특수부대 군인들과 싸우기도 했다. 수많은 청춘들이 거리로 나와 민주화를 외치던 1980년대에, 그는 자신은 날라리니 PD가 아니라 NL계열 운동권이라는 너스레를 떨며 술잔을 기울였다. 그 시절에 행글라이더를 탈 정도로 즐길 줄 알았다. 

그러다가 사고를 당했다. 하반신 마비. 걷지 못했다. 아니, 휠체어로 걸어야했다. 5년 동안 집에만 있었다. 외롭다는 감정도 사치처럼 느껴졌다. 

그는 그 시절을 “외로움보다 더 무서운 것은 무덤 같은 무감각이었다. 세상에 대해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나의 하반신처럼.”이라고 회고했다. 차라리 고통을 택하자고 결심한 그는 세상 밖으로 나왔다. 1988년의 일이다. 이 남자가 바로 노들장애인야학 박경석 교장이다. 

이제 세상이 기억하는 박경석 교장은 늘 거리에 있는 사람이 됐다. 1988년 이후 발생한 장애인 관련 각종 사건, 각종 운동에서 그가 등장하지 않는 순간은 없었다. 그리고 그는 토론회장보다 농성장이나 집회 현장에 더 자주 출몰한다. 인터뷰를 위해 만난 2012년 11월에도 박경석 교장은,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서울 광화문에서 100일 가까이 진행되고 있는 ‘장애등급제 폐지 및 부양의무제 폐지’ 운동 농성장에 있었다. 

 

내 몸을 ‘등급’으로 나누지 말라!

 

최근 행보를 보면, 장애등급제 폐지, 부양의무제 폐지, 장애인 활동지원제도의 현실화 등을 위한 운동을 주로 펼치고 있다. 이들은 각기 다른 제도인데, 어떤 연결고리가 있는가?

먼저 부양의무제에 대한 이해가 중요하다. 쉽게 말해 장애인을 포함한 가난한 사람들이라도 부양할 수 있는 가족이 법적으로 있으면 기초생활수급권자 자격을 박탈할 수 있는 제도다. 시설에 있는 많은 장애인들이 결국 이 제도 때문에 자립을 포기하거나, 시설 밖으로 나갔다가도 돌아온다. 장애인과 가족 서로에게 상처다. 가족이 경제력이 부족해 장애인을 부양하지 못한다는 것을 정부에 증명하는 모욕을 견뎌야 한다. 용기를 가지고 독립을 꿈꾸는 장애인들은 서류상에만 남아있는 가족들 때문에 정작 필요한 지원을 받지 못하는 사례가 빈번하다. 

 

이런 상황에서 대부분의 장애인은 어떤 선택을 하는가? 

시설에 있을 수밖에 없는 구조다. 중증 장애인들은 시설에 있으면 국가에서 주는 수급권으로 살면 된다. 그게 가장 안전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장애인은 독립해서 자신의 삶을 영위하고 싶은 욕망과 권리를 스스로 포기하게 되곤 한다. 

 

그렇다면, 장애인 활동 지원제도는 장애인의 독립에 실질적 도움을 주는가? 

그렇다. 중증 장애인의 일상을 보조해 준다. 하지만 현재는 취지를 전혀 살리지 못하고 수급자를 줄이기에만 급급하다. 수급 자격을 심사해 등급을 나누기 때문에 실제로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장애인은 한정적이다. 현재 활동보조가 필요한 장애인은 35만 명이지만, 정부의 기준을 통과한 장애인은 5만 명, 실제 서비스 이용 인구는 3만 6천 명 선이다.

 

나머지 1만 4천 가량의 장애인은 기준이 부합하는데도 왜 서비스를 받지 못하나?  

월 10만 원 가량의 본인이 직접 내야하는 비용 때문이다. 노동을 통해 소득 창출이 불가능한 중증 장애인들에게 이 금액은 감당하기 힘든 액수다. 

 

박경석 노들장애인야학교장

 

장애등급제 폐지 운동은 어떤 의미인가? 

한 인간을 등급으로 나눈다는 자체가 반인권적인데, 이에 대해 모두가 무감각하다. 여성을, 혹은 남성을 어떤 잣대로 구분하는 것과 같다. 무엇으로 구분하나? 외모로? 이 문제는 장애등급제가 있는 것이 합리적인가 불합리적인가의 문제가 아니다. 내 몸을 1등급에서 6등급으로 단계를 나누지 말라는 말이다. 

 

등급이 없으면, 각종 복지 서비스를 어떻게 장애인들에게 부여하나? 

활동보조 서비스가 좋은 예다. 개인의 상황을 상담해서, 이 사람에게 얼마나 많은 시간의 활동보조가 필요한지 심사하면 된다. 그런데 현재의 장애등급제 때문에 등급이 낮은 장애인들은 신청조차 못하고 있다. 장애인별로 등급이 나뉘는 데 길들여져 있을 뿐, 다른 방법으로 지원 수준을 구분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등급 구분은 중증 장애인을 우선 지원한다는 명분 하에 예산을 줄이는 편법 수단으로 쓰일 뿐이다. 

 

아예 장애인이라는 구분을 하지 말자는 뜻인가? 

아니다. 현재처럼 의학적 기준으로만 장애인을 판단하지 말고, 신체적, 정신적 손상으로 인한 ‘사회적 진입 장벽’을 고려해서 장애인에게 제공될 복지 서비스를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장애인을 다시 장애등급별로 구분하지 말고 개인에게 필요한 복지 서비스를 제공하면 된다. 

 

그가 거리에 있는 이유 

 

박 교장은 장애인 문제는 장애인 당사자가 직접 움직여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장애인 운동에서는 ‘우리를 제외하고는 우리에 관해 어떤 것도 하지 말라(Nothing About Us Without Us)’의 원칙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장애인 운동은 한국 사회운동 진영 안에서도 주목받은 시기가 매우 짧다. 20년 전만해도 우스갯소리로 “장애해방보다 노동해방과 조국통일이 먼저인가 보다“는 자조적인 농담이 자연스러울 정도였다. 그래서 사회운동 분야 내에서도 ‘왼쪽’ 소리를 들었다. 박 교장의 경우 그 안에서도 가장 급진적이라 평가받고 있다. 그가 대표를 맡고 있는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는 장애인 당사자, 장애인부모운동 세력 등이 중심이 되고 있다. 

말썽도 많았다. 각종 장애인 단체들이 성격이 명확해지고, 규모가 커지고, 통합하는 과정에서 장애인계도 성장통을 앓았다. 그가 몸담았던 ‘노들야학’은 혼자 기존 단체에서 떨어져 나와 공간까지 비워주는 수난도 겪었다. 하지만 장애인이 직접 나서는 장애인 운동, 특히 경증 남성 장애인들이 중심이 되던 운동은, 박경석 교장과 같은 중증 장애인들이 거리로 나오면서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그가 주도했던 ‘장애인 이동권 보장 운동’이다. 2003년 국립국어원 신어 자료집에 ‘이동권’이라는 단어가 등재될 정도로 이 운동은 사회적으로 주목을 받았다. 한국 사회가 장애인도 교육과 직업을 보장받아야 하고 비장애인과 함께 사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명제를 부정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부끄럽게도 이동 없이는 장애인의 교육도, 직업도, 소통도 있을 수 없다는 당연한 사실을 외면해왔다. 박경석 교장을 비롯한 수많은 중증 장애인들은 당시 휠체어를 끌고 수없이 버스를 타면서 저상버스 도입의 필요성을 온몸으로 알렸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영향력만큼이나 쓴소리도 많이 듣는다. 

 

박경석 노들장애인야학교장

▲광화문 농성장에서 장애등급제 폐지, 부양의무제 폐지, 장애인 활동지원제도 현실화를 위한 거리 서명을 받고 있다.

박경석 노들장애인야학교장

▲광화문 농성장에 차려진 고 김주영(33) 활동가와 고 박지우(13) 양의 분향소. 故 김주영 활동가는 24시간 활동보조가 필요한 중증 장애인이었다. 10월 26일 활동보조인이 밤 11시에 퇴근한 뒤 화재가 발생했고, 직접 신고를 하는 등 탈출을 시도했지만 혼자 거동할 수 없어 현장을 빠져나오지 못한 채 사망했다. 박지우 양은 10월 29일 화재 속에서 질식해 11월 7일 사망했다. 박지우 양은 부모가 일하러 간 사이 뇌병변장애 1급인 남동생(11)의 밥을 챙겨주기 위해 전자레인지를 작동하다 불이 발생, 거동이 불편한 동생의 손을 이끌고 안방으로 피신했으나 중태에 빠졌다가 사망했다. 남매의 부모는 장애등급 재판정과 비싼 검사료 등의 문제로 인해 활동지원서비스를 신청하지 못했었으며, 신청했다고 하더라도 6세 이상~18세 미만 장애 아동이 받을 수 있는 활동지원서비스는 한 달에 고작 60여 시간에 불과해 실질적인 생활보조는 받을 수 없었다.


늘 운동 방식이 비슷하다. 거리에 계시고. 그만큼 운동이 진부하다는 소리도 많이 듣지 않나?  

물론 그런 고민을 한다. 장애인계에도 다양한 운동 방식이 있다. 정치권 진출도, 문화적 접근도 필요하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그렇게 눈을 돌리는 것이 내가 발을 딛고 있는 장애인 민중의 삶과 동떨어져 버리는 일은 아닐까 하는 불안이 있다. 그곳과 거리를 두면서까지 다른 방식의 운동을 할 생각은 없다. 현장을 계속 지키는 것이 내 목표다.

 

그런 결심을 한 계기가 있었나? 

나는 중도 장애인이라 장애인 운동계에서도 초기에는 인맥이 거의 없는 편이었다. 그러다가 서울장애인복지관에서 교육을 받으면서 정태수, 박흥수 선배를 만났다. 두 분 다 중증 장애인이었다. 그들을 만나고 내가 변했다. 당시만 해도 나는 착한(?) 장애인이었다(웃음). 

그들과 만나며 장애인 문제가 나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구조의 문제라는 것을 알았다. 당시 우리가 가장 싫어하는 단어는 ‘복종’이었다. 세상으로부터 숨어 있는 게 싫었다. 그 즈음 우리 집 앞에서 세 명이 소주를 마시면서 앞으로도 견고한 조직을 만들어 보자고 결의했다. 우리끼리 ‘정자 결의’라고 부른다(웃음).

 

중증 장애인에 소위 ‘현장파’라고 불리는 조직이라면, 장애인계 내에서도 소수파 일 것 같다. 여전히 그들과 함께하고 있나?  

정태수, 박흥수 두 분 모두 돌아가셨다. 장애인들의 조직화 문제로 과로하다가 돌아가신 선배도 있고, 가난을 비관해서 술을 많이 마시다가 허망하게 간 사람도 있다.

 

언제 그들이 가장 그립나? 

무엇인가를 결정해야 할 때, 판단할 때, 물어보고 싶은데 물어볼 곳이 없을 때, 형이라면 이때 어떤 결정을 했을까 생각하곤 한다.

 

무감각은 최악의 태도다 

 

무관심이야말로 최악의 태도라며, 다음 세대를 위해 ‘분노하라’고 주장하던 프랑스의 사회운동가 스테판 에셀에게 뜨겁게 화답하던 우리 사회는, 과연 박경석 교장에게 응답할까? 

박경석 교장은 무감각이야말로 최악의 태도라며 스스로를 위해 끊임없이 저항하라고 주문했다. 이는 장애인, 비장애인 모두에게 답변을 요구하는 메시지다. 

변화의 조짐이 보인다. 장애인들이 먼저 일어났다. 2009년에는 시설에 있던 중증 장애인 8명이 ‘더 이상 장애인 시설에서 살지 않겠다’면서 서울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서 노숙 투쟁을 하며 탈시설화를 외쳤다. 1988년의 박경석 교장과 같은 장애인들이 점점 늘고 있다. 

그렇다면 장애인보다 훨씬 많은 숫자를 차지하고 있는 비장애인들의 감각 척도는 어느 정도일까. 혹시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조차, 우선순위에서 장애인을 배제하고 있지는 않은가? 거리로 나온 장애인들의 분노를 가늠할 수 있을까? 이유를 알고 있을까? 비장애인에게 다음과 같은 상황은 어떤 의미일까? 누군가가 장애로 인해 원하는 장소에 가지 못하고, 교육받지 못하고, 직장을 얻지 못하고, 스스로 독립해서 살 수 없다. 모두에게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미래 또한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유추된다. 이런 현실에 대한 비장애인의 감정은 무엇이 정답일까? 분노? 답답함? 감정을 느꼈다면, 그 다음의 행동은 무엇이 옳을까? 장애인을 위로하는 게 현실적일까? 함께 저항해야 할까? 이 문제에 분노하지 않는 세상은 과연 건강할까?

 

박경석 교장은 초기에 그와 결의를 다졌던 정태수 10주기를 추모하는 글에서
이런 말을 남기기도 했다.  

 

“파업은 노동자들의 공장 속에서만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장애인 운동에서 파업은 거리 점거이다.
비장애인의 가는 속도를 멈추는 것이다.”  

 

 

황지희 전 참여사회 기자. 현재 모 회사 수석PR컨설턴트로 근무 중. 나라 걱정을 겸업하고 있으며, 클라이언트를 위해 모든 영화를 포기하고 소처럼 일할 각오가 되어있는 현대 도시 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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