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8년 09월 2008-08-06   466

<100분 토론>을 생중계하는 ‘다음 아고라’

<참여사회> 8월호 특집_촛불 이전과 이후

<100분 토론>을 생중계하는 ‘다음 아고라’

 
                        21세기형 광장정치의 시작

                                      
                                      황규만
진보네트워크센터 활동가 hwangkm@jinbo.net

미디어의 모든 영역을 포괄하는 인터넷

지난 6월 22일 MBC <100분토론>을 통해 또 한 명의 인터넷 열사가 탄생하였다. 변희재는 <100분토론>이 ‘다음 아고라’ 사이트를 홍보하고 있다며 문제를 제기하였다. 방송사가 시청자 의견을 수렴하기 위해 오랫동안 포털 사이트와 계약을 맺어온 것을 감안한다면 다소 뜬금없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더 웃긴 건 7월 13일 방송통신심의위원회가 MBC <100분토론>에 대하여 ‘간접광고’ 규정을 들먹이며 ‘권고’조치를 내린 사실이다. 어찌보면 매우 웃긴 농담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본의 아니게 이러한 일들은 오늘날 인터넷의 중요한 소통방식의 핵심을 지적했다고 생각된다.

MBC <100분토론>의 평균 시청률은 대략 2.6%에 불과하다. 한 번 전파되고 나면 순식간에 사라지는 지상파에서 시청률 3%도 안 되는 100분 토론에 나와 실컷 떠들어봐야, 실상 이해당사자를 제외하고는 큰 반향이 일어날 수가 없다. 한나라당에서 그토록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MBC ‘PD수첩’의 경우에도 많아봐야 평균시청률 5%에 불과하다. 드라마나 예능프로로 따지면 쪽박 시청률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단축 종영되기 십상이다. 그러나 두 프로가 사회에 끼치는 영향력은 매우 막강하다. 바로 인터넷 때문이다. 시공간으로 순식간에 흩어진 전파는 인터넷에 고스란히 저장되어 있다. 단순히 저장된 것이 아니라 자발적인 누리꾼들의 추적보도를 통해 더욱 풍부해진 내용으로 즉각적이면서도 지속적으로 또 전세계로 퍼지고 퍼져나간다. 오늘날 대중이 미디어를 소비하고, 또 미디어와 살아가는 방식이다.

그 반대 상황도 벌어진다. 1인 미디어가 발달한 오늘날 탐사보도는 이제 더 이상 언론사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기밀문서가 아니라면 이제 누구나 모든 정보를 실시간으로 검색하고 분석할 수 있다. 통신기술의 발전과 인터넷 시장의 발전으로 지상파가 아니어도 누구나 실시간 생중계를 할 수 있다. 촛불시위가 벌어지는 저녁이면 어김없이 인터넷으로 생중계를 보고, 시위상황이 실시간으로 인터넷에서 분석된다. 부상자에 대한 정보 확인과 도움요청이 실시간으로 이루어지며 생중계 창을 통해 다시 반영된다. 또한 인터넷 언론과 방송사의 현재 보도상황을 추적하고 언론사에 반영된 자신들의 모습을 실시간으로 느낀다.

대중들은 주류의 시각과 왜곡된 대의제의 시선으로 앞뒤 다 잘려나간 20초 내외의 보도단신이나 폭력성만 부각되는 화석화된 기사가 아니라, 현장에서의 가두로 진출할지를 토론하고 명박산성을 넘을 것인가에 대한 토론과정이 고스란히 담긴 날것을 느끼고 싶어하고 그것을 통해 스스로 삶의 생생함을 증명한다. 그리고 언론의 반응을 평가하고 저항한다. 그리하여 인터넷은 탐사보도에서부터 매체비평에 이르기까지 모든 미디어의 영역을 스스로의 공간으로 끌어내렸다.

오늘날 방송과 언론사 그리고 포털 중심의 인터넷은 소통 구조적 측면에서 매우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대중과의 직접적인 토론과 소통이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었기 때문이다. 과거처럼 알아서 잘 보여주면 되던 시대는, 그래서 그것만 손에 꽉 틀어쥐고 있으면 되던 시대는 박물관으로 자리를 옮긴 지 오래이다.

상호 소통·투쟁하며 진화하는 방송과 언론, 인터넷

방송과 언론은 18세기부터 부르주아지들의 대의제적 도구였다. 18세기부터 본격적으로 형성된 근대적인 의미에서의 공론장은 매스미디어의 발전과정과 궤를 같이 하며, 당시 부르주아들은 계몽적인 매스미디어를 통해 스스로를 공중의 담지자로 격상시키며 오늘날 대의제적 질서를 완성시켜내었다. 공정과 공익의 대변자를 자처하는 대의제는 실상은 지배계급의 지배질서를 절차적으로 완성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였다. 특정 방송이나 언론사에서 특종을 보도하면 다른 언론에서 그것을 받아주면서 미디어의 어젠다가 설정된다. 그들만의 리그에 일방향적이고 계몽적인 방식으로 그들은 스스로에게 대중을 계도하는 지위를 부여한다. 그러하기에 그들 스스로 힘으로는 어떠한 변화도 모색할 수 없다. 이 대의제적 질서가 대중의 이익을 배반한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대의제적 어젠다 밖으로 한 발 자국도 나오지 않았었다. 군사독재시절 동아투위사태가 대변하듯이, 지난 시절 조중동 등의 주요 일간지와 KBS, MBC 등 주요 지상파방송국이 그러하였다.

2002년 효순·미선이 미군장갑차에 의해 사망한 사건 당시, 여중생들은 자신의 친구들이 미군에 의해 억울하게 죽었는데도 그 책임을 물을 수 없었던 제도에 항의하였다. 대중들은 인터넷 카페에 관련 사진과 내용을 공유하면서 광화문에 촛불을 밝히며 광장으로 뛰쳐나왔다. 그리고 자신들의 목소리를 제대로 대변해주지 않는 주류 미디어에 대항하여 <오마이뉴스> 같은 인터넷 언론에 직접 참여하여 미군처벌과 주둔군지위협정(SOFA) 개정을 요구하였다. 인터넷이라는 광장을 통해 대중은 스스로 어젠다를 설정하고 노무현정권을 탄생시켰다. 주류 미디어는 충격을 받았고, 이제 세상은 그들만의 리그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 빠르게 인식하였다.

광장정치의 복원, 방송과 언론의 어젠다 설정 역량과 인터넷이라는 광장이 상호 소통하고 때로는 투쟁하면서 오늘날 미디어는 진화해온 것이다. 2000년 낙선운동이 과연 오로지 참여연대의 의제설정역량 때문이었나? 모든 미디어가 황우석에 열광하고 있을 때, 과연 <PD수첩> 스스로의 힘만으로 황우석사단을 상대할 수 있었을까? 그렇지 않았다. 쇠고기협상실패에 대한 문제제기가 과연 <PD수첩>의 힘인가? 그렇지 않다. 광장의 힘이었던 것이다.

그런 면에서 자사의 홈페이지가 아닌 대중의 공간, 광장인 포털과 네트워크를 구축한 <100분토론>과 ‘다음 아고라’는 매우 감각 있는 포맷이었던 것이다. 오늘날 미디어는 더 이상 대의제적 질서 한계 내에 머물러 있지 않으며, 직접민주주의의 다양한 싹틔우기를 실험하고 있다. 방송은 인터넷과 실시간으로 소통하고, 한겨레와 같은 기존언론사나 참세상 같은 인터넷 언론들이 앞 다투어 생중계 서비스를 한다.

하이퍼텍스트와 집단지성의 확장과 부유의 공간

‘다음 아고라’. 아고라란 이름의 서비스는 나름 신선하고 도발적인 사업기획이었다. 고대 그리스 아테네의 독특한 정치구조의 산물인 광장, 아고라 정치는 이런 시장과 공공의 정치가 어우러진 열린 광장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정치권력이 다원화되었던 고대정치 구조의 불안정성 속에서 당시 광장에서의 쟁론과 충돌은 가장 중요한 정치행위였다. 비록 도시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던 일부에게 한정된 공간이었지만, 시민권을 가지고 있던 대중과의 직접적인 커뮤니케이션과 직접적 지지는 권력투쟁의 주요 수단이었다.

정치행위를 상징하는 아고라란 이름을 고대에서 불러낼 수 있었던 것은 인터넷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End-to-End 원칙과 개방형 시스템이 초기 인터넷의 기술적 이념을 대변한다면,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네트워크’라는 원칙은 초창기 인터넷의 순수한 철학적 이념을 대변하고 있다. 쌍방향 네트워크를 누구나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은 누구나 커뮤니케이션의 주체로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인터넷의 가치는 개방, 자율, 혁신, 그로 인한 무한경쟁이라는 자유주의적 가치를 구현하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신체, 계급, 성별에 구애받지 않는 아래로부터의 혁명을 지향하는 것이기도 하다. 인터넷이 이렇듯 모순적으로 보이는 가치들을 가지게 된 것은 누구에게나 개방되어 있고, 그리하여 광장을 지향하는 기술적·철학적 이념 때문이었다. 인터넷은 광장 그 자체를 지향하고 있다.

대의제적 질서가 대중의 이익을 대변하지 못하고, 전면적으로 배반할 때 대중은 의회와 미디어를 박차고 광장으로 나선다. 대중은 대의제적 미디어 시스템을 소비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미디어 바깥 광장에서 직접 행동에 돌입하고 스스로 미디어를 생산하고자 한다. 직접 생중계를 하고, 미디어를 평가하고 조중동 불매운동을 하고 또 한편으로는 공영방송 수호운동에 직접 동참한다. 방송사를 포함한 기존의 언론사는 더 이상 선민집단이 아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인터넷과 광장이라는 역사적 경험 속에서 과거와는 다른 정치적 주체들이 탄생하기 시작한 점이다. 과거 좌,우라 불리었던 수구·민주세력이라는 이분법속에서 스스로를 세력화하지 못했던, 흔히 말하는 중도성향의 다수가 스스로를 정치세력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과거 중도성향의 시민들은 선거 시기 자신의 정치적 성향보다는 자신의 이익에 따라 좌,우 중 한 쪽을 선택하는 부동층의 역할에 머물러 왔지만, 2000년 이후 몇 번의 광장정치를 통해 사문화된 헌법 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를 화려하게 부활시켰다. 말 그대로 극단적인 공화주의자들로 다시 역사에 등장한 것이다. 그들은 과거 정치적 결사체처럼 세련된 논리나 조직이 아니라, 이죽거림과 빈정댐으로 무장한 문화적 전위들이다. 인터넷이라는 광장은 계몽적 미디어가 가지고 있었던 표준어와 계몽적 언어체계가 해체되고 날것의 언어와 행위가 지배되는 언어 전복의 공간이다. 권위에 순종적인 교육시스템 바깥에 하이퍼텍스트와 다중지성에 의해 끊임없이 확장되고 부유하는 지식이 생산되는 공간이다. 욕망 역시 날것이다. 어떻게 상대할래?

일방적 인터넷 규제는 헌법정신에 위배

철인정치를 주창했던 플라톤은 광장정치의 퇴출을 주장했다. 플라톤이 보기에 광장은 무분별한 유언비어와 선동술에 의한 대중기만이 빈번하며 마녀사냥이 자행되는 천한 공간이었던 것이다. 집단적 지성보다는 반성적 이성이 광장을 밀어낸 것이다. 일면 타당한 지적이다. 광장은 실제 그렇게 아름다운 곳이 아니다. 대중들의 민족주의적 욕망이나 성차별적인 성향들이 가감 없이 표출되고, 때로는 소수자와 약자에 대한 우리 내면의 짐승 같은 폭력과 마녀사냥이 가감 없이 드러나는 공간이기도 하다. 인정할 건 인정해야 한다.

광장에 대한 경기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공영방송과 인터넷이 서로 연결되는 것에 대하여 신경질적인 알레르기를 보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최근 촛불시위를 계기로 이명박 정부는 사이버모욕죄를 신설한다느니, 게시물 삭제요청이 있으면 무조건 응해야 한다느니, 정말 생각 없는 인터넷 통제 정책들을 내뱉고 있다. 그들이 진정 무서워하는 것은 광장의 천박함이 아니라 광장과 소통할 줄 모르는 내면의 두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더욱 정확하게 말하자면 현재 대의제가 대중들의 요구를 수렴할 수 없다는 자체 위기감의 발로이다. 오늘날의 대의제는 일국적인 수준에서 국민투표를 통해 정치구조가 결정되는, 여전히 민족국가적인 틀이다. 그러나 자본이 이미 세계화된 세상에서, 정부의 정책방향은 초국적 자본과 미국 패권주의적인 신자유주의 정책에 조응할 수밖에는, 모순으로 점철된 상황이다. 좌우를 막론하고, 지금 광장에서 요구하는 민중의 요구를 받아 안을 수 있는 정치세력이 현재 남한사회에서 있기는 한가? 정부는 체제의 위협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자본주의의 일상적 위기를 지금의 시스템으로 해결할 수 있을까? 경찰국가로 회귀하여 공익이 아닌 위기관리를 지상최대의 목표로 삼는 정치체제가 지금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면 진정으로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오히려 광장과 소통하지 않고서는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없다.

광장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공권력의 이름으로 인터넷이라는 광장을 규제하는 것은 한 사회의 문화와 정치구조에 대한 섬세한 철학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헌법정신에 부합하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무지몽매한 입으로, 무턱대고 확성기로 나불대고 방패로 찍어대고 물대포를 쏘아대는 일은 그러잖아도 분노에 지친 대중들을 학대하는 짓이다. 그렇게 하면 광장에서 물러나 입 닥치고 집에 돌아갈 거라 생각하나? 오히려 광장에는 이죽거리고 빈정대는 대중들로 더욱 넘쳐날 것이다. 최소한 개념은 있어야 하지 않나?

인터넷, 섬세한 이해 속에서 문화정책으로 다루어야

다시 <100분토론>과 ‘다음 아고라’로 돌아가 보자. 그들은 다음 아고라의 여론은 다음 사업자의 여론이라고 단정적으로 말한다. 한편으로는 비웃음을 살 만한 주장이지만, 100% 틀린 말은 또 아니다.

‘다음 아고라’는 야심차게 기획되었을지는 모르지만 방치된 서비스였다. 들리는 말로는 최근 촛불집회 때문에 다음의 서버관리자들이 초죽음이 되었다고 한다. 다음 아고라의 서버가 초기 서비스 개설당시 그대로였기 때문에, 갑자기 접속이 폭주하자 서버들이 뻗어버려 장비를 새로 교체해야만 했다고 한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서비스에서 일이 터진 것이다. 바로 공유지의 희극이 벌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아고라’를 방목한 채로 ‘다음’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검색서비스와 뉴스서비스를 가지고 장난질하고 있었다. 그래서 누리꾼들에게 욕을 먹는 것이다. 누리꾼들은 뉴스서비스와 검색서비스가 순수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누리꾼들은 주요 언론사에 대한 비평만 하는 것이 아니라 포털사업자들에 대해서도 항상 감시하고 견제해왔다. 포털사업자들에 의해 삭제 또는 차단되거나 임시조치된 게시물에 대하여 항의하고, 검색어 조작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다.

인터넷은 주요 3대 포털(네이버, 다음, 네이트) 사업자에 의해 과독점된 왜곡된 시장이다. 관심 받는 콘텐츠는 집중적으로 소비되고 그렇지 않은 콘텐츠는 존재감이 사라지는 욕망의 획일화를 기획하는 자본주의적 속성과 외부성이 큰 기술적인 특성상, 트렌드의 변화가 빠르고 시장이 급변하며 진입이 자유로운 무한경쟁 시장이라는 변명에도 불구하고, 인터넷 시장은 자연독점적 성격이 매우 강한 시장이다. 현실이 보여주고 있다. 그들은 자신의 독점적 지위를 남용하여 언론의 지위도 실질적으로 획득하였다. 다양함이 숨 쉬어야 할 광장으로서의 본연의 임무를 망각하고 상업적이고 선정적인 콘텐츠로 사이트를 도배하고, 이용자가 자발적으로 생산한 콘텐츠보다는 주류상업미디어의 콘텐츠만을 대량으로 수집함으로써 주류 미디어의 왜곡된 편향을 확대재생산하는 데 몰두해왔다. 그동안 포털은 소수자의 목소리와 대안적인 비주류 미디어 콘텐츠를 완벽히 배제해왔다. 광장이되 광장이기를 포기한 그들의 엇박자 행보는 오늘날 인터넷의 폐해의 원흉이자, 민주주의의 커다란 장애 요인이다.

정부의 규제정책은 이용자 행위에 대한 직접적인 규제로만 점철되어서는 안 된다. 표현의 자유를 훼손하고 결국 헌법을 위배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이런 시장의 문제, 그리고 단순히 시장이 아닌 직접민주주의 새싹인 광장으로서 그 역할에 대한 섬세한 문화적 이해 속에서 문화정책으로서 다루어야 한다.

광장의 미래

얼마 전 ‘다음’ 부사장이자 ‘오픈 IPTV’의 대표이사인 김철균 씨가 청와대 국민소통비서관으로 임명되었다는 뉴스가 있었다. 인맥에 의한 것인지 어떤 거래가 있었는지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지만, 크게 보자면 양쪽의 이해가 맞아떨어진 결과이다. 방송과 통신서비스가 융합되는 시장의 상황 속에서 방송시장에 진입하려는 포털사업자와 어떻게든 포털사업자를 정책집행테두리 안에 포섭해두려는 정부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자본주의의 공유지의 희극으로 등장한 2008년 청계광장과 아고라가 앞으로도 광장으로서 계속 기능할지는 알 수 없다. 실명제가 모든 상업사이트로 확대되고 임시조치와 삭제행위가 더욱 횡횡할 것이 불을 보듯 뻔한 상황에서 길은 두 갈래로 보인다. 포털을 포털답게 재전유할 수 있도록 누리꾼들이 정부와 포털사업자들과 싸워 쟁취하거나, 아예 포털을 벗어던지고 자본이 만들어놓은 공유지가 아닌 새로운 자율광장을 건설하는 것이다. 둘 다 쉬워보이진 않는다. 하지만 여전히 인터넷은 시끄러우며 그 재기발랄함으로 무엇인들 꿈꾸지 못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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