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8년 07월 2008-06-30   507

기획_생애 첫 ‘닥본사’

생애 첫 ‘닥본사’

황지희 북경만학도 nabts@hanmail.net 

이곳은 중국이다. 넉 달째 베이징에서 중국어를 공부중이다. 여기 와서 무엇보다 즐거웠던 것은 뉴스를 보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었다. 연예인 이혼소식, 친박연대 탄생기, 어린쥐(?) 사태 등을 몰라도 되니 정말 좋았다. 어쩐지 맑고 투명한 인간으로 거듭나는 기분이었다.

봄날은 오래가지 않았다. 광우병 문제로 여고생들이 거리로 나왔다는 기사를 우연히 보면서부터다. 386도 아닌데 자꾸만 눈물이 나왔다. 본인들의 주장을 쿨하게 펼치는 10대들에게 질투가 났다. 시대에 뒤떨어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도 엄습했다.

닥본사(닥치고 본방 사수)는 이런 이유로 시작됐다. 시계부터 ‘대한민국’ 시간으로 다시 맞췄다. 관련 사이트들의 순례가 시작됐다. 각종 토론프로그램, MBC <9시 뉴스>, <PD수첩>, <뉴스후>, KBS <미디어포커스> 등에 관한 기사는 스포일러라 여겨 클릭도 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프로그램을 인터넷으로 직접 시청했다.

실시간 중계도 봤다. 인터넷 속도가 느려 3분에 한 번씩 새로 고침을 눌러야 하는 고통도 달게 감수했다. 나중에는 요령도 생겼다. ‘라디오21’과 ‘진보신당 칼라TV’, 사이트를 동시에 띄워놓는 거다. ‘라디오21’ 사운드를 최대한 올리고, ‘칼라TV’의 사운드를 0으로 맞추면 된다. 눈과 귀가 따로 돌아 힘들지만 그나마 최고의 조합이었다.

그런데 중간에 다시 창문을 열 일이 생겼다. 사람들이 제2의 ‘6·10’을 말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를 어쩌나. “6·10이 뭐더라? 뭘 알아야 흥분을 하지.” 그랬다. 내게 6·10은 수능에도 잘 안 나오니 대략 줄거리만 외우고 있으면 그만인 현대사였다. 아마도 87년 6월 민주항쟁, 대통령 직선제까지 밑줄을 치고, 그렇다면 노태우는 훌륭한 대통령인가보다라고 마음대로 이해해버리고 넘어갔던 게 틀림없다.

이쯤 되면 대학가서야 그 의미를 알았다고 회고할 것 같지만 그조차도 경험하지 못했다. 선배들도 이미 그 세대가 아니었다. 오며 가며 들었더라도 귀를 막았을지도 모른다. 왕년에 나도 민주투사였다고 떠드는 사람들이 짜증스러웠다. 어쩌라구요? 그렇게 대접받고 싶으셨어요?라면서 속으로 한없이 비뚤어졌다. 그때쯤에는 나도 노태우가 훌륭한 대통령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았으니까.

결국 2008년 6월 10일이 지나갔다. 늦었다. 이제야 그 87년 6월의 의미를 알 듯하다. 당시의 자료를 인터넷에서 찾아내 읽었다는 뜻이 아니다. 내가 몰랐던 것은 6·10이 아니라 민주주의였다. 그 동안 민주주의는 전세 살다가 내 집 마련하는 것과 같다고 여겼다. 젊었을 때 고생 좀 하더라도, 일단 내 이름으로 된 계약서 마련하면 평생 다리 뻗고 편하게 잠들 수 있는 것과 비슷한 줄 알았다. 민주주의에는 이제 신경 끄고 살아도 된다고 여겼다. 하지만 착각도 그런 착각이 없었다. 알고 보니 나는 언제 철거될지 모를 산꼭대기 판자집에 살고 있었다.

6·10세대들이 쏟아냈던 영웅담이나 푸념들은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가 아니었을까? 인터넷 상에서 서로가 서로를 프락치라고 의심하는 고통은 인간에 대한 환멸을 느끼게 했다. 40일 넘게 사람들이 거리로 나가도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 것을 보는 자괴감도 상상 이상의 아픔이었다. 같은 목적을 갖고 있는 사람들끼리 매일같이 물고 뜯고 싸우는 걸 보는 것도 힘겹다.

지금 겪는 이 아픔은 어떤 보상이 이뤄져야 치유될 수 있을까? 요즘 너무 무섭다. 아프다. 참말이지 내 자식에게는 2008년 6월을 ‘민주주의를 위한 행복한 고통의 시간’이었다고 증언하고 싶다. 그런데 내 딸이 “그 결과가 고작 고시연장 석 달 미룬 거? 민영화 석 달 늦춘 거?” 이러면서 비뚤어질까봐 걱정이 태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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