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7년 03월 2017-03-02   1020

[여성] 어떤 페미니스트 대통령

 

 

어떤 페미니스트 대통령

 

 

글. 손희정 문화평론가
<여/성이론>, <문화/과학> 편집위원. 땡땡책협동조합 조합원이고, 대중문화를 연구하는 페미니스트다.

 

 

“저는 여성이고 동성애자인데, 제 인권을 반으로 자를 수 있습니까?”
지난 2월 16일. 문재인 전 대표가 성평등 정책을 발표하고 스스로를 ‘페미니스트 대통령’으로 선언하는 자리에서 한 여성이 외쳤다. 바로 이틀 전, 그가 한국기독교총연맹을 비롯해 보수 개신교계가 모인 자리에서 “동성애를 지지하지 않는다, 국가인권위원회법으로 충분하므로 차별금지법을 제정하여 추가 논란을 불러일으킬 필요는 없다”고 말한 것에 항의하기 위해서였다. 여성이 소리를 치는 와중에 문재인은 “나중에 말씀드릴 기회를 드릴 게요.”라고 말했고, 이어서 청중들은 “나중에”를 연호하기 시작했다.

“동성애를 지지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정치인의 ‘페미니스트 대통령’ 선언. 우리는 이 간극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대통령이 되기 위해 소수자의 인권을 팔아넘긴 자의 페미니즘 운운. 우리는 그것을 신뢰할 수 있을까? 이는 신념이라기보다는 전략일 뿐 아닐까. 물론 어떤 사람들은 “동성애를 지지하지 않는다.”가 어떻게 ‘차별에 대한 찬성’으로 바로 연결되느냐고 반문한다. 그러나 차별금지법 제정을 둘러싼 투쟁에는 역사가 있고, 우리는 그의 발언을 그 맥락 안에서 볼 필요가 있다.

 

참여사회 2017년 3월호 (통권 243호)

포괄적으로 차별에 찬성하는 사회?
2003년부터 준비에 들어간 차별금지법은 2007년에 입법 예고된다. 이 법은 성별, 장애, 병력, 나이, 출신 국가, 출신민족, 인종, 피부색, 언어, 출신지역, 용모 등 신체조건, 혼인여부, 임신 또는 출산, 가족형태 및 가족상황, 종교, 사상 또는 정치적 의견, 범죄전력, 보호처분, 성적 지향, 학력, 사회적 신분 등을 이유로 차별받지 않을 것을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학력과 병력의 조건이 “자유로운 기업 활동을 방해”한다는 이유로 전경련의 반대에 봉착했고, 이어 보수 개신교가 “성소수자 차별을 금지하는 법안”으로 홍보하면서 대대적으로 반대 캠페인을 조직한다. 

개신교가 제정 반대 캠페인에 앞장서면서 전경련 등의 움직임은 비非가시화되고 이것이 ‘보수 개신교 vs 성소수자 인권운동’의 싸움처럼 보이게 되었지만, 기실 차별금지법 제정 반대는 소수자에 대한 차별을 바탕으로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는 이 사회의 ‘포괄적인 차별 찬성’이라고 할 수 있다. 문재인이 당사자들 앞에서 “동성애를 지지하지 않으며 차별 금지법 제정에 반대한다.”고 밝힌 것은 그 차별 캠페인에 대한 동의를 의미한다. 심지어 그가 대안으로 언급한 국가인권위원회법은 위원회의 설립과 운영에 대한 ‘조직법’이다. 이는 차별을 금지하고 평등권을 보장하는 역할을 할 수 없다. 

사실 우리는 “동성애를 지지하느냐 아니냐”라는 보수 개신교계의 질문이 만들어내는 교착의 프레임에 갇힐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왜 한국에서 대통령이 되려면 그렇게까지 보수 개신교의 눈치를 봐야 하는지 질문해야 한다. ‘대선 주자 잠룡’이었던 반기문이 출사표와 함께 처음으로 던진 메시지가 외교적 이슈나 정치 현안에 대한 것이 아니라 “나는 동성애를 지지하지 않는다.”였음을 기억해 보라. 문재인의 경우는 더욱 고민스럽다. 차별금지법 제정은 그가 계승하고 있다고 강조하는 ‘노무현 정권의 가치’이기도 하지 않은가.

 

서로의 정치가 만날 수 있는 전략
누군가에게는 난입이었고, 누군가에게는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었던 이 항변은, 그러나 누군가에게는 존재를 건 사투이자 정치 그 자체였다.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은 ‘나중에’라고 외칠 것이 아니라 경청했어야 했다. 19대 대선이라는 이 중요한 정치의 장에서 민주주의를 실천하고 실현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진지하게 고민했어야 한다. 작은 목소리들을 소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해야 할 이야기들이 가능한 많이 되도록 했어야 한다. 그랬다면, 문재인이 ‘정치공학’ 때문에 하지 못했던 말들을 넘어서는 논의장이 펼쳐질 수 있었을 터다. 그리고 우리는 이를 통해 대통령 후보로서 문재인의 역량과 가능성의 지평을 확대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기회를 놓친 것은 아쉬운 일이다.

우리는 지금 정치 아이돌을 추대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대의할 대표자를 뽑는 것이다. 가능성을 가진 정치인과 역동적으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뽑을만한 대통령 후보’를 만드는 것은 민주 시민의 권리이자 의무이기도 하다. 
문재인이 대통령이 되기 위한 ‘정치’를 하고 있다면, 성소수자들은 시민이 되기 위한 ‘정치’를 하고 있다. 두 목소리가 같이 들릴 수 있는 전략을 기어이 상상하고 만들어내는 것, 그것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정치공학’이어야 할 것이다. 문재인의 ‘페미니스트 선언’을 지지하며, 그 실질적인 내용을 앞으로 차근차근 채워나가시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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