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4년 09월 2014-09-01   530

[경제] 암세포와 독재

암세포와 독재

정태인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 원장

국민을 위한 규제 완화라고?

가끔 내가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사실이 믿어지지 않아 어안이 벙벙한 일을 당할 때가 있다. 지난 11일이 그런 경우다. 박근혜 대통령은 수석비서관회의에서 “정치가 국민을 위해 있는 것이지, 정치인들이 잘 살라고 있는 게 아닌데, 지금 과연 정치가 국민을 위해 존재하고 있는 것인가 자문해봐야 할 때”라고 일갈했다. 국회에 계류 중인 각종 경제 활성화 법안들, 즉 규제완화에 관한 법안들을 빨리 처리하라고 촉구한 것이다.

사건은 그 다음에 발생했다. 박대통령은 “크루즈 한 척이 취항하게 되면, 900명을 신규 채용할 수 있고 연간 900억 원의 부가가치 창출이 가능한 법”을 예로 들었다. 아뿔싸, 세월호가 바로 크루즈다. 저가 항공의 등장으로 위기를 맞은 크루즈 산업을 살리기 위해 선령船齡을 늘려줘서 일본에서 18년간 운행을 마치고 은퇴하는 배를 사들이고, 나아가서 아이들이 그 배를 타고 수학여행을 하도록 권유한 결과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것이 아닌가? 참사의 원인을 밝히지 못했고, 당연히 사고 재발을 막을만한 안전대책도 세우지 못 했음에도 또 크루즈산업의 규제완화를 뻔뻔하게 외친 것이다.

하지만 이건 서막에 불과했다. 그 다음 날, 최경환 부총리는 대통령 주재 회의에서 “유망서비스산업 중심의 투자활성화 대책”을 발표했다. 무려 101쪽에 이르는 보도 자료에는 보건·의료, 관광, 콘텐츠, 교육, 금융, 물류, 소프트웨어 등 ‘유망 서비스산업’의 규제완화가 망라됐다. 언제나처럼 이번 대책으로 약 15조 원의 투자효과와 18만 개의 일자리가 만들어질 거라는 환상의 수치도 덧붙었다. 하지만 그 내용을 보면 카지노 복합리조트 건설이 8조 7,000억 원이고 국제테마파크까지 합치면 11조 2,000억 원이다. 즉, 투자의 대부분이 건설인데, 정부는 이 중 70% 이상이 외국인 투자라고 자랑했다. 과연 이런 투자가 국민의 행복과 주민 소득에 얼마나 기여할까? 이미 8개의 카지노와 수많은 호텔, 골프장이 들어선 제주도는 얼마나 잘 살게 되었을까?

참여사회 2014년 9월호 (통권 214호)

국민 건강 포기한 ‘의료 규제완화’

더 큰 문제는 보건·의료 분야인데, “자법인 설립을 위한 개별 프로젝트별 애로 사항을 맞춤형으로 해소함으로써 4개 자법인 설립을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이번 정부가 새롭게 들고 나온 ‘자회사 설립에 의한 의료 영리화’가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이다. 정부는 친절하게도 “메디텔meditel, 의료호텔 등록 시 모법인의 외국인 환자 유치실적 인정, 메디텔과 의료기관 간 시설분리 기준 완화”를 예로 들었다. 

한마디로 호텔과 병원이 한 몸이 된 기이한 회사를 만들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나아가서 그 호텔의 영업을 위해 성형외과 의원에게 건물을 임대할 수 있도록 해 주겠다는 것이다. ‘학교 옆 관광호텔’에 이어 ‘병원 겸 관광호텔’이 등장한 것이다.

이 정책은 의료법인의 숙원을 들어준 것인데 정부는 앞으로도 이렇게 ‘맞춤형’ 정책을 펼치겠다고 밝혔다. 해서 정책의 두 축이 ‘성과 구체화 프로젝트’와 ‘제도개선 및 기반 조성’으로 되어 있다. 하나하나의 소원을 수리해서 투자 실적을 올리는 동시에 걸림돌이 되는 규제를 풀어서 ‘제도개선’도 하겠다는 것이다. 의료법인에게 이런 혜택을 주었으니 이제 모든 의료법인이 줄줄이 기발한 수익 모델을 들고 올 것이다.

이러한 부대사업에 들어가는 돈은 물론 건강보험에서 지급하지 않는다. 건강보험 보장성은 점점 떨어질 것이고 급기야 의료계는 병원 당연지정제나 건강보험 강제가입을 문제 삼을 것이다. 이렇듯 정부가 ‘맞춤형’이라고 자랑하는 것은 바로 ‘정부의 포획’이고 민주주의의 파괴다.

교황이 “규제 없는 자본주의는 새로운 독재”라고 일갈한 것은 바로 이런 의미일 테다. ‘규제는 없애야 할 암덩어리’라고 규정한 대통령과 ‘규제 없는 자본주의는 독재’라는 교황, 어느 쪽이 맞는 걸까? 둘은 양립할 수 없으니 둘 중 하나는 분명히 틀렸다.

정태인

한미FTA 등 통상정책과 동아시아 공동체를 오랫동안 연구해온 경제학자. 요즘은 행동경제학과 진화심리학 등 인간이 협동할 조건과 협동을 촉진하는 정책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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