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8년 06월 2008-05-09   925

[이제훈이 만난 사람] 통속의 최고봉 꿈꾸는, 곰삭은 김치 맛 배우

배우 박철민

글    이제훈 <한겨레>통일팀장
사진 김영광

배우 박철민. 많은 이들이 그를 ‘명품 조연’이라고 부른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나는 좀 다르게 표현해보고 싶다. ‘정성껏 차린 밥상의 김치 같은 배우’라고. 김치가 그 밥상의 주연인지 조연인지는 별로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나이 좀 든 한국인 가운데 김치 없이 밥을 먹을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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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볕 좋던 4월 16일 낮 참여연대 4층 회의실에서 그를 만났다. 1시간 30분 남짓한 인터뷰가 진행되는 동안, 그는 방 안의 많은 이들의 고개를 끄덕이게 했고, 참 많이 웃게 했다. 인터뷰와 관계없는 참여연대 활동가 몇몇이 끝까지 앉아 그의 얘기를 들었던 걸 보면, 그가 스타임에는 분명하다.

이 대목에서도 박철민이 누구인지 가물가물한 이들은 자신이 대중문화와 담 쌓고 사는 사람은 아닌지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 가끔은 영화도 보고 텔레비전 드라마도 보고 사는 게 정신건강에 좋다. 영화 <화려한 휴가>와 드라마 <뉴하트>에 그가 나왔다. 더 이상은 설명 사절이다.

5월호에 왜 배우 박철민을 초대했냐고? 올 들어 계속 하드보일드로 질러댔으니, 좀 부드럽게 쉬어가고 싶은 맘이 있었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박철민에게 광주는 탯줄과도 같은 그 무엇이다. 배우로서도, 그저 한국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도. 이 얘기는 좀 뒤에 하기로 하고, 이제 시작하자.

한방으로 승부하지 않는다

그와의 말문을 연 첫 질문은 ‘돈’에 관한 것이었다.

“요즘 소주 광고하시더라고요. 돈 좀 버셨겠어요. 광고는 많이 들어오나요?”

대답이 장관이다.

“각 업종에서 일단 입질이 들어와요. 어떤 업종이든 맘에 들어요. 머니가 생기니까. 다다익선, 일단은 양으로! 광고는 투입대비 산출이 높아요. 대중노출 빈도도 높고. 하지만 광고 섭외는 100건 가운데 한 두 건만 성사돼요.”

이번엔 그에게 ‘어떤 작품을 계기로 대중스타로 떴다고 생각하시냐’고 물었다.

“수많은 배우들이 한 작품으로 결정 나는 것은 아니에요. 여러 작품이 필요하죠. 영화에선 <목포는 항구다>로 인정받았고, <화려한 휴가>로 떴죠. 드라마에선 <불멸의 이순신>의 김완 장군으로 인정을 받았고, <뉴하트>로 이름을 알렸죠. 요즘은 사람들 만나면 ‘뒤질랜드 좀 해 달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삶이 로또도 아니고, 한방에 뭔가를 해보려는 이들이 새겨들어야 할 지당하신 말씀이다.

자기 강제성 기부 공개선언

스타로 떴으니 돈도 많이 벌었을 거 같아 물었다.

“돈 많이 버셨냐? 돈을 엄청 많이 벌게 된다면 뭘 하고 싶으신가?”

직답은 없었다. 복잡한, 하지만 진지한 답변이 나왔다.

“무명 연극배우 시절 삼겹살에 소주, 치킨에 맥주를 맘껏 먹는 게 소원이었는데, 이젠 그렇게 할 수 있어요. 제가 사인할 때 ‘더불어 사는 세상’이라고 적어요. 그렇게 사는 건 아니고, 살고 싶어서죠. 참여연대 등 몇 군데 기부하고 있는데, 아직은 부족하죠. 사치를 해도 남을 만큼 벌 수 있다면 모아지기 전에 수입의 몇 %는 기부하고 싶어요. 올해 안에 적절한 기회를 봐서 대중들한테 ‘수입의 몇 %는 기부하겠다’고 약속할 생각이에요. 아름다운 기부는 소리 소문 없이 하는 거라지만 전 속물이라 동네방네 소문내며 할 거에요. 실은 대중과 약속이라는 자기강제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술 마시고는 20만 원 기부해야지 마음먹었다가 다음날 술 깨고 나서는 정작 5만원만 기부한 게 한두 번이 아니거든요.”

개봉박두. 또 한명의 ‘기부 마니아’가 아름답게 등장할 날이 머지않았다.

“느자구 없는 연기, 그게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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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를 만났으니 작품과 연기에 대해 묻는 게 예의. 다시 돌아가자. 배우 박철민 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게 걸쭉한 입심과 화려 찬란한 애드리브다. 그래서 물었다. “사람들이 당신을 왜 좋아한다고 생각하느냐”고. 용수철처럼 답변이 돌아왔다.

“느자구 없는 연기를 좋아하는 것 같아요.”

‘느자구 없다’는 ‘철없다, 속없다’의 남도 말이다.

“뭔가 흐트러진, 불안하고 불균형한, 틀린 답안 같은, 하지만 친숙한, 그런 캐릭터라 좋아하는 거 같아요. 한데 실은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살아가는 거 아닌가요?”

곰삭은 김치 맛 나는 대답이다.

텔레비전 영화 소개 프로그램에선 종종 그를 ‘애드리브의 대가’로 묘사한다. 정작 그는 다소 조심스럽다.

“애드리브 잘하는 게 자랑은 아니에요. 씌어 있는 대사를 멋지게 소화하는 게 최고배우죠. 애드리브를 싫어하는 작가나 감독님도 많아요. 그래서 애드리브 잘한다는 평가가 좀 부담스러워요. 한데 저한테 주어진 배역이 대체로 웃음을 유발하고, 쉬었다 가는 이완의 효과를 주는 게 많아요. 맛깔스럽고 찰지고 걸쭉하고 구성진 대사를 찾다보면 애드리브를 하게 되지요. 제가 하는 애드리브의 60~70%는 주어진 대사의 여백을 고민하며 만들어낸 거예요. 즉흥적인 애드리브는 없어요. 대본을 수백 번씩 읽으며 캐릭터를 파고들고 그렇게 새로운 비유와 은유를 찾아내는 거지요.”

입심은 당근 그가 성장기를 보낸 남도의 선물이다.

“고향에 가면 한 집안에 한두 명 정도는 구성지게 말하는 분들이 있어요. 산과 들이 많고 물산이 풍성해서 그런가, 옛적부터 유배가 많아 글쓰기 말하기에 능한 분들이 많아서 그런가….”

대중예술로 나누고 싶은 역사, 광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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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말투나 어휘 선택이나, 말의 내용 어디를 봐도 남도, 광주의 흔적이 느껴진다. 광주는 그가 초중고 시절을 보낸 곳이다. 1980년 5월 그 광주 때 그는 광주에 있었다. 중학생이었다.

그에게 ‘광주’에 대한 소회를 묻고 싶었다. ‘광주’의 무게감 탓인가, 질문이 정연하게 나오지 않았다. 하여튼 나는 뭔가 물었고, 그는 말했다.

“광주라는 단어 자체가 설레고 살아 있고 보기 싫고 밉고 감추고 싶고, 한마디로 뭐라 말하기 어려운 복합적 감정이죠. 80년 광주 때의 6·25보다 지금 광주는 훨씬 멀지만 저한텐 바로 옆, 앞, 속에 있는 거 같아요. 하지만 요즘 젊은이들한테 광주는, 저한테 6·25나 다를 바 없을 거예요. 그런 광주가 되어버렸는데, 어쩔 수 없는 일이죠. 역사란 그런 거잖아요. 동학도 그렇고. ‘왜 광주에 관심이 없느냐’ 물을 수는 없는 일이죠. 그래서 영화 <화려한 휴가>가 의미 있고 남달랐어요.”

영화 <화려한 휴가>는 1980년 5월 17일부터 5월 27일까지의 광주를 주인공 남녀의 사랑이야기에 버무려 정면으로 다뤘다. 750만의 관객이 들었다. 광주의 무게가 엄청난 만큼 당연히 찬반 의견이 엇갈렸다. 광주를 ‘값싼 사랑’에 빗댄 ‘대중적 통속적 상업적 영화’라거나, ‘이건 진정한 광주가 아니다. 왜곡됐다’는 비판도 있었다. 박철민은 목울대를 떨며 말했다.

“80년 5월 광주엔 실제 값싼 사랑도, 값싼 인생도 많았어요. 대중적 통속적 상업적 영화라 자랑스럽고 훌륭한 영화라 생각해요. 더 깊은 얘기는 책 보면 되는 거죠. 영화에 모든 걸 요구해선 곤란하죠. 영화 <화려한 휴가>가 극장에 걸린 뒤에 네이버에 운동이란 검색어를 치면 광주가 1위로 올라왔어요. 살빼기 운동이 아니라. 광주를 몰랐던 요즘 젊은이들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한 거죠. 전 생각했죠. 나누고 싶은 역사는 예술로 만나는 게 좋겠다고.”

<태백산맥>의 염상구와 <전국노래자랑> 사회자

사실 그의 영화 데뷔작은 광주를 다룬 첫 장편 극영화인 <부활의 노래>다. 이경영이 주연을 맡아 서울에서는 중앙극장에서 개봉했는데, 장사는 안 됐다. 그는 그 영화에 ‘시민 K’라는 단역으로 나왔다. 제작진으로 있던 지인이 “사우나 값이나 벌어봐라”고 해서 출연했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 출연작도 광주를 다뤘다. <화려한 휴가>에 이어 개봉한 <스카우트>. 스카우터로 분한 임창정이 당대의 최고 투수 선동열을 끌어가려고 애쓰는 얘기다. 그는 여주인공 엄지원을 짝사랑하는 동네 주먹 곤태 역을 맡았다. 임창정의 코미디와 선동열의 스포츠를 앞세웠지만, 실은 광주 얘기다.

아시는가. 1982년 전두환의 ‘3S’라는 우민화 정책의 일환으로 프로야구가 출범했던 과거사를. 그때 왜 전국 각지의 남도 사람들이 해태타이거즈를 열화같이 응원하며, <목포의 눈물>을 목 놓아 불렀는지를…. 영화는 관객이 35만 명밖에 들지 않아, 박철민 말로는 “개망신을 당했다”. 하지만 평론가들이 최고의 영화로 꼽은 이 작품에서 그는 광주를 새삼 느꼈고, ‘배우 박철민’의 다른 색깔을 보일 수 있어서 좋았단다. 궁금한 분들은 한번 보시길.

대중스타 박철민이 앞으로 꼭 해보고 싶은 게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조정래의 <태백산맥>에 나오는 염상구 역을 맡아보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송해 선생님의 뒤를 이어” ‘전국노래자랑’의 사회자를 맡아보는 일이다.

“전국노래자랑은 가장 통속적이고 대중적이고 상업적이죠. 전 전국노래자랑 같은 배우가 되고 싶어요. 통속의 최고봉이 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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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민은 1967년생이다. 전주 외가에서 다섯 살 때까지 살다가 광주로 옮겨와 초중고등학교를 나왔다. ‘깡패를 많이 배출하기로 유명한’ 조대부고(조선대학교부속고등학교)에서 연극반 생활을 했다. 책은 읽기보다는 팔아먹기를 좋아했다. 어머니는 늘 “언제 공부할래? 이 썩을 놈아”라고 하소연하셨다. 최소한 대학은 들어가는 게 자식 된 도리다 싶어 1985년 중앙대 경영학과에 들어갔다. 경영학 공부는 하지 않았다. 대신 연극반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김지하의 <금관의 예수> <밥> 등을 공연하다, 자연스레 학생운동에 참여하게 됐다. 87년엔 얼결에 총학생회장 직무대행 노릇도 했다. 대학 4학년 때 ‘노동 현장을 찾아다니며 공연하는’ 극단 <현장>에 들어갔다. 4~5년 거기서 지내다, 그만두고 나와 트럭을 몰며 과일 장사를 2년 정도 했다. 그리곤 이후 대학로에서 연극을 하고, 충무로에서 영화를 찍었고, 최근엔 텔레비전 드라마에도 출연하고, 광고도 찍으며 산다. 한마디로 ‘떴다.’ 연극무대는 배우 박철민의 수구초심의 발원지다.

결혼은 숙명여대 연극반 출신인, 극단 <현장>의 동료와 1991년에 했다. 딸이 둘 있다. 특히 중3인 큰 딸은 ‘저렇게 공부하는 게 좋을까, 저 아이가 내 딸이 맞나’ 싶을 정도로 공부를 잘한다. 너무 공부를 많이 해서 만날 “제발 잠 좀 자라”고 한다.

뿌듯할 땐 생맥주를 마신다. 잘 말린 멸치를 고추장에 찍어 먹는다. 답답하고 고민스럽고 ‘이제 배우 그만 해야겠다’ 싶을 땐 치과의사 노릇을 하는 친한 형과 소주를 마신다. 안주는 번데기탕. 30대 초반까지는 가게 술 다 떨어질 때까지 마셨다. 지금은 소주는 한 병, 맥주는 1500cc 정도 마신다. 담배는 3년 전에 끊었다.

중년의 문턱을 넘어서고 있는 지금, 박철민은 “한국사회가 모든 사안에서 너무 한쪽으로 쏠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균형을 좀 잡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이번에 대선과 총선을 치르며 그런 생각이 더 깊어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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