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8년 04월 2008-03-13   475

이제훈이 만난 사람_하승창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운영위원장

‘변화하는 사회’를 읽는 네 개의 열쇠말,
 개인­지역­인터넷­연대

  하승창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운영위원장

글    이제훈<한겨레> 통일팀장 nomad@hani.co.kr
사진  김영광사진가 k-photo@hanmail.net

“마땅히 할 사람이 없대요. 제가 지금 단체의 실무책임을 맡고 있지도 않고. 그리고 전에도 제가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운영위원장을 맡은 적이 있고요.”

하승창(47세) 함께하는 시민행동 정책위원장은 자신이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죐 운영위원장을 새로 맡게 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에둘러 가는 답변이다. ‘사람이 없다’고 아무한테나 중요한 일을 맡기지는 않는다. 이게 상식이다. 그가 왜 이 격변의 시기에 연대회의 운영위원장이라는 중책을 맡게 됐는지 좀더 깊은 설명이 필요하다.

그는 지난해 8월 1년간의 미국 연수를 마치고 귀국했다. 그러자 주위 사람들이 그에게 ‘연대회의 새 운영위원장을 맡아줘야겠다’고 주문했다. 그는 거듭 거절했다. 결심을 하게 된 계기는 지난 연말 대통령선거였다. 그의 결심의 변은 매우 추상적이다.

“이 시기 내 자리는 거기인가보다라는 생각을 했다. 많은 사람들이 권할 때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추가 설명. “지난 몇 년간 시민운동은 침체하고 있었다. 이는 지표로 쉽게 알 수 있다. 대선으로 권력지형이 달라졌다. 안팎으로 뭔가 새로운 변화가 필요한 때다. 하지만 개별 단체가 각자 이런 변화를 감당하기는 어렵다. 연대회의가 축이 될 수 있다. 난 그동안 운동을 하면서 한 단체의 이해만 주장하고 다니지 않았다. 다른 분들이 ‘하승창이면 일을 엮어내겠구나’라고 기대했을 수 있다.”

연대회의 운영위원장은 지금까지 비상근이던 체제를 벗어나, 이제부턴 상근으로 일하게 된다. 요컨대 일하는 시간엔 연대회의의 사회적 구실을 구현하는 데 모든 힘을 쏟을 수 있다는 말이다. 그만큼 연대회의 운영위원장을 새로 맡게 된 하승창의 몫이 중요해진 것이다.

“이명박, 예상보다 빠르게 권위를 잃어가고 있다”

그의 어법은 사회운동가답지 않게(?) 부드럽다. 뭐든 모나게 얘기하는 법이 없다. 목소리를 높이지도, 말을 칼과 창으로 벼려 목표물을 직접 찌르지도 않는다.

 대선 이후 두 달이 흐른 지금 ‘이명박 체제’에 대한 그의 평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빨리 권위를 상실하고 있는 것 같아요. 지지자들에게서조차. 노무현 대통령을 두고 말실수와 태도를 문제 삼는 이들이 많았는데, 이명박 대통령은 말실수와 태도뿐만 아니라 정책 논란도 심한 거 같아요. 어떤 이들은 ‘노무현 5년의 피로도를 인수위 두 달에 다 느낀다’고도 하던데,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생각보다 빨리 지지자들의 우려가 증가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리곤 못을 박듯이 이렇게 덧붙였다. “그렇다고 사회운동의 잘못이 면피가 되는 건 아니에요.”

침체기의 시민사회운동, 해법 찾지 못해

시민사회운동의 무엇이 문제일까?

그에게 ‘이른바 민주정부 10년간 한국사회와 시민사회운동의 성취와 한계를 짚어달라’고 주문했더니, 그의 답변은 ‘1987년 이후’로 시작됐다.

“지난 20년간 한국사회는 지속적으로 급속한 변화를 겪어왔다. 민주주의의 측면에서 변화가 확대돼왔다. 사회운동도 엄청나게 성장했다. 1990년대의 성장 속도는 운동하는 사람들도 놀랄 정도였다. 2000년 총선연대 활동이 정점이었다고 생각한다. 그 뒤 2~3년간 평형을 유지하다 이후 침체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한국사회의 지형이 변화하고 있는데, 운동이 이를 따라가지 못한 측면이 크다. 해법을 잘 찾지 못하고 있다.”

우선 그는 두 가지를 지적했다.

“지금 민주노총이 비정규직 문제를 대변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잖아요? 또 전교조가 한국의 교육문제에 제대로 천착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가 얼마나 많을까요?”

‘운동이 기득세력화하고 있다’는 지적과 관련된 것인데, 쉽사리 풀릴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참여연대나 환경운동연합처럼 큰 단체에 아픈 소리는 ‘요즘 뭐 하는지 잘 보이지 않아’라는 지적일 거예요. 사회의 ‘요구’는 달라졌는데, 하는 일이나 그 방식은 전과 같기 때문에 나오는 소리일 수 있어요. 주요 시민운동단체의 일반화된 사업 방식은 ‘공청회, 토론회, 입법청원, 현장시위’ 등인데, 이게 요즘 시민들이 움직이는 방식과 잘 맞지 않는 측면이 있다고 봐요.” ‘대형 단체의 부적응’을 문제 삼은 셈이다.

지율, 강의석, 오태양식 운동에 담긴 변화를 고민해야

그렇다면 ‘변화하는 사회’에 어떻게 적응, 조응할 것인가? 그러려면 먼저 ‘이해’가 필요하다. 그의 지적에 기대어 살피자면, ‘변화’를 이해할 수 있는 열쇠말은 개인, 지역, 인터넷, 연대 등이다.

 우선 ‘개인의 재발견’. 그는 “2000년대 들어 시민들이 자기 문제를 직접 제기하고 개입해 들어오는 흐름이 강화, 확대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지율 스님의 천성산 지키기, 강의석 씨의 종교의 자유 투쟁(2004년 서울 대광고 학생회장이던 강의석 씨는 학교가 모든 학생들에게 강제로 예배를 보게 하는 것을 문제 삼아 단식투쟁을 벌였고, 이듬해 대광학원과 서울시교육감을 상대로 종교의 자유를 침해했다는 이유로 소송을 내기도 했다. 서울중앙지법은 2007년 손해배상은 기각했으나 종교의 자유 침해 부분은 인정하는 판결을 내렸다), 오태양 씨의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등이 대표적이다.

둘째, 지역에 기반을 둔 풀뿌리운동의 부상이다. “2000년대 들어 수많은 지역조직이 출현했어요. 그 가운데 절반 정도는 수도권의 작은 지역조직이죠. 미군기지 평택 이전 반대 운동에 참여한 단체를 보면, 이름도 모르던 인권 평화단체들이 적지 않아요.”

셋째, 인터넷이다. “인터넷의 발달과 대중적 보급으로 정보 소통과 여론화 경로가 많이 달라졌어요. 2002년 노사모, 2003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반대 운동 등엔 인터넷 카페와 블로그를 매개로 한 운동이 큰 구실을 했죠. 지금은 웹2.0, 핸드폰, 유시시 등이 큰 몫을 하고 있죠.”

‘개인’과 ‘지역’이 인터넷을 매개로 ‘연대’를 강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빚어지는 새로운 운동은 다채롭다. 자전거로 출퇴근하는 사람들, 대안생리대운동을 하는 피자매연대, 1천명 이상의 회원이 가꿔가는 ‘번역으로 세상 바꾸기’ 따위의 온라인에 기반을 둔 운동은 2000년 이전에는 보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운동은 풍성해지고 있다

하지만 하승창은 개인과 단체, 중앙집중형운동과 풀뿌리지역주민운동이 대척 관계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회운동이 기존 체제와 싸우는 사이, 그 성취에 기반을 두고 새로 형성된 공간에서 시민들이 자기 문제를 제기하며 개입해 들어오는 흐름이 확대되고 있는 것으로 봐야죠.”
운동의 주체와 방식, 유통경로가 풍성해지고 있는 것이라는 지적이다.

그는 사회운동이 ‘경계’를 없애고, ‘일상’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데 힘을 써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진보세력을 하나의 색깔로 통합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에요. 적절하지도 않고요. 다만 어떻게 네트워크를 형성할 것인가는 고민해야 하죠.”

사회운동, 경계 없애고 일상에 더 관심 기울여야

그가 속한 함께하는 시민행동과 여성민우회, 녹색교통운동, 환경정의시민연대 등 4개 단체가 지역운동이 활발한 서울 마포 성미산으로 사무실을 이전하기로 한 것도 이런 문제인식이 안받침된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 4개 단체는 땅을 사들여 새로 짓고 있는 건물이 완공되면, 올 8월 입주할 예정이다. 건물 지하층에 소극장을 만들어 지역민에게 내주기로 했다. 그는 “그 소극장이 지역민들의 문화운동의 거점 노릇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4개 단체는 각자의 자료를 한데 모아 자료실을 공유하기로 했고, 거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가 자료실을 지역민에게 개방하기로 했다.

 “아직 확정된 것은 아니지만, 1층엔 공정무역 카페를 두고 이주노동자가 근무할 수 있게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단체가 사업단위를 따로 만들지 않더라도 그 카페에서 자연스레 소수자운동이 이뤄지지 않겠어요? 단체나 모임 안에 마이너리티(소수자)가 있으면 다른 이들이 긴장하게 될 것이고 조직문화도 달라질 거예요. 운동방식도 달라지겠죠. 미국에 갔을 때 단체들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는데 ‘우리 단체엔 마이너리티 비율이 얼마다’는 식의 자랑을 늘어놓는 일이 적지 않더라고요.”

하승창은 1961년 생명을 얻었다. 서울에 살며 마포고를 거쳐 1981년 연세대 사회학과에 들어갔다. 사회학은 공부하지 않고 학생운동을 했다. 대학 3학년 때 감옥에 갔다. 인천 부천 지역에서 노동운동을 했다. 그러다가 1990년 다시 감옥에 들어갔다. 실존사회주의권이 무너져 내리던 격변의 시기를 감옥이라는 ‘학교’에서 보낸 뒤, 노동운동에서 시민운동으로 방향을 틀었다. 1992년부터 1999년 1월까지 경실련에서 일했다. 1999년 가을 함께하는 시민행동을 만들어 새로운 운동 방식과 영역을 개척해나갔다. 예산낭비성 사업을 추진한 기관에 구멍 뚫린 항아리를 전달했던 ‘밑 빠진 독상’은 시민행동식 운동의 한 상징이 됐다. 2006년 2월까지 사무처장으로 일했다. 2005년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비상근 운영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2007년 8월까지 꼬박 1년 동안 미국 뉴욕 컬럼비아대학에 적을 두고 “놀았다”(이건 하승창의 표현이다). 이명박 대통령 취임식 하루 뒤인 2008년 2월26일 연대회의 8차 정기총회에서 상근 운영위원장으로 선출됐다.

2002년엔 세계경제포럼(다보스포럼)이 아시아 차세대 리더를 발표했는데, 그에 포함된 한국인 12명 가운데 그의 이름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수상을 거부했고 행사장에 가지도 않았다.  

“세상사에 대한 주체할 수 없는 관심”이 그를 운동하게 하는 힘이다. 그래서 “운동을 하지 않으면 인생이 별로 재미없을 거 같다”고 한다. 가끔 노래방에 가면, 이문세의 <광화문 연가>를 즐겨 부른단다. “…향긋한 오월의 꽃향기가/가슴깊이 그리워지면/눈 내린 광화문 네거리/이 곳에 이렇게 다시 찾아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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