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20년 09월 2020-08-28   1111

[만남] 참여연대에서 치유의 길을 걸었죠 – 한상희 회원

“참여연대에서 치유의 길을 걸었죠”

한상희 회원

참여사회 202009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한상희 회원의 이력이 나와 매우 비슷해서 놀랐다. 그녀는 비폭력대화와 여성주의 상담, 타로, 그림, 글쓰기 등 치유에 관련된 다양한 도구들을 공부했다. 내게도 치유가 갈급했던 때가 있었기에, 어째서 그녀가 그 많은 것들을 공부해야 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녀가 참여연대와 인연을 맺게 된 것도 치유를 위한 노력 덕분이었다. 그녀는 2017년 아카데미느티나무의 ‘꿈투사워크숍’을 들으면서 후원을 시작했고, 이후 서울드로잉, 미술학교, 페미니즘 강의, ‘타로사이’ 독서모임 등 다양한 강의와 모임에 참여했다. 지난 7월에는 그간 그린 그림을 모아 첫 개인전을 열었고 그림 판매수익 전액을 청년 수강생을 위해 기부했다. 지난 3년 동안 참여연대와 그녀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지난 8월 12일, 서울 종로구 통인동 참여연대 카페통인에서 그녀의 내면의 성장기를 전해들을 수 있었다.

치유의 여정에서 참여연대를 만나다

“평소 내면의 치유에 관심이 많아 꾸준히 치유와 관련된 공부를 해왔어요. 그러다 우연히 아카데미느티나무에서 고혜경 선생님의 꿈투사 수업이 열린다는 걸 알게 됐죠. 당시 담당 간사였던 이송희 샘이 회원가입을 해야 (수강료) 할인이 된다고 설득하셔서 가입했어요(웃음). 이후에 서울드로잉 강좌를 듣고 페미니즘 강좌도 들으며 참여연대와의 인연을 이어오게 되었어요.”

수강료 할인 때문이라니, 순전히 ‘사심 가득’한 가입 동기다. 꿈투사워크숍의 경험은 어땠는지 물었다.

“제 내면을 살피는 데 도움이 많이 됐어요. 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내가 지금 무엇을 알아야 하는지, 또 내게 무엇이 필요한지 알 수 있거든요. 그래서 지금도 꿈 일기를 계속 쓰고 있어요.”

그녀는 다양한 공부를 했지만 그중에서도 비폭력대화NVC, Nonviolentcommunication는 10년 동안 꾸준히 공부해 강사로도 활동해왔다. 비폭력대화의 어떤 점이 그렇게 좋았을까.

“처음에는 엄마를 고급 기술로 한 번 이겨보려고 공부를 시작했는데요(웃음). 비폭력대화를 공부하면서 제 안에 있는 이슈들이 많이 해결되고 편해졌어요. 그래서 평생 공부하고 싶어요.”

물어본 김에 비폭력대화라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설명을 부탁했다.

“비폭력대화는 단순한 대화 기술이 아니라 내 안의 치유되지 않은 상처를 치유하고 연민을 키우는 작업이에요. 예전에는 ‘내가 화가 나는 건 저 사람 때문이야.’ 하고 생각했어요. 비폭력대화를 공부하고 나서는 저 사람은 나한테 자극을 줬을 뿐, 화가 나는 건 충족되지 못한 욕구 때문이라는 걸 알게 됐어요. 그래서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게 무엇인지 파악하고, 그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자신, 상대방 그리고 공동체에 부탁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죠”

그림 강좌 수강생에서 화가로 거듭나

한상희 회원은 여성 문제에도 관심이 많아 한국여성의전화에서 여성주의 상담을 배웠고, 3년 동안 자원 상담을 했다. 그러다 작년 미투 사건 이후 잠시 상담을 중단하고,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2016년에 제가 유럽 여행을 갔는데 저도 모르게 미술관만 계속 다니고 있더라고요. 그러다 프랑스 오르셰미술관에서 밀레의 <만종>을 보고 평생 잊지 못할 경험을 했어요. 익숙한 그림이라 그냥 지나치려고 하는데, 갑자기 제가 그림 앞에서 움직이지를 못하는 거예요. 몸은 얼어붙고 속울음이 마구 복받쳐 올라왔고요. 마치 제가 지구와 하나로 연결된 느낌이 들었어요. 그 느낌이 너무 강렬해서 꼼짝 못 하고 30분을 선 채로 울었어요. 간신히 몸을 움직여 밖으로 나왔죠. 신랑에게 얘기했더니 <만종>의 부부 사이에 놓인 바구니에는 원래 죽은 아이가 담겨있었다는 얘기가 있다고 하더군요. 그림이 안 팔릴까 봐 후에 감자 바구니로 바꾼 거고요. 그때 그림이 단순한 색채와 형태의 조합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됐어요. 작품에 담긴 작가의 감정과 감상하는 이 사이에 에너지의 교류가 강렬할 수 있다는 걸 알고 그 이후로 그림을 그려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첫 시작은 근처 마을 카페에서 하는 펜드로잉 수업이었다.

“처음 그려봤는데 제가 봐도 너무 잘하는 거예요. ‘아, 이거구나’ 싶었죠. 지금도 제 손에서 어떻게 이런 그림이 나오나 싶어 깜짝깜짝 놀라요(웃음). 그렇게 6개월을 배우고 나서 채색을 하고 싶어 서울드로잉 강좌에 오게 됐어요.”

아카데미느티나무 ‘서울드로잉’ 강좌는 그녀의 그림이 한 단계 도약하는 계기가 되었다.

“배민정 선생님께서 처음에 아무것도 안 가르쳐 주시고 그냥 한번 그려보라고 하시더라고요. 처음에는 황당한 거예요. ‘이렇게 큰 스케치북을 어떻게 채우지?’. 하지만 선생님은 절대 수강생에게 어떻게 하라고 가르치지 않으세요. 먼저 스스로 그려보게 한 다음 그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조언을 주세요. 그리고 칭찬을 폭풍처럼 쏟아주셔서 ‘난 못해’ 하는 생각을 깨고 나오게 도와주시죠. 그래서 이 수업을 듣고 나면 그 사람이 그리고 싶은, 그 사람만의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돼요.”

그녀는 아카데미느티나무에서 ‘서울드로잉’, ‘미술학교’ 강좌를 들으며 그림을 꾸준히 그려왔고, 그 노력이 얼마 전 결실을 맺었다. 7월 6일부터 18일까지, 그녀의 첫 개인전 <왼손으로 그리는 세상>이 카페통인에서 열린 것이다.

“주은경 아카데미느티나무 원장님이 그림 그린 지 10년 된 기념으로 개인전을 한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축하한다고 말씀드렸죠. 그랬더니 갑자기 원장님이 제게 ‘그럼 선생님도 전시해. 얼른 일정 잡아. 7월? 아니면 10월?’ 하시는 거예요. 제가 평소에 2천 원짜리 연습장을 늘 들고 다니면서 그림을 그리거든요. 그게 집에 10권 정도 있었어요. 선생님이 그걸 아시고 전시회를 해보라고 하신 거죠. 그래서 7월에 전시를 하게 됐어요.”

그녀는 가방에 들어있던 연습장을 펼쳐 그림을 보여주었다. 그림 속 사람과 사물들이 마치 살아서 움직일 것만 같다. 그녀의 선은 얼핏 보면 삐뚤빼뚤해 보이지만 독특한 느낌이 있다.

“제가 원래 오른손잡이인데 펜드로잉은 왼손으로 그려요. 오른손으로 그리면 잘 그리고 싶어서 꼼꼼하게, 하나도 안 놓치고 그리려고 하더라고요. 그러다 보면 제가 죽을 거 같은 거예요. 그런데 왼손으로 그리면 대담하게 확 그려버려요. 왼손은 그냥 그리기만 해도 기특하니까 선이 자유롭게 나오더라고요. 그래서 그림은 왼손으로 그려요.”

월간참여사회 2020년 9월호 (통권 278호)

연습장과 펜, 왼손만 있으면 어디서든 자유롭게 그림을 그릴 수 있다고 말하는 한상희 회원

전시작품 판매 수익은 전액 기부

전시작품 중에서 유난히 애착이 가는 그림이 있는지 물었다.

“<그림 그려 좋은 날>이요. 서울 종로구 창신동의 풍경을 그린 그림인데요. 이렇게 큰 그림을, 그것도 밖에서 그려보는 게 처음이라 막막하기만 했어요. 그래서 처음엔 가로로 성곽을 따라 선만 그렸어요. 그다음에는 집을 하나 그리고, 세 번째 수업에서는 제대로 스케치를 하고 색도 쓸 수 있었죠. 그렇게 3년 동안 조금씩 틈틈이 그려나갔어요. 근처 화단에 뿌린 꽃들이 피고 지는 것을 지켜보면서 정성 들여 그린 그림이라 더 애착이 가네요.”

그녀의 설명이 더해지니 성곽길의 집과 건물 하나하나가 살아나 눈앞으로 훅 다가오는 듯했다.

“(그림을 가리키며) 여긴 한국여성의전화 사무실이에요. 이 문밖이 상담실이고요. 전화상담을 마치고 난 다음, 활동가들이 있는 사무실을 바라보면서 그린 거예요. 제가 여성의전화 활동가들을 정말 애정하거든요. 애정하는 친구들 힘내라고 맥주도 하나 그렸고요. 그날 제가 퀴어 퍼레이드를 다녀온 터라 무지개색도 한 번 써봤어요.”

전시 작품 판매수익은 전액 아카데미느티나무 청년 수강생을 위해 기부하기로 했다. 첫 전시인데도 반응이 뜨거워서, 총 31명이 3,709,000원을 후원하는 성과를 거뒀다. “제가 실은 사람을 많이 가리는데요. 김승환 간사(아카데미느티나무 담당 간사)와는 꿈투사 작업이나 타로를 하면서 친해졌고 개인적으로도 많은 도움을 받았어요. 그러다 보니 승환 간사가 청년사업을 하고 싶어 한다는 걸 알게 됐어요. 도움받은 걸 갚고 싶던 차라 수익금을 기부하기로 한 거죠. 사실은 제 그림이 이렇게 많이 팔릴 줄 몰랐어요. 뒤풀이할 돈이라도 좀 남겨놨어야 하는데(웃음). 좋은 곳에 쓴다고 하니 전시회에 더 많이 와주신 거 같아요.”

수익금을 모두 기부했지만, 오히려 그녀는 감사함을 느꼈다고 한다.

“전시회는 저 혼자서는 못 하는 거더라고요. 그때 다리를 다치는 바람에 그림을 나르고, 포장을 풀어서 벽에 거는 작업까지 모두 친구들이 도와줬어요. 승환 간사는 웹자보를 만들어줬고, (시민참여팀) 이영미 간사님은 라벨링 작업을 도와주셨고, 소모임 ‘그림자’ 회장님인 열훈 샘은 액자에 대한 조언을 해주시고, 배민정 선생님은 격려와 크리틱critique❶을 잊지 않으셨죠. 같이 수업을 들었던 미옥샘, 은정샘, 인호샘, 성관샘, 동훈샘, 연순샘, 호경샘, 순미샘, 나두리샘, 그리고 대학 동기들과 선배 등 많은 분들의 응원과 도움이 있었고요. 멀리서 찾아와 주시고 그림을 사주신 분들께도 정말 감사하더라고요. ‘내가 앞으로 더 잘 살아야겠구나’ 싶었어요.”

월간참여사회 2020년 9월호 (통권 278호)

한상희 <그림 그려 좋은날, 창신동> 

안전한 공간에서 퀴어를 이야기하기

오는 9월, 그녀는 아카데미느티나무에서 페미니즘/젠더 이슈와 관련된 책을 읽고 이야기하는 ‘독서클럽 레인보우’를 진행한다. 올해만 해도 숙명여대 입학 포기 사건, 트랜스젠더 하사의 강제 전역, 공직자 성추행 사건 등 페미니즘/젠더와 관련한 굵직한 사건들이 많았다. 다소 무거울 수 있는 주제인데 어떻게 모임을 진행할 생각인지 물었다.

“각자 답답한 부분을 나누고 함께 해결책을 찾아보고 싶어요. 또 제가 퀴어Queer, 성소수자 쪽에 관심이 있어서 퀴어의 존재를 가시화시키는 활동도 하고 싶고요. 페미니즘과 젠더 이슈에 관심 있는 분들이 많이 오시면 좋겠어요.”

문득 그녀가 퀴어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궁금해졌다.

“페미니즘 강의에서 자연스럽게 퀴어 친구들을 만났어요. 친구들의 얘기를 들으며 ‘내가 세상을 잘 몰랐구나’ 싶었죠. 또 생물학적 여성이라는 이유로 여성으로 살아왔는데 내가 진짜 여성이 맞는지, 저의 정체성도 고민하게 되더라고요. 고민의 시간을 거쳐 제가 젠더퀴어Genderqueer❷라는 걸 알게 됐어요. 퀴어는 결국 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페미니즘 독서모임은 많아도 퀴어를 다루는 독서모임은 찾기 어렵다. 모임에 참여하는 것만으로도 커밍아웃의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참여연대는 안전한 공간이라는 믿음이 있기에 독서모임을 열 수 있었다. 꿈투사와 그림, 페미니즘, 그리고 퀴어까지. 그녀가 걸어온 길은 치열한 자기 탐색과 치유의 시간이었다.

“참여연대에서 경험한 모든 것들이 실은 제 치유의 여정이었던 것 같아요. 이제 제 꿈은 ‘일상의 치유자’가 되는 거예요. 어떤 말이나 기술 없이도 그냥 같이 밥 먹고 얘기하다 보면 치유가 되는, 그런 사람이고 싶어요.”

‘일상의 치유자’라니, 얼핏 듣기엔 쉽지 않은 꿈이지만 그녀라면 결국 해낼지도 모르겠다. 부디 그 꿈을 이뤄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한 줄기 빛이 되어주기를.

❶  미술 수업 등에서 과제나 작품에 대해 비평이나 의견을 주고받는 과정    

❷  남성과 여성 둘로만 분류하는 젠더 이분법과 지정받았거나 또는 생물학적 성의 젠더 규범을 따라야 한다는 시스젠더 규범성에 저항하는 젠더 정체성을 가리키는 개념


글. 금민지 시민객원기자

다큐멘터리, 상담, 명상, 자연 치유 등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기울이고 공부했다.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을 좋아해 주한독일문화원 온라인매거진에서 도서관 이용자들을 인터뷰하기도 했다. 몸과 마음이 건강하게 사는 길을 찾아 글이나 강의, 다른 어떤 형식으로든 사람들과 나누는 것이 꿈이다.

녹취. 조연우 자원활동가

사진. 미디어홍보팀 이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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