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8년 08월 2008-07-28   775

2008평화학교: 우리는 국제 분쟁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2008 평화학교

우리는 국제 분쟁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소병건 한국체대 학생, 평화학교 참가자 ggud85@hanmail.net

“당신과 나의 만남은 한 사회와 다른 사회의 만남이다.” 이는 바로 홍세화 선생님의 저서인 『나는 빠리의 택시 운전사』에 나오는 글이다. 이처럼 난 참여연대 <평화학교>에서 그들을 만났다. 참여연대 평화군축센터가 지난해에 이어 개최한 <평화학교>의 올해 주제는 ‘지구 평화를 지켜라 – 국제 분쟁의 이해와 한국의 역할’이었는데, 지구상에서 벌어지는 분쟁과 전쟁을 이해하고, 이러한 분쟁에 국제 사회는 어떻게 개입하고 있는지 살펴보며 한국 정부와 시민 사회의 역할을 고민해보는 시간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대학생인 나는 지난 1학기에 ‘국제 분쟁의 이해’라는 과목을 공부했고, 그 수업에서 잊지 못할 영화를 보았다. ‘호텔 르완다’, 가슴이 아팠다. 그 가슴 아픔은 수많은 문제의식과 함께 나를 <평화학교>에 참가하게 했다. 우리는 많은 분쟁과 전쟁에서 다양한 인간상을 볼 수 있다. 양팔이 잘린 어린 여자 아이와 죽은 남편의 시신을 붙들고 슬피 우는 어머니와 아내, AK-47을 든 아프리카 소년병, 전쟁을 통해 이득을 챙기는 무기 상인들과 전쟁광이 되어버린 기득권자들, 그리고 이들을 도우려는 주위 세력들…. 그들이 태어난 사회와 환경은 다르지만 ‘전쟁을 겪는 사람들’이란 점에서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공통점 속에서 인간의 원초적 감정인 사랑, 욕망, 이기심, 증오, 분노 등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인간에 의해 생겨난 그 감정들을 인류가 보듬어 안아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리’와 ‘인류애’보다 나은 분쟁 특효약 있을까

그럼 인류는 그들을 어떻게 안아줘야 할까? 이런 세 가지 희망을 품어본다.

첫째, 타 인종, 타 사회에 대해 이분법적 사고인 ‘너와 나’가 아닌 ‘우리’라는 개념으로 서로 포옹해야 한다. 나는 한국말 중에 ‘우리’라는 말을 자주 사용한다. 그 어휘 속에서 ‘사랑과 친밀감’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고향에 내려가면 부모님은 사랑스럽게 “우리 병건이 왔네”라고 말씀하신다. 친한 고향 친구들도 ‘우리 병건이’라고 말하며 웃고, 나도 웃는다. 하지만 부모가 낳은 자식과 친구 이름 앞에만 ‘우리’라는 말을 붙일 이유는 없다. 부모나 친구가 없다고 ‘우리’라는 말이 쓸모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소외된 사람에게도 ‘우리’, 분열된 국민 사이에서도 ‘우리’, 적대국에도 ‘우리’, 전 세계 사람에게 ‘우리’라는 말을 사용하면 안 되는가? 인종, 이념, 이기심 등으로 분열된 사회와 국가를 ‘우리’라는 철학으로 포옹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둘째, 시민이 먼저 인류애를 실현하길 바란다. 강대국들의 정치적 수단인 전쟁 대신 우리 모두에게 평화권이 구현되길 바라지만, 그러자면 우리들의 성찰이 필요하다. 보편적 인권이라고 알려진 시민 정치적 권리나, 사회 문화적 권리에 비해 뒤늦게 알려진 평화권을 깊이 인식하고 확산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대인지뢰 사용의 전면 금지를 요구하는 것도 평화권에 대한 정당한 요구이다. 이를 통해 모든 전쟁의 폐지에까지 다다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사이클론 피해 지역에 대한 물자 지원, 어른들의 전쟁에 희생된 소년병들에 대한 교육 등 인도적 차원의 지원을 지속해야 한다. 한국의 ‘유엔평화유지군(PKO) 신속파견법’을 둘러싼 논쟁처럼 국제 분쟁에 군사적으로 개입하는 문제에 대한 의견이 분분한데, 대규모 군대 파견으로 경제적 이익을 누리려는 나라들과 달리 한국은 군(軍)의 파견에만 초점을 두지 말고, 부작용이 한층 적은 민간인 중심의 PKO 활동을 강화하는 것이 바람직해보인다. 

마지막으로 분쟁 지역에서 제대로 조정자 역할을 할 수 있는 세계 정부가 필요해보인다. 중립을 표방하고 있지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유엔의 현실은 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지금까지 안보리 상임 이사국으로 대표되는 강대국 중심의 질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25만 명의 전쟁 희생자를 낳은 보스니아 내전을 영화로 만든 ‘NO MANS LAND’는 유엔의 중립적 태도 혹은 무기력한 PKO 활동을 그대로 보여준다. 이 영화는 “살인 앞에 중립이란 없다. 방관하는 것은 이미 편을 든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처럼 분쟁 지역에서 이해 당사자로부터 중립을 지키되 갈등을 제대로 중재하는 적극적인 역할이 요구된다.

그러려면 세계 정부가 강대국의 요구나 의사에 치우치지 않아야 한다. 유엔은 명백히 국제법을 위반한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막지 못했다. 오히려 유엔은 국제 경찰이라고 자부하는 미국이 자국의 이익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기도 한다. 그리고 미국은 팔레스타인에 대한 이스라엘의 점령과 불법 행위의 중단을 요구하는 유엔 결의안에 대해 32차례나 거부권을 행사하기도 하였다. 또한 유엔 사무총장 선출도 강대국의 정치적 이해에 따라 움직이며, 평화유지군 파병도 그러하다. 이처럼 현재 유엔에서는 미국의 일방주의를 막을 제도적 장치가 없어 보인다. 따라서 유엔은 강력한 구조적, 제도적 개혁을 통해 강대국의 일방주의를 견제할 수 있는 기관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분단 속 평화 가꾸며 국제사회 진정한 조력자로

한국도 유엔 사무총장을 배출한 국가로서 공적개발원조(ODA) 확대 등을 통해 국제사회에서 조력자의 역할로 변모하려는 듯하다. 그러나 대외적 이미지에만 신경 쓸 뿐 국제 분쟁을 이해하고 접근하기 위한 기본 원칙이나 진정성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과거 조그마한 울타리였던 ‘우리’를 인류라는 더 큰 울타리로 옮겼다는 데 의미가 있지만, 그 내용을 채우는 것이 시급해보인다. 분쟁 해결에 실질적으로 기여하고 국제 평화를 확산하는 역할을 하기에는 한국 정부도, 시민사회도 갈 길이 멀다. 한편으로 우리가 사는 이 곳의 ‘분단’도 국제 분쟁의 한 단면인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 같다. 분단 정부 수립 60년이 되는 올해 점점 잊혀져가는 ‘분단’이라는 우리들의 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분쟁을 평화롭게 마무리 짓는 것은 우리들의 몫이기 때문이다.

평화학교

참가자 후기 목록, 참여연대 평화군축센터 블로그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blog.peoplepower21.org/peace)

①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전쟁, 왜 일어나나
② 인권과 평화의 관점으로 국제분쟁을 바라보자
③ 수혜자 중심의 인도적 지원이 필요하다
④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의 진실을 말하다
⑤ 국제분쟁과 유엔의 역할 그리고 PKO
⑥ 분쟁개입에 대한 국제사회의 이중 잣대와 우리의 무관심을 돌아본다
⑦ 국제분쟁에 대한 국제법 대응과 한국의 역할
⑧ [찬반토론] PKO신속파견법 필요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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