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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년 04월
  • 2008.03.13
  • 959



세계의 화약고 발칸은 다시 불붙나


코소보 독립선언을 통해 본 한반도의 희망적 내일



글·사진 김재명 <프레시안> 국제분쟁전문기자, 성공회대 겸임교수 kimsphoto@hanmail.net

‘세계의 화약고’라는 달갑잖은 별명을 얻어온 동유럽의 발칸반도가 다시 긴장 속에 빠져들고 있다. 지난 2월17일 그리스 북쪽에 자리 잡은 작은 지역인 코소보(Kosovo, 한반도의 1/20 크기)가 세르비아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뒤부터다. 21세기 국제질서를 주도하는 미국과 영국·프랑스·독일·이탈리아 등 유럽연합(EU)의 주요국들이 코소보 독립에 우호적이지만, 이해 당사국인 세르비아와 그 ‘형님’ 나라인 러시아는 “코소보는 국제법상 세르비아의 주권이 미치는 영토”라며 코소보 독립을 한사코 반대하는 분위기다. 세르비아 수도 베오그라드의 미국대사관이 불길에 휩싸인 것은 세르비아 사람들의 분노를 잘 나타낸다.

이민족 간 분쟁의 격전지 발칸반도

발칸반도는 끊임없이 분쟁에 휘말려온 곳이다. 영어에 ‘balkanize(분열하다)’는 어휘까지 생겼을 정도다. 언어와 종교가 다른 종족(세르비아계-세르비아정교, 알바니아계-이슬람, 크로아티아계-가톨릭)들이 유혈 투쟁을 되풀이해왔다.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20대 세르비아 민족주의자가 오스트리아 황태자를 향해 쏜 탄환은 제1차 세계대전의 불을 댕겼다. 20세기 마지막인 1990년대에는 유고연방 해체과정에서 크로아티아 내전, 보스니아 내전, 코소보 내전이 잇따라 일어났다.

그런 발칸의 불길은 아직 꺼지지 않았다. 이번엔 코소보다. 1998~9년에 걸쳐 인구 200만의 코소보에서는 조직적 인종청소와 성폭력범죄가 벌어졌다. 그에 뒤이은 보복은 “피가 피를 부른다”는 말 그대로였다. 그 전쟁으로 150만 난민이 생겨났고, 1만 명이 죽었다. 가해자는 세르비아 세력이고 피해자는 코소보 주민의 90%를 차지하는 알바니아계 주민들이다.

필자는 코소보에 세 번 다녀왔다. 코소보를 돌아볼 때마다 ‘우리 인간은 어디까지 잔인해질 수 있는 것일까’하는 생각에 빠지게 됐다. 1999년 6월초 코소보로 진입하는 나토군을 따라 현지로 들어서니, 곳곳에서 희생자들이 버려진 채 썩어가고 있었다. 그 일부는 전쟁의 혼란 속에 주인을 잃은 굶주린 개들에게 훼손당한 끔찍한 모습이었다. 코소보 서부 코레니차 마을로 들어서니, 바로 그렇게 온몸이 물어뜯긴 시신 앞에서 40대의 한 여인이 울부짖고 있었다. 그녀에게 카메라를 들이댄다는 것이 송구스러울 만큼 울음소리는 처절했다.

지구촌의 다른 많은 전쟁들이 그러했듯이, 그 전쟁도 종교, 언어, 문화, 정서가 다른 이민족끼리의 유혈극이었다(다수 알바니아계는 이슬람교, 소수 세르비아계는 동방정교의 하나인 세르비아정교). 코소보 인구의 90%를 차지하는 알바니아계 주민들은 자치권 확대를 바랬다. ‘위대한 세르비아 건설’을 구호로 내세워 권력을 잡았던 슬로보단 밀로셰비치(전 유고연방 대통령)는 그 같은 요구를 무력으로 짓밟았다. 세르비아 보안군, 경찰, 준군사조직(민병대)들이 저지른 행위는 전쟁범죄 그 자체였다. 나토군 집계에 따르면, 적어도 5천 명의 알바니아계 민간인들이 마구잡이로 즉결 처형당했다.

나토 평화유지군하에서 독립을 준비해 온 코소보

세르비아계의 공세로 사상자가 늘어나고 난민들이 늘어나자, 서방언론들은 서유럽 땅으로 발칸난민이 홍수처럼 밀려들 것을 걱정했다. 동유럽을 자국 시장권에 편입하려던 미국 기업들도 시장 위축을 걱정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나토(NATO) 군이 ‘인도주의’라는 거창한 깃발 아래 1999년 3월에 개입, 78일 동안의 공습이 벌어졌다. 유럽 땅에서 멀리 떨어진 수단 다르푸르 지역에서 최근 4년 사이에 20만 명이 인종청소를 당하는 비극이 벌어져도 팔짱을 끼고 바라보는 모습과는 참 대조적이다. 전쟁 뒤 5만 명의 나토 평화유지군이 진주했고, 코소보는 유엔의 ‘보호령’으로 바뀌었다. 지금도 1만2천 명 규모의 나토군이 평화유지군으로 활동 중이다.

전쟁이 끝난 지 어느덧 9년 가까이 흘렀지만 코소보는 뿌리 깊은 민족 갈등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세르비아계와 알바니아계 사이의 총격전과 폭력이 그치질 않아왔다. 나토군이 주축이 된 코소보평화유지군과 유엔코소보행정청(UNMIK) 소속 경찰들은 그런 피의 현장에 출동하느라 늘 바쁘다.

코소보 사람들은 알바니아계(200만), 세르비아계(15만) 가릴 것 없이 모두 전쟁의 깊은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 코소보 북부도시 미트로비차는 알바니아계-세르비아계 사이의 갈등에서 비롯된 코소보 위기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곳이다. 시내를 남북으로 가르는 이바르 강을 사이에 두고 남쪽은 알바니아계가, 북쪽은 세르비아계가 주도권을 쥐고 대치중이다. 지난날 동서로 갈렸던 베를린처럼 분단도시가 됐다. 이 두 개의 다리를 사이에 두고 걸핏하면 충돌이 벌어져왔다. 

전쟁 뒤 지난 9년 동안 코소보가 과연 독립국가가 될 것인지는 국제사회의 커다란 관심사였다. 결국 지난 2월 독립을 선언했다. 그 선언을 이끌어낸 인물이 1999년 전쟁 때 코소보해방군(UCK) 사령관을 지냈던 하심 타치 코소보 총리다. 코소보 사람들의 희망은 가능한 한 빠른 시일 안에 독자적인 헌법을 제정하고 독립국가의 틀을 갖춰나가는 것이다. 나아가 유럽연합(EU)의 회원국이 되는 것이다.

코소보에 견준 한반도의 희망

자연법의 논리에 따르면 주민의 다수는 자신들의 운명을 결정할 권리가 주어진다. 코소보의 내일은 커다란 숙제를 안고 있다. 다수 알바니아계-소수 세르비아계 사이의 갈등 해소(화해)다. 언어 종교가 다른 민족이 섞여 사는 지역에 조화로운 다민족사회를 건설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코소보 내전을 취재하면서 필자는 “우리 한반도는 같은 피와 언어를 지녔기에 통일이 훨씬 쉬울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코소보에 비하면 한반도의 분단극복은 희망적이다. 피의 학살과 보복전을 치러왔던 세르비아계와 알바니아계 사이의 증오가 화해로 바뀌려면, 한국전쟁을 치른 뒤 50년 만에 남북정상이 만났던 한반도처럼 긴 세월이 흘러야 할까? 피와 언어가 같은 우리 한민족보다 더 긴 시일이 걸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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