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6년 08월 2016-08-01   861

[듣자] <스파르타쿠스>,  자유와 존엄을 꿈꾸다

 

< 스파르타쿠스>, 
자유와 존엄을 꿈꾸다

 

 

글. 이채훈 MBC 해직PD

MBC에서 <이제는 말할 수 있다>와 클래식 음악 다큐멘터리를 연출했다. 2012년 해직된 뒤 ‘진실의 힘 음악 여행’ 등 음악 강연으로 이 시대 마음 아픈 사람들을 위로하고 있다. 저서 『내가 사랑하는 모차르트』, 『우리들의 현대 침묵사』(공저) 등.

 

 

고대 로마에서 노예는 ‘말할 줄 아는 도구’였다. 배운 자들은 노예를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없는 자”로 정의했다. 노예 다섯 명이 말 한 마리 가격에 매매됐다니, ‘개돼지’ 비슷한 수준이었나 보다. 지금 우리가 사는 이곳은? 몰지각한 공직자의 ‘개돼지’론을 떠올리지는 말자. 모든 관계가 ‘갑’과 ‘을’로 규정되고 약육강식이 당연시되는 이 나라는 이미 완강히 신분제가 고착된 사회 아닐까?

 

내가 몸담았던 방송계도 마찬가지다. 외주 PD들은 거대 방송사의 노예와 다름없다. 생존을 위해 시청률 경쟁으로 내몰리니 방송은 방향을 잃기 일쑤다. 방송이 잘되면 거대 방송사가 생색을 내고, 잘 안 되면 외주사가 책임을 뒤집어쓴다. MBC에서 외주관리를 잠시 할 때 외주 PD들에게 “너희들은 노예가 아니라 당당한 PD임을 잊지 말라”고 여러 차례 말했지만, 현실에 도움이 되지 않는 공허한 덕담이었다. 노예 되기를 거부하고 존엄한 인간임을 선언한 고대 로마의 스파르타쿠스 얘기를 해 볼까. 

 

“바로 얼마 전, 이 사람은 노예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스파르타쿠스라는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지금 그는 5만 명에 이르는 군대를 지휘하고 있다. 그 군대는 역사상 최강의 군대다. 쉽게 말해서, 자유를 위해 싸우는 군대다. 지금까지 수도 없이 많은 군대가 있었다. 그 군대들은 국가, 도시, 전리품, 권력, 특정 지역에 대한 통제권을 놓고 싸웠다. 그러나 여기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을 위해 싸우는 군대가 있다.” 

 

1950년, 미국의 인권활동가 하워드 패스트는 소설 『스파르타쿠스』에 이렇게 썼다. 스파르타쿠스(BC 109 ~ BC 71)는 BC 73년, 70여 명의 검투사들과 함께 카푸아의 검투사 양성소를 탈출, 로마의 노예와 광부를 규합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로마 정부가 보낸 진압군을 두 차례나 격파하고 남부 이탈리아를 점령하여 로마 지배층을 공포에 떨게 했다. 로마군에게서 노획한 무기로 강력해진 그의 군대는 최대 12만 명에 이르기도 했다. 하지만 BC 71년 원로원이 파견한 크라수스의 대군에게 패배하여 죽음을 맞았다. 이때 십자가에 매달려 처형된 병사가 6,472명이라니, 어마어마한 사건이었다. 

 

1954년 소련의 아람 하차투리안(1903~1978)이 음악을 만들고 1968년 유리 그리고로비치가 안무를 다듬어서 발레 <스파르타쿠스>가 완성됐다. 이 발레는 웅장한 남성 군무가 장관이다. 막이 오르면 크라수스 군대의 도도한 춤이 펼쳐지고, 노예들이 등장하여 고통스런 몸짓을 보여준다. 크라수스와 에기나의 방탕한 연회에 이어 검투사 대결 장면이 펼쳐진다. 로마 지배층은 노예끼리 결투를 시키고, 이를 즐겼다. 노예들은 자기가 살려면 동료를 죽여야 했다. 이기면 당장은 살아남지만 언젠가는 모두 죽을 운명이다. 발레에서, 동료를 찔러 죽인 스파르타쿠스는 더 이상 노예이기를 거부하고 반란을 결심한다. 스파르타쿠스의 고통스러운 독무가 펼쳐지고, 쇠사슬을 끊고 떨쳐 일어나는 노예들의 군무가 이어진다.

 

발레 <스파르타쿠스>  (2008 볼쇼이 공연, 파리 가르니에 궁전) 이 발레를 감상하고 싶다면?
유투브에서 Spartacus Bolshoi 2008을 검색하세요.
https://youtu.be/l7_PXqcJPmg

 

 

참여사회 2016년 8월호(통권 237호)

‘인민예술가’ 하차투리안이 작곡한 볼쇼이 발레의 <스파르타쿠스>

발레에서 스파르타쿠스의 무장봉기는 성공하는 듯 보인다. 크라수스와의 첫 대결에서 그를 생포한 것. 그러나 스파르타쿠스는 크라수스를 용서하고 풀어준다. 자존심이 상한 크라수스는 복수를 꿈꾼다. 그의 아내 에기나가 간계를 꾸민다. 여자들을 이끌고 스파르타쿠스 진영에 잠입, 반란군들에게 술을 먹이는 것이다. 모두 환락에 취해 넋을 놓은 틈을 타서 진압군이 반란군 캠프를 급습한다. 반란군은 무자비하게 살육되고, 스파르타쿠스는 수십 개의 창에 찔려 숨을 거둔다.

 

참여사회 2016년 8월호(통권 237호)

애도의 합창이 울려 퍼지면 프리기아가 비탄에 잠겨 춤을 춘다. 프리기아의 처절한 슬픔의 몸짓, 눈물을 억제할 수 없는 비극적 결말이다. 죽은 스파르타쿠스의 가슴에서 프리기아가 꽃처럼 피어난다. 현실에서는 패배했지만 스파르타쿠스의 꿈과 이상은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여전히 살아 있다고 말하는 것 같다. 프리기아의 스파르타쿠스가 생전에 사용했던 방패를 그의 가슴에 얹어 준다. 노예를 거부하고 인간임을 선언했던 그의 정신에 바치는 고귀한 찬사다. 

 

참여사회 2016년 8월호(통권 237호)

 

스파르타쿠스는 시대를 너머 모든 억압받는 사람들의 가슴에 불꽃을 일으켰다. 칼 리프크네히트, 로자 룩셈부르크 등 20세기 독일의 혁명가들은 스파르타쿠스단을 통해 새 세상을 꿈꾸기도 했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도 그리 평등하지는 않다. 그렇다면 스파르타쿠스의 이름은 앞으로도 이 비극적인 발레 속에 살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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